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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Delta(8) (97/283)

9. Delta(8)

사람을 보자마자 토했으니 기분 좋을 리는 없겠지.

하지만 지금 지호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상황이 아니었다. 도저히 이원과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지호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 나 좀…….”

지호가 급히 일어나 주이원을 지나치려던 순간, 덥썩 손목이 잡혔다.

“악!”

억센 힘이 지호를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제대로 조절도 하지 않은 힘에 지호는 언젠가의 밤을 떠올렸다.

가슴에 큰 상처를 입은 이원이 알 수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지호의 목을 물어뜯은 그날 밤.

주이원의 그림자가 몸 위로 드리우자 지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원에게로 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던 직후의 아침, 이원이 다음 날 멀쩡해 보였던 것도 설마 그런 원리일까.

“신지호.”

주이원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던전 공략을 끝내자마자 급히 왔는지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아래, 황금빛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지호는 이원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이 주이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던 게 맞을까. 지금까지 봐온 건 어쩌면 허상이 아닐까.

‘이것’은 대체 뭐지?

“신지호. 왜…….”

“…….”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이원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지호를 바라보는 이원의 눈동자에는 그가 방금 입은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원의 모든 게 거짓일 리 없다.

그 한순간, 한순간이 단지 지호에게서 뭔가를 갈취하기 위한 순간이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 역시 지나치게 선명해서…….

진실과 비밀의 경계를 들여다 본 지호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문 이원이 지호의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큰 손이 만들어 낸 어둠 아래에서 지호는 온기를 느꼈다. 축축하게 젖은 느낌과 함께.

언제부터 울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괴로웠다.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쉬어, 신지호.”

쉬라는 소리는 이원이 한때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그때는 다정하고 걱정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는데. 지금의 말은 마치…….

“명령이야.”

그래, 마치 군주가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처럼 고압적이라…….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명령에 반응이라도 하듯 고집스레 뜨여 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닫혔다. 그리고 지호의 몸에서 완전히 힘이 빠졌다.

이원은 의식 잃은 지호의 몸을 붙든 채 이를 악물었다. 이원의 손이 창백한 지호를 만지는 손길은 여느 때와 달리 불안했다. 형편없이 떨리는 와중에 어딜 붙잡을지 몰라 혼란스러운 손짓.

신지호의 불신에 찬 눈빛 한 번에 주이원은 길을 잃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원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사람들은 주이원이 제멋대로 군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헌터가 된 이후 자유를 누린 적이 없다. 커다란 계획에 자신을 톱니바퀴처럼 끼워 맞췄을 뿐.

자신이 정말 자유롭게 행동했다면 신지호는 지금처럼 다른 사람은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이원은 갖고 싶은 게 너무 크다면 부숴서라도 제가 가진 상자 안에 넣는 성격이었으니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 오늘도 욕망을 누른 채 얌전히 지호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힐 수밖에.

이원은 지호의 옷을 벗겼다. 이전에는 스스럼없이 만진 몸이지만 이원은 직접 손을 대지 않은 채 스킬을 써서 옷을 갈아입혔다. 정말로 손을 댔다가는 자제할 자신이 없어서.

차라리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면 괜찮을 텐데, 신지호와의 연애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기억하고 있어서 더욱 괴롭다.

지호의 옷을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이불까지 덮어 준 이원은 미련이 남아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대신 침대에 앉아 지호를 한참 내려다 봤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분침이 몇 바퀴를 돌 동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만족한다는 듯이 집요하게.

몇 시간은 때에 따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시간이다.

하지만 신지호를 다시 만나게 된 주이원에게 몇 시간쯤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단순히 비교해도 정말 찰나가 맞다.

“넌 내가 너를 다시 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고생했는지 모르지?”

원망하듯 속삭이며 이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호와 함께 뛰어 놀던 때의 자신이라면 이쯤에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지도 모른다. 한때의 이원이 그랬듯이.

아직 까마득한 애송이였던 시절의 일이다. 나름 순진하고 정 많고 제대로 된 인간이었던 때. 실제의 시간은 몇 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이원의 감각 속에서는 훌쩍 지나간 과거에 불과했다.

이원에게는 지호가 없는 세상에서 발버둥 치며 매일 눈물 흘리던 밤이 있었다. 그냥 죽고 싶은데, 이원을 살리고 싶다던 신지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자살하지 못하는 채로 하루하루 간신히 살아남던 때가.

살고 싶지 않았는데 아득바득 살아남았다. 그 시절의 초반에 눈물은 모두 흘리고 이제 메말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이후 신지호가 봤다면 경멸했을 만한 짓도 수없이 했다. 이원이 죽인 자의 피가 흘러간 종착지에는 바다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만큼 오랜 세월 수없이 죽였으니까.

“나를 다시 좋아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이원은 지호에게만큼은 그렇게 뻔뻔하지 못했다. 선량하고 바른 신지호가 사랑했던 주이원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풍화되어 사라졌다. 여기에 있는 건 그저 애정이라는 이름의 집착만이 남은 망령이다.

신지호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정작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삿된 자.

어차피 신지호는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 주이원조차 깰 수 없을 강력한 마법이 기억을 봉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마법에는 지호의 의지가 섞여 있을 것이다. 감히 관리자의 기억과 정신을 완벽하게 제어할 마법은 신이라도 사용할 수 없으니까.

주이원은 그 사실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묘하게 안도하고 있었다. 속이 완전히 시커멓게 썩어 버린 제 속내를 지호가 알게 되어 도망갈까 봐.

“좋아하지 않는 건 정말 괜찮으니까…….”

그저 옆에 있는 것으로도 만족한다. 살아있는 신지호를 보며 가까이 있는 정도로도 충분히.

“하지만 도망치지는 마.”

눈앞에서 도망치는 꼴을 보느니 같이 죽어 버리는 게 낫다.

“날 버리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잖아?”

이제 혼자 남고 싶지는 않으니까.

* * *

“으…….”

머리가 몹시 아팠다. 심한 숙취라도 있는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창밖을 보니 아직 아침 같았다.

조금 멍한 상태로 지호는 잠들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양호진에게 이상한 소리를 듣고, 본가에 가서 확인하고, 친구들에게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방을 조금 뒤지다가 잤나?

잠깐 눈을 붙인 건가 싶어서 단말기를 확인하니 날짜가 아예 넘어가 있었다.

미쳤나? 거의 하루를 꼬박 통으로 날렸다. 어쩐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 너무 먼 과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더라니.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아서 들어온 상대는 당연하지만 주이원이었다.

이원의 손에는 쟁반에 받친 컵이 올라가 있었다. 설마 쓴 약인가 싶어서 불길함을 느낀 지호가 움찔했다.

“자기야.”

“뭐야.”

“여기 꿀물 대령이에요, 여보.”

“뭐라는 거야?”

투덜거렸지만 약이 아니라 꿀물이라니 환영이다. 어차피 숙취 해소 음료라도 먹고 싶은 기분이라 얌전히 받아 마셨다. 한 번에 몽땅 입에 털어놓고 나니 정신이 조금은 맑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제의 기억이 희미하다.

‘아, 몰라……. 생각하기 싫어.’

좋아하든 말든 중요한 건 아닌데 꼭 머리 아프게 생각해야 할까?

지호는 무의식적으로 기절하기 직전까지 매달리던 고민에서 도피했다. 인식은 하되,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도록.

이전보다 훨씬 불완전한 상태의 봉인만 남기고, 더는 모르는 채 있을 유예가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원은 지호가 꿀물을 모두 마신 컵을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이제 밥 먹자, 자기야.”

“아…….”

“밥 차려 놨어. 씻고 나와.”

지호는 이원의 말대로 씻고 나왔다. 거대한 식탁 위에 버거울 정도로 다양한 음식이 담겨 있다.

“어디 업체라도 불렀어?”

“내가 손수 한 건데 업체라니.”

“이걸 다 어떻게 했냐.”

이원이 미소 지었다. 하긴, 골렘을 써서 던전 채집까지 하는 놈인데 요리를 못할까. 설마 여기에 S급 마석이 쓰인 건 아닌지 미심쩍은 눈으로 보다가 차마 묻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았다.

“맛있네.”

지호가 칭찬하자 이원이 활짝 웃었다. 제 입맛에 딱 맞아서 지호는 정갈하게 담긴 반찬을 연달아 집어먹었다. 종일 굶어서인지 음식이 술술 넘어갔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서야 정신 차린 지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누구, 류대건?”

“어, 류대건 헌터도 궁금하긴 한데…….”

“류대건은 일 못 해서 잘랐어.”

“……야.”

“어차피 나 나왔으니까 끝이지. 그 살인마도 잡혔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중에 따로 대건에게 지켜 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전해야겠다. 일단 그건 나중 일이고 지호가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너 왜 그 사람이 날 찾아올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애인의 감.”

“개소리하지 말고.”

“자기를 향한 사랑이 부른 기적.”

“똑바로 말해라.”

지호가 위협적으로 노려보자 이원이 가볍게 웃었다.

“뭐… 미국 정보통 쪽을 이용했다고 해 둘게. 널 노릴 이유야 많으니까.”

“그래.”

얼버무린 것 같지만 지호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말할 생각 없으면 절대 안 할 놈이니까.

“그리고 이번 건은 워낙 요란하게 터트리는 바람에 각성자 범죄라고 기사를 띄우긴 했어. 다만 언론에는 국적이 정확히 공개되진 않았고, 그놈은 미국으로 가서 처벌받을 것 같아.”

“그놈을 미국으로 보낸다고?”

지호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이원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선 몇 명이나 죽였잖아? 어쨌든 헌터는 자국에서 처벌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

“너무 걱정하지 마. 너한테 해를 끼친 놈을 내가 그냥 두겠어? 능지처참을 해야지.”

“하지 마라.”

“지호는 너무 착하다니까.”

“네 농담이 과격한 거야.”

지호는 구체적인 질문 대신 단말기를 켰다.

“밥상에서 단말기 보면 안 되지.”

“있어 봐.”

객관적인 시점에서 사건을 보고 싶었다. 지난밤의 일은 폭발물을 다룰 줄 아는 F급 각성자의 증오 범죄로 밝힌 모양이다. 신지호와 류대건이 습격당했으나 무사히 제압했다고.

제임스 휘태커의 이름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으로 가서 받는 처벌은 열 명을 죽이고 추가로 두 명을 더 죽이려고 한 살인마에 걸맞은 수위는 아닐 것이다.

다른 범죄들과는 달리 한국은 헌터에 대한 처벌이 확실한 편이다. 범죄를 저지른 헌터를 어설프게 처벌하려고 하면 ‘누군지 알 것 같지만 증거가 남지 않아 확정할 수 없는 누군가’가 사적으로 응징해 버렸으니까. 하지만 외국은 사정이 다르다.

귀한 A급 헌터를 교도소에서 썩히겠는가? 부지런히 밖으로 돌리겠지. 정부의 일을 맡으며 바쁘게 구르겠지만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거다.

“짜증 나네…….”

일부 과격한 사람들처럼 헌터에게 폭탄을 채우고 감시하자거나, 가차 없이 사형시키자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사람을 제 이득으로 죽이려한 놈이 그만큼의 죄 값을 치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

지호야 살아남았지만 죽은 다른 사람은 돌아올 수 없으니까.

자신은 살아남았다지만 입맛이 썼다. 그리고 얼굴 본 적 없는 이들의 죽음에 분개하는 지호를 묘한 눈으로 보던 이원은 이내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헌터 스페이스

제목: 좆같네 진짜

범죄자 새끼 하나 땜에 헌터 이미지 좆같아져서 구독자 수 존나 떨어짐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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