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Delta(5)
“사실, 우리는 그대가 각성했을 때부터 널 지켜보고 있었어.”
선심 쓰듯 하는 말에 지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지켜보고만 있었는데요? 진작 접근하든가…….”
‘양호진’이 길드에 들어온 건 극히 최근이다. 각성했을 때부터 지켜봤다면 적어도 노네임 길드가 만들어졌을 때 다가와서 접촉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호진은 의심에 휩싸인 지호에게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 지어 보였다. 본색을 드러낸 호진은 정말 이야기 속 요물인 여우가 사람이 된 것 같은 분위기라… 썩 신뢰가 가지 않았다.
“당시의 그대는 시스템을 확인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약에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완벽하게 위장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거든. 나는 그때만 해도 미르 길드의 일에 손대지 않고 있다가… 어르신의 부름을 받고 오게 된 거야.”
“아무나 속일 수 있는 건 아니군요?”
“그래. 둔갑술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라면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지. 실제로 길드에 소속된 ‘양호진’은 정말 C급 헌터의 힘밖에 사용하지 못해. 위장을 풀면 바로 들통 나는 존재란다.”
호진은 인상을 찌푸린 채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 시점에 나타날 생각이 아니었어. 이거 함정에 빠진 거 아닌지 몰라.”
“……저를 습격한 게 당신을 낚기 위한 함정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억측이었으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호진은 의심스러워서 한 뒷조사마저 완벽히 피해 내지 않았나. 그렇게 원래대로라면 깨질 일 없는 완벽한 위장을 드러내고 나타났으니까.
“누가 당신을 낚으려 하는데요?”
“그대의 주변에 있으면서 늘 우리의 접근을 차단하는 인물이지.”
그 말에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하나뿐.
“주이원?”
“맞아. 그치가 수상한 걸 알긴 아는구나.”
“아니, 그쪽이 접근 못 할 만큼 강한 게 이원이 밖에 없잖아요. 제가 걜 의심하는 게 아니라.”
발끈해서 반박하는 지호를 향해 호진이 고개를 모로 기울여 보였다. 주인의 의문에 반응하듯, 풍성한 아홉 갈래의 꼬리가 서로 엉키지도 않고 자연스레 하느작거리며 움직였다.
“의심 안 해?”
“안 해요. 애초에 그쪽도 세지 않아요? 김태용 헌터는 적어도 SS급 이상이던데, SSS급일 수도 있고.”
호진이 고개를 저으며 픽 웃었다.
“물론 우리 도련님이 강하기는 하시지만 SSS급은 아니야. 그 정도로 강한 자들은 한 세기에 한둘 생겨날까 말까 하지. 날 때부터 SSS급인 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 SS급이 SSS급으로 성장하니……. 도련님도 천년쯤 지나면 SSS급이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아직 비늘이 말랑말랑한 나이니까.”
“……혹시 해서 묻는데, 김태용 헌터의 종족과 나이가?”
“용왕의 아드님이시지. 나이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100은 넘었을걸?”
“…….”
사기다.
물론 본인들 기준에서는 어릴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인 지호가 볼 때는 완전 늙은이였다. 어린 티는 다 내더니 늙은이었다니……. 하긴 어리다기에는 말투가 좀 영감 같긴 했지만.
“SSS급은 내가 알기로 지금 이 세상에 세 분 계시지.”
셋이라면 생각보다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그 아래의 SS급은 그보다는 많을 거고, S급은 알려진 수보다 훨씬 많겠지.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지호를 가만히 보던 호진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중 한 분인 황룡 님이 직접 주이원의 등급을 확인하러 가신 적 있어. 그분이 내놓은 결과는… 주이원이 자신보다 훨씬 더, 까마득하게 강한 존재라는 거였지.”
“……주이원이요?”
SSS급보다 훨씬 까마득하게 강한 존재. 적어도 같은 등급에서 비슷한 감상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 그자는 아마 EX급일 거야.”
EX.
지호의 스킬 중 몇몇에 그런 등급이 붙어 있기는 했다. 하나같이 사기적인 위력을 가진 스킬들이라 이런 등급이 사람에 책정될 리 없겠다고 여겼던 것들.
그런데 주이원이 EX급이라고?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상상해 보려 했지만… 감이 잘 오진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지호를 바라보며 호진의 꼬리가 느릿하게 살랑거렸다.
“단순히 알파벳 따위로 말하니 감이 안 오겠지. 등급은 갈수록 격차가 벌어져. A급과 S급의 차이는 알고 있잖니?”
“물론, 알죠.”
“그래. 그 위로는 격차가 점점 더 커진단다. 음, 예를 들자면… S급인 나는 한 시간을 주면 이 동네를 돌면서 보이는 사람을 모두 죽이는 정도는 할 수 있어. 겸사겸사 건물도 부수면서 말이지.”
“……예시가 너무 극단적인데요.”
찝찝하고 불길한 예시에 지호가 거부감을 드러내자 어째서인지 호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응, 그렇지. 난 착한 여우란다.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야 그대가 실감하지 않겠어?”
“…….”
“내가 그 정도라면 SS급은 한 시간 동안 사람이고 건물이고 가리지 않고 서울의 절반쯤은 전부 부숴 버릴 수 있지. SSS급쯤 되면 한 시간 동안 서울부터 경기도 정도는 가루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EX급은…….”
경험해 보지 않은 경지를 가늠하려는 듯 호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파괴할 수 있는 범위가 나라 단위일 수도 있고, 행성 단위일 수도 있단다. 차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지. 그 정도 수준이라면 피조물에게 허용된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에 가까우니까.”
“…….”
너무 과한 이야기에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조물에게 허용된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주이원은 인간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지호와 함께 살아 온… 평범하지는 않고 조금 비범한 사람.
“그렇게 강한 힘을 한낱 인간이 자연적으로 지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
“평범하게 태어난 인간이 고작 스무 해 만에 EX급이 되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주이원의 근처에는 EX급이 있었지. 바로 그대.”
“전 S급인데요.”
“그대도 알 것 같은 사실이지만, 지금 그대는 이상하리만치 약해져 있어. 원래대로라면 훨씬 강했어야 할 텐데도.”
“…….”
“특히나 첫 번째의 수호자는 별이 특별히 공을 들인다고 해. 무려 별이 수천 년간 생존을 위해 갈고 닦은 영혼이 S급에 불과할 리가 없지. 그렇지 않니? 추측이지만 그대의 스킬은 S급보다는 훨씬 더 높은 등급일 텐데. [별의 축언]. 정말 말도 안 되는 스킬이지 않니?”
의심을 불어넣는 여우의 말에 지호는 대답하지 못한 채 숨을 들이켰다.
호진의 말대로 지호의 스킬은 EX급이었다. 지금까지 시스템창을 봐 온 바, 본인의 등급보다 한 단계 높은 스킬을 지닌 경우는 꽤 있지만 두 단계나 높은 스킬을 지닌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원래 지호의 등급은 최소 SSS급이라는 소리다.
지호는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호진을 노려보았다. 호진은 다 잡은 사냥감을 요리하듯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처음의 그대는? B급도 감지덕지하는 처지였지. 원래 EX급이었을 그대의 힘이 어디로 갔을까. 분명 그대는 훨씬 더 강한 존재일 텐데. 지금보다 더.”
“…….”
“주이원과 가깝게 지냈을 때부터 몸이 안 좋지 않았니?”
혼란스러운 지호에게 쐐기를 박듯 양호진이 속삭였다.
“그대, 어릴 적에 언제부터 아팠니? 태어날 때부터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대여섯 살 즈음부터…….”
홀린 듯이 대답하는 지호에게 호진이 씩 웃어 보였다.
“그럼 주이원을 처음 만난 건 언제지?”
“…….”
대여섯 살 즈음부터다.
“억측이에요.”
지호의 강한 반발에도 호진은 그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지호가 그렇게 말하리라 이미 예측한 것처럼.
“그대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분명히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했지.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서, 나는 주이원이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워.”
“하다못해 무슨……. 어디까지 가려는 거예요? 적당히 좀 하세요.”
“우리는 그대를 돕고 싶을 뿐이야.”
“…….”
그 ‘돕는 것’이 신지호와 주이원을 떼어 놓는다는 건가.
“이상한 소리 하려면 꺼져. 듣기 싫으니까.”
“미움 산 모양이네. 하지만 난 그런 건 익숙하지.”
호진이 지호에게로 다가왔다. 그에게서 기묘하게 좋은 향기가 풍겨 온다. 지호는 절로 무너지려는 경계심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알아. 그대가 주이원을 비호하는 건 그저 친구를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지. 그렇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지호가 흰눈 뜨고 바라보든 말든 양호진은 여유롭게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같은 선에서 위치한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처럼 호진의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났다.
상대는 천 년을 살아온 여우. 사람을 꾀어내는 일은 수없이 해 왔을 터. 저 자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
“내가 주이원과 그대의 관계에서 가장 이상하다고 느낀 게 뭔지 알아?”
하지만 무심코 지호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궁금해서 듣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말을 하며 호진이 눈웃음쳤다.
“주이원은 그대를 사랑하잖아.”
맥이 탁 풀린다.
“아니, 그건…….”
“그대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대와 주이원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면 다 동의할걸. 주이원이 그대를 사랑한다고. 그 행동이 사랑이 아닐 수는 없다고.”
“……아니, 걔는 친구인데요. 그리고 힘을 빼앗느니 뭐니 해 놓고 사랑은 무슨 사랑이에요?”
“상대를 미워해야만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건 아니란다. 그래, 사랑은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지. 주이원은 사실 그대의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 거짓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중일 수도 있고.”
그 말을 직접 증명해 보이듯 고개 숙인 호진의 눈빛은 정말로 지호를 사랑이라도 하는 양 부드러운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자가 진심으로 그대를 사랑하는지 아닌지가 아니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면 대체 뭐가 중요한 건데. 울컥 튀어나온 생각을 내뱉지 못한 건 말로 꺼내는 순간 다른 것들도 함께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널 지켜본 사람이라면 ‘주이원이 널 사랑한다’라는 명제에 동의하리라는 거야. 누가 보든 주이원은 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거든.”
“개소리…….”
지호의 말끝이 흐려졌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왜 확실하게 부정할 수가 없지?
호진은 그런 지호의 반응을 기다린 듯 씩 웃었다.
“그래, 그대가 그렇게 그 명제 자체를 부정하는 게 이상하다니까?”
“…….”
“내가 지켜본 그대는 애정에 익숙하지만 우정과 연정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지는 않지. 오히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항상 존중해 줘. 평소에도 누군가 그대를 좋아하면 퍽 빠르게 알아차리는 편 아니니?”
“…….”
“그런데 왜 주이원이 하는 사랑 고백은 무조건 거짓이라고만 생각할까? 옆에서 보기엔 누가 봐도 사랑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
“…….”
“내가 볼 때 그대의 마음속에는 ‘주이원을 좋아한다’라는 가정이 아예 거세되어 있어.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지. 누군가의 인위적인…….”
“그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헛소리에 지호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모두 말도 안 되는 억측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 해요. 주이원이 날 이용하기 위함이라면 뭐하러 그런 짓을 하겠어요?”
“맞아. 그렇지, 그렇게 할 필요 없지. 사랑을 속삭이며, 구슬리고, 뼛속까지 빨아먹는 게 이득일 텐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하겠니? 지금의 주이원처럼 구애하며 애정을 갈구하는 게 이득이지.”
“알고 있으면서 왜…….”
“주이원이 그대의 정신에 손을 댔다는 게 아니야. 모든 생물은 감이라는 게 있단다. 본능적으로 알지. 저게 내게 해로운지 이로운지.”
그리고 지호의 감은 주인의 마음을 배신한 채 호진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힘을 빼앗긴 그대의 본능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저것’은 그대에게 해충과 같은 존재라고. 결코 그대의 모든 것을 줘서는 안 된다고.”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