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Delta(2)
주이원의 집 안으로 들어온 황혜림이 눈을 반짝이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저곳 예리한 눈으로 뜯어보던 혜림은 거실 소파에 도착할 즈음, 박수를 치며 탄성을 내질렀다.
“와, 예쁘다. 신혼집 잘해 놓고 사네.”
“신혼집 아니에요.”
“나도 이렇게 꾸며볼까 봐. 대건 씨는 맘에 들어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에이, 뭘 그렇게 선을 긋고 그래요.”
딱히 그 누구의 말도 귀담아듣지 않은 채 발랄하게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 혜림은 친구 집에 놀러 온 듯한 태도로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반면에 류대건은 군기가 바짝 들어간 군인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소파 뒤에 서 있었다. 혜림이 손짓하자 그제야 옆자리에 앉지만, 몹시 불편한 간이의자에 앉은 것처럼 자세가 꼿꼿하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대비된 분위기인데 같이 있으니 묘하게 어울리는 두 사람을 지호는 천천히 살펴보았다.
황혜림은 길드 노세의 길드장이고, 류대건은 부길드장이다. 황혜림이 길드장이니 노세 역시 꽤 유명한 대형 길드일 것 같지만, 노세는 유명세와 거리가 먼 소형 길드에 불과했다.
물론 혜림이 소형 길드에 몸 담은 데는 다 사연이 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 다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사연이다.
본래 부잣집에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황혜림은 20대 초반에 큰 사고를 겪고 죽다 살아났다. 생사의 기로에서 자신이 열심히 살아온 것에 회의감을 느낀 혜림은 이후 인생을 즐기자는 모토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S급의 이동술사로 각성하게 되고, 즐겁게만 살고 싶었던 혜림의 인생에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희귀하고 유용한 S급의 이동술사를 노리는 사람은 너무나 많았고 혜림은 쉴 틈 없이 납치의 위협을 받았다.
그런 혜림을 보호해준다고 나선 이들도 많았지만, 혜림은 다른 이의 손을 잡는 대신 스스로 길드를 세웠다. 남들의 명령을 받는 건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런 까닭에 노세는 황혜림 한 명을 위한 길드가 되었다. 노세는 각종 위험에서 혜림을 보호하고, 수많은 의뢰가 쏟아지는 혜림을 보조하기 위해서 굴러간다.
그래서 혜림이 꺼낸 이야기는 무척이나 뜻밖이었다.
“류대건 헌터를 제 경호원으로 붙이시겠다고요?”
안전을 위해 떼놓지 않던 류대건을 대뜸 신지호에게 붙이겠다니. 놀란 지호와 달리 혜림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국의 그 연쇄 살인마놈이 잡히기 전까지만요.”
“하지만 그동안 황혜림 헌터는…….”
“아아, 며칠 정도는 상관없어요. 저는 오늘부터 무척 안전한 장소에서 휴가를 즐길 거거든요? 거긴 안전해요. 함부로 못 드나드는 게 문제지.”
“감금 상태 아닙니까?”
“주이원 씨의 급한 일정이 끝나는 날 계약종료니까 괜찮아요. 며칠 정도야 호캉스 보낸다고 생각하면 되죠. 그리고 대건 씨는 제가 휴가를 받는 동안 부업으로 경호 업무를 하는 것뿐이에요. 서로에게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요?”
애초에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인데 한국에서 경호원까지 붙이며 대비할 필요가 있을까? 미국 정부나 헌터 협회가 바보도 아니고, 국외로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며 계속해서 추격할 텐데.
혜림은 좋은 제안이라고 했지만 받아들이는 지호 입장에서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게다가 밀착 경호라면 더더욱 곤란했다.
“……저는 길드장이라 극비 자료도 많이 취급합니다. 밀착 경호는 곤란해요.”
“아항, 물론 그 부분은 계약서에 기밀 유지 항목으로 들어가 있죠. 사실 계약서는 이미 이원 씨와 대건 씨 사이에 작성되어 있어요. 지호 씨가 서명만 하면 돼요. 물론, 조항을 추가하고 싶으면 직접 추가하셔도 괜찮고요. 일단 한 번 보실래요?”
지호는 혜림이 자연스럽게 내민 계약서를 얼결에 받아서 살폈다.
계약서에 적힌 문장을 읽어 보던 지호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질렸다. 계약서를 위반하느니 차라리 한 번에 죽여 주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흉흉하고 끔찍한 수위의 패널티가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뭐 이런 살벌한…….”
“어차피 어길 일 없으니까 패널티는 무거워도 괜찮아요. 류대건 씨 한 번 믿어 봐요. 괜찮은 사람이라니까?”
딱히 류대건이 못 미더워서 거절하려는 건 아닌데…….
남의 일이라고 태평하게 말하는 혜림 대신, 지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표정이 없는 대건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 이런 조건으로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일로 돈을 벌어들이게 되어 기쁩니다.”
평온한 표정을 보며 지호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원래 돈이 급한 사람이었던가? 혜림의 전속 경호원으로 돈은 많이 벌었을 것 같은데…….
어쨌건 본인이 괜찮다면야 지호도 더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솔직한 심정으로는 사양하고 싶지만 주이원이 이미 돈을 지불했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다.
지호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계약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서명할게요.”
“좋아요, 좋아.”
혜림이 희희낙락하며 내민 계약서에 지호는 마력을 불어 넣었다. 지호의 마력이 계약서의 이름 옆에 닿자, 특수한 종이가 반응해 오묘하고 섬세한 무늬를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지호의 마력을 새겨 넣는 것으로 계약이 끝났다.
“후…….”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다. 지호는 지금쯤 던전에 들어간 이원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픈 마음을 꾹 참아 눌렀다.
그래, 이원도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평소에 이원이 아무리 과보호를 한다지만, 지구 반대편 타국의 일에 예민하게 구는 건 처음이다. 아무 이유 없이 대건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의뢰 성공이네요.”
뿌듯하게 웃으며 혜림이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공간을 넘어 휙 사라졌다.
“왜 저렇게 좋아해요?”
“길드장님께 이 일을 성공시켰을 시의 보수도 따로 제시하셨기에…….”
“…….”
진짜 돈지랄 장난 아니다. 돈 많은 사람의 의뢰를 주로 받아 자산가로 이름을 알린 혜림이 기뻐할 정도면 한두 푼도 아닐 텐데.
아무 데나 낭비할 돈 있으면 날 주라고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정말로 잔뜩 줘 버릴까 봐 지호는 문장을 모두 지웠다.
“그럼 오늘은 출근 하십니까?”
“네, 그래야죠.”
“알겠습니다.”
당연하지만 길드까지 따라올 모양이다. 계약서에는 화장실에 갈 때 빼고는 계속 지켜보기로 되어 있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할 수 없이 류대건을 경호원으로 달고 출근하니 길드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지호와 대건의 주위로 몰려와 사정을 들은 길드원들이 하나둘 소리높이기 시작했다.
“뭐예요, 왜 우리 길드 헌터 놔두고 노세 길드 사람을 경호원으로 삼아요!?”
“저희 길드 내부의 인력으로도 얼마든지 경호할 수 있습니다. [별의 축언]이 있으면 등급은 크게 관계없으니.”
“마, 마, 맞아요……. 저희로도 충분, 한데?”
“다음에는 저를 경호원으로 삼아 주십시오!”
유명인을 만났다고 떠들썩할 줄 알았더니 길드원들은 다른 쪽에 잔뜩 흥분했다. 당연히 자기가 할 일을 뺏긴 것처럼 아쉬워하면서.
밀착 경호가 좋은 일은 아니지 않나? 지킬 것도 많고 경계를 늦출 수 없어 피곤한 데다가, 길드원 입장에서는 다소 어려운 존재인 길드장과 하루 종일 함께 있어야 하는데.
허소리나 임승주, 양호진 같은 길드 확장 이전의 멤버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온 길드원도 비슷한 반응이다.
제게 맡겨 달라는 길드원을 보며 지호는 묘한 감동에 젖었다. 이전 같으면 다들 지호를 거대 바퀴벌레 보듯 피했을 텐데 이제는 24시간 밀착 경호를 하고 싶다니……. 아부성 섞인 발언이라 치더라도 정말 반년 전만 해도 상상 못 할 일이다. 다소 뿌듯하다.
‘내가 잘 하는 거겠지.’
이것만으로도 일단 대건을 경호원으로 들인 소득이 있다.
지호는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고 둘러대며 길드원을 안심시켰다.
“다음에는 꼭 길드원들에게 부탁할게요.”
“이, 이런 일이 없는 게 제, 제일이죠.”
호진이 말을 더듬으면서 맞는 말을 했다. 그래, 맞는 말이긴 한데……. 앞으로 이런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지는 않다. 지호는 한숨을 삼키며 다른 길드원을 달랬다.
* * *
류대건이 호위를 시작하고 벌써 사흘이 지났다.
당연하지만 사흘간 아무런 사건도 없었다. 물론 노네임 길드 측면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 그러니까, 저희가 함께 손을 잡으면 충분히 방배 제14 던전의 관리권을 가져오고도 남아요.
지호는 전화 너머에서 들리는 상대의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그 말씀은 공동 관리권에 긍정적이시라는 뜻인가요?
“네, 물론이죠. 사실 제가 그날 살아남은 건 아폴론 길드장님의 스킬 덕분이니까요. 저희 두 길드가 함께 관리할 수 있다면 좋죠. 여러 잡음도 가라앉힐 수 있을 테니까요.”
─ 맞아요. 이후의 관리에도 꽤 효율적일 거예요.
지호가 지금 통화하는 대상은 선태희. 예전에 얼결에 지호와 던전에 갇히는 바람에 함께 사선을 넘었던 아폴론의 길드장 선태웅의 누나이자, 실질적으로 길드 운영을 맡는 아폴론의 부길드장이었다.
그리고 선태희와 공동 관리권을 논의 중인 던전은 과거 두 사람이 얼결에 갇혔던 S급 던전, 방배 제14 던전이다.
본래 대한민국에서 던전은 국가의 소유이며 책임이다.
다만 실제로 국가가 던전을 모두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각각의 길드에 관리를 맡겼다. 던전 관리를 맡은 길드는 던전을 공략 후 채집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를 갖게 된다.
아직 균열 사태가 발발한 지 3년, 앞으로 각성자와 관련된 시장이 성장할 것을 생각하면 고급 재료와 아이템이 나오는 S급 던전은 그야말로 골드러쉬의 금광이나 다름없었다.
현재 대한민국에 잔존한 던전은 대략 500여 개. 그중 S급 던전은 지금까지 31개가 출현했고, 현재 29개가 잔존 중이며 모두 S급 길드가 나눠서 관리하고 있다.
상성에 따라 A급 길드에서도 S급 던전을 관리할 수 있다. 하지만 던전 관리는 시민의 안전 중시라는 명목하에 S급 길드에게 우선으로 돌아간다.
실제로 정부가 A급 길드에 맡긴다면 사람들, 특히 근처에 사는 주민들의 반발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던전 공략의 실패는 영원히 그 땅을 잃는 침식으로 이어지니까.
그런 면에서 노네임과 아폴론은 둘 다 사람들의 눈에 차지 않을 A급 길드다.
그러나 신지호는 S급 헌터고, S급 던전 공략으로 자신이 충분히 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선태웅 역시 S급 던전 공략을 자주 돕는 헌터다.
게다가 두 사람은 실제로 해당 던전을 둘이서만 공략하기도 했으니 증명은 충분했다.
─ 긍정적인 입장이시라니 기쁘네요. 다음에 한번 길드를 방문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저야 좋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한 번 뵐까요. 언제가 좋으시겠어요?”
─ 내일 당장 갈까?
선태희의 옆에서 시커먼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시커멓다기보다는 머리카락이 시뻘건 선태웅이다.
성격은 완전히 다르지만… 나란히 놓고 보니 남매란 걸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닮았다. 부리부리한 눈에 또렷하고 강인한 인상.
갑자기 끼어든 선태웅을 선태희가 무시무시하게 째려보다가 이내 지호를 의식해 부드럽게 표정을 풀었다.
─ 길드장님 혼자 가시는 것보단 제가 가는 게 낫죠.
─ 아, 뭐하러 그래? 야, 내일 시간 괜찮아? 요?
지호에게 반말하다가 누나에게 꼬집힌 태웅이 급히 뒤에 어색하게 ‘요’를 붙였다. 지호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선태희가 인상을 썼다.
─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길드장 말은 무시하세요.
─ 왜 무시해, 요? 나는 내일 일 없어요. 내가 가면 되잖아요? 내가 길드장인데, 내가 가면 되잖아.
거침없는 선태웅의 발언에 선태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태웅의 귀를 잡아챈다.
─ 아, 아! 누나! 아파!
─ 내일은 토요일입니다, 길드장님.
─ 길드에 주말이 어딨… 악!
─ 사무 업무는 평일에 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리고 길드장님, 길드에서는 호칭 제대로 하시고요. 신지호 길드장님,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지호는 태웅을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인 선태희가 잡아당겨 봤자 아프지도 않을 텐데 선태웅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온갖 난리를 치며 누나에게 질질 끌려갔다.
약 3분 정도가 지나갔을 때, 선태희가 떨떠름한 얼굴로 의기양양한 선태웅과 함께 화면 앞으로 돌아왔다.
─ 내일은 아니라도 조만간 나중에 제가 동생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신가요?
“음, 전 요새 대부분 사무실에 있어서요. 대부분 상관없습니다.”
─ 최대한 빠른 날로 잡아… 보세요.
재촉하는 선태웅에게 지호는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뭔가 용건이라도 있으시면 따로 연락하셔도 괜찮은데요.”
─ 아니, 용건은 없고. 오랜만에 신지호 얼굴 좀 보려고 그러지.
“…….”
지호의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새끼, 뭐 잘못 먹었나?
지호보다 태희 쪽이 훨씬 더 격렬하게 반응했다. 동생의 플러팅 같은 대사를 견디지 못한 선태희의 포커페이스가 형편없이 무너졌다.
─ 어디까지나 공적으로 만나는 겁니다, 길드장님. 사적인 연락은 따로 하세요.
─ 번호를 몰라. 야, 번호 좀 알려 주라… 주세요.
여전히 어설픈 존댓말을 하는 태웅에게 지호는 할 수 없이 최근 한 번 더 바꾼 번호를 알려 주었다.
달력을 확인하며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조율한 지호는 선 남매와의 통화를 종료했다.
“후우.”
조금 신경 쓰이던 문제는 이걸로 해결이다. 헌터 협회도 아마 이 던전을 신지호에게 넘겨줄 생각일 테니까.
S급 길드장이 있는 노네임이 S급 길드로 성장하는 건 협회로서도 환영하는 바. 한동안은 헌터 협회의 지원을 받는다고 생각해도 되는 상황이다.
관리권을 나눠 가진 아폴론과의 세부 조율이 남았지만 속사정을 아는 선태희가 과욕을 부리지는 않을 터.
이걸로 오늘의 급하고 골치 아픈 일은 끝났다. 물론 최근 며칠 새 계속 지호의 신경을 거스르는 가장 골치 아픈 일이 남아있지만.
지호는 아무 일이 없는데도 길드장실 한편에 석상처럼 굳건히 앉아 있는 류대건을 힐끗 보고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평소에는 잘 보지 않던 SNS를 켜서 확인했다. 지호가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하연의 계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