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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Level Up!(17) (87/283)
  • 8. Level Up!(17)

    지호는 시큰둥한 얼굴로 말없이 희성을 응시했다. 그러나 눈빛만은 이상한 수작 부리지 말라고 경고하듯 서늘했다.

    S급 던전 관리권을 넘길 리가 있나. 천희성이 미치지 않고서야.

    대놓고 의심하는 시선에도 희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못 믿으시는 것 같지만 진심입니다.”

    “그 대신 청람 말고 하늘과 친밀하게 지내자는 제안이 덧붙은 거면 사양할게요.”

    쏘아붙인 지호의 대답에 희성이 작게 웃었다. 입은 웃고 있으나 지호를 바라보는 눈빛은 퍽 서늘하다.

    “음,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사랑받고 자라셨을 것 같은데.”

    지호는 희성을 삐딱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저거, 사랑받고 자라서 눈치 없을 것 같단 소리지?’

    대놓고 비꼬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하늘의 길드장은 지호를 썩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고.

    미움받는 일이야 근 1년간의 단련으로 익숙해져서 상관없었다. 하늘의 길드장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리란 것도 진작 예상했으니 별 타격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이익이 얽힌 문제로 꺼린다고 하기에는… 다소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악의가 마음에 걸렸다. 짐작 가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가만히 이유를 생각하는 지호를 갑자기 다가온 희림이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속도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지호가 휘청거리자 희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지호 길드장님, 괜찮아? 많이 피곤한가 봐. 휘청거리면서 쓰러지고.”

    “아니, 지금…….”

    그쪽이 몸으로 밀었잖아요? 그렇게 말하려던 지호의 말을 자르고 희림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이런, 쓰러지지 않도록 내가 안아줘야겠네. 그리고 기왕 안은 김에 쉴 곳도 좀 찾으러 다녀오고.”

    희림은 이번엔 지호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홱 안아 들었다.

    “쉴 준비 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따라와. 마땅한 곳을 찾아 둘 테니.”

    천희성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천희림은 그대로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다소 민망한 자세였지만 너무 높이 올라와 버려서 밀어낼 수도 없었다.

    “무슨 짓이에요?”

    “내가 잘 도와줬지?”

    지호는 주어 없이 말하는 희림을 가만히 응시했다.

    “천희림 헌터는 뭔가 알고 있나요? 천희성 헌터가 왜…….”

    “왜 널 싫어하냐고?”

    “……네.”

    희림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게……. 저놈은 원래 사람을 싫어하지만 대놓고 티를 내진 않거든. 나야말로 묻고 싶다. 둘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없었는데요.”

    고민해 봐도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서른아홉 살의 천희성과 스물네 살의 지호는 나이대도 달라 어디서 스쳐 지나갔을 일도 없었다.

    혹시 누나나 형과 개인적으로 사이가 안 좋나? 라는 생각도 해 봤지만, 그랬다면 따로 누나가 언질을 줬을 것이다.

    “정말 없어?”

    “네, 없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저 새끼는 이중인격자란 말이지. 너 같은 어린애는 살살 꼬셔서 뼛속까지 발라먹고 버리는 게 저놈 취미거든? 저 집안 사람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농담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 노골적으로 주름 잡힌 이마에서는 희림이 품은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늘 길드에 유감이 많으신가 봐요.”

    “뭐, 이 나라에 유감이 많은 편이지. 안 좋은 일이 많았거든.”

    천희림이 지닌 [당신은 코리안입니다?] 스킬이 안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저건 천희림이 귀화했으면 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스킬로, 그가 한국 소속일 때 체력과 마력 회복 속도를 빠르게 했다.

    수많은 이의 바람과 달리 코리안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천희림이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웃었다.

    “악의가 있어서 나쁠 건 없지. 놈이 여기저기 쑤셔서 개판 나면 좋고, 덤으로 너도 날 따라오면 좋겠고.”

    은근슬쩍 자신을 끼워 넣는 말에 지호는 질색했다.

    “안 따라갈 거거든요.”

    “그렇겠지. 너 같은 녀석이 가족 두고 떠나겠어?”

    지독한 그리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가벼운 척 내뱉은 진심에 지호가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다행히도 지그재그로 길게 날던 천희림이 멈췄다.

    “여기가 괜찮네.”

    천희림은 지호를 안은 채 아래로 내려갔다. 그제야 지호는 희림의 품에서 벗어났다.

    찰박, 부츠 아래에서 가볍게 물이 튀었다. 발이 푹 꺼지거나 아예 물속을 헤엄쳐야 하는 기존의 길보다는 나았지만 지반이 단단하지 않아 편히 쉬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천희림이 가볍게 발을 굴린 순간.

    쿠구구궁…….

    천희림의 스킬 중 [금우궁을 잇는 자]와 [거해궁의 파편]이 함께 발동되었다. 질척한 늪지의 수분이 바깥으로 흐르며 동시에 발아래의 땅이 바싹 말라 견고해졌다.

    찝찝하게 쉬어야 할 늪지대를 꽤 안락한 쉼터로 바꾼 천희림은 이마를 슬쩍 적신 땀을 손으로 훔쳤다.

    평범한 늪지라면 어렵지 않게 바꿨겠지만, 작은 흙 알갱이 하나에까지 마력이 깃든 던전의 지형을 바꾸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굉장하네요, 정말…….”

    순수하게 감탄하는 지호를 보며 희림이 재밌다는 듯이 픽 웃었다.

    “굉장한 건 너겠지. 주이원 말고 그렇게 날 위협해본 놈은 네가 처음이니까.”

    “……그거야 임승주 헌터가 한 거죠.”

    “네가 한 거 나도 너도 그놈도 아는데 뭘.”

    지호는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치켜세우는 건 조금 부끄럽다. 지호를 빤히 보던 희림은 쯧, 혀를 찼다.

    “그보다 정말로 천희성은 조심하는 게 좋아. 너처럼 순진한 애는 순식간에 먹힐 테니까.”

    “…….”

    “하긴, 그 미친개가 있으니 어련히 잘하겠냐마는.”

    “이원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 그렇게 말하니까 소름 돋네.”

    “미친개라니 말이 심하시잖아요.”

    “제일 순화한 별명인데?”

    “아니, 사람한테 무슨 그런 별명을……. 더 심한 건 대체 뭔데요?”

    “그런 게 있어.”

    약 올리듯 말한 희림은 지호가 더 잔소리하기 전에 쌩 도망갔다. 그리고 지반이 충분히 단단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굳이 쫓아다니며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았던 데다가 지친 상태였기에 지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잠깐 쉬며 지호는 천희성과 천희림에 대해 곱씹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희성이 자신을 특별히 적대할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 * *

    갈수록 던전은 다른 의미로 험난해졌다. 나타나는 몬스터는 어렵지 않게 쓰러트릴 수 있었지만 갈수록 전진하는 게 끔찍하게 어려웠다.

    “샤워하고 싶어…….”

    사방에서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높은 습도로 옷이 피부와 찰싹 들러붙어 있고, 부츠에 물이 스며든 지도 오래되었다. 젖은 피부에 붙은 이파리나 진흙 따위를 닦아 낼 기력도 없었다.

    “이거 정말 넘겨드려도 되겠는데요.”

    천희성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진심이 섞인 듯 보였다. 이 던전을 관리하려면 공략하는 헌터들에게 특별수당이라도 추가 지급해야 할 것이다.

    던전 공략을 시작한 지 나흘 만에 일행은 드디어 마지막 공간에 도착했다.

    자연적인 생태계에서는 불가능할 지형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지금까지 줄곧 이어지던 거대한 늪이 케이크를 잘라 둔 것처럼 뚝 끊겨 단면을 드러냈다. 단면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늪지대를 이루는 물이나 진흙 따위가 아래로 흘러야겠지만, 가장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찰랑대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 한가운데에 이 더럽고 습한 늪지대와 어울리지 않는 황금빛의 좁은 계단이 놓여 있다. 족히 건물 10층 높이는 될 법한 아찔한 계단의 끝에 허공에 떠오른 둥그런 섬이 자리했다. 아마도 저 위에 이 던전의 최종 보스가 존재할 것이다.

    “저거 언제 올라가냐.”

    “몰라, 난 그냥 빨리 나가고 싶어. 밝은 하늘 보고 싶다.”

    “나가면 몇 시야?”

    “잘하면 해는 볼걸.”

    나흘간 던전에서 지칠 대로 지친 하늘 길드원들이 서로 쑥덕거렸다. 지호 역시 나가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늘 의욕 넘치는 임승주야 아직 눈빛이 반짝반짝하지만, 성문영은 반쯤 넋이 나가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죠.”

    “네, 길드장님.”

    마지막을 앞두고 잠시 상태를 점검했다. 지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별의 축언]을 걸어 주었다.

    이제 한 번에 두 명에게 걸어 줄 수 있지만…….

    ‘비장의 수는 최대한 숨겨야지.’

    이번 해프닝은 최악으로 흘러 봤자 기껏해야 나흘 동안 몸과 마음 좀 고생하는 선에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누군가 신지호의 목숨을 노린다면?

    대비해 두긴 해야 한다. 요즘은 노네임의 길드 건물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 괜찮았지만.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라면 황혜림처럼 경호원을 구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지호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다.

    스스로 방어할 수단을 가지려면 시스템창이 말해 준 대로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공격 스킬이 필요했다. 지호는 그때 봤던 시스템창의 문장을 떠올렸다.

    시스템 관리

    당신에게 잠재된 능력 중에는 공격용 스킬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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