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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Level Up!(14) (84/283)
  • 8. Level Up!(14)

    천희림이 멀쩡하기는 무슨. 그건 지호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희림은 원래도 강했던 자신의 힘이 배 이상 강해진 상황에 머리끝까지 흥분한 상태였다.

    밖에서 곧장 반응하지 않고 던전에 들어온 지호를 곧장 낚아챈 건… 바깥에서 한 일에는 증거가 남기 때문이겠지. CCTV든, 누군가의 사후 조사든.

    하지만 던전 안이라면?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면 모든 증거는 던전 공략과 함께 사라진다.

    “너 뭐냐고.”

    곧장 대답하지 않는 지호에게 희림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정말로 지호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의 혼란에 잠식된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별의 축언]으로 강화된 S급 헌터의 기세는 별다른 행동 없이 그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다. 거기에 더해 멱살 잡은 억센 손이 실제로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지호는 스태프를 꾹 움켜 쥐었다.

    안타깝게도 천희림을 강하게 만들어준 지호에게는 스스로를 방어할 만한 대응책이 전혀 없었다. 억울함에 지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진짜 공격 스킬 하나만 있었어도!’

    저 건방진 놈의 얼굴을 걷어차고 은혜도 모르는 놈에게 정신 교육을 시켜 줄 텐데.

    그때 지호의 애타는 속을 알아준 듯 시스템창이 때맞춰 떠올랐다.

    [당신에게 잠재된 능력 중에는 공격용 스킬이 존재합니다.]

    [단, 현재 타인을 공격하려는 당신의 의지가 부족합니다.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여 잠재된 스킬이 발현될 수 없습니다.]

    ……때맞춰 떠오른 게 아니라 약 올리려고 나타난 거였나.

    지금 목이 졸려 죽어가는데 상대를 공격할 의지가 부족하다는 게 말이 되나? 지호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 잠재된 능력인지 뭔지가 튀어나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뭐 하는 짓이야, 천희림!”

    바깥에서의 여유로움은 한 톨도 남지 않은 채 잔뜩 당황한 천희성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중인지 목소리가 조금 헐떡였다.

    “길드장님.”

    “그만 하세요, 길드장님!”

    차례로 들리는 만류하는 목소리와 이어지는 폭발음에 지호는 안도했다.

    ‘하늘의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합심해서 날 묻어 버리려는 건 아니구나.’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하늘이 길드 차원에서 지호를 죽이려 들 리는 없다. 증거만 깔끔하게 없앤다고 사람들의 의혹마저 해소되는 게 아니니까.

    천희림에게 붙들린 채 지호는 눈만 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거대한 암석의 벽이 일행과 두 사람을 단절시켜 두고 있었다.

    저건 평범한 암석이 아니라 천희림이 자신의 주특기인 [금우궁을 잇는 자]를 사용해 만든 마력이 깃든 벽이다.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도 않는 벽이지만, 바깥에서도 나름 노력하는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물론 천희림에게는 다시 벽을 세울 만한 여유가 있다. 원한다면 하늘 길드의 사람들이 모두 나가떨어질 때까지 벽을 다시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이길까.

    “다들 요란하게 구네…….”

    다행히 끝까지 가 볼 생각은 없는지 다행히도 천희림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동시에 암석의 벽이 제 의지로 무너져 내렸다.

    희림이 잠잠해지자 공격도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지호는 멱살이 잡힌 채였다. 긴장된 시선이 이쪽으로 쏟아진다. 태연하게 그 시선을 받으며 천희림이 입꼬리만 쭉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형은 이런 놈을 영입해야지 그동안 뭐했어? 이걸 주이원 그 새끼한테 줘?”

    난폭한 천희림의 말에 천희성이 한숨을 내뱉었다.

    “……신지호 헌터는 애초에 청람의 사람이야. 헛소리하지 말고 놓아 드려라.”

    “가족이고 뭐고 신경 안 쓰는 게 그쪽 집안 아니었나? 뭘 사정 봐 가며 가리고 있어?”

    “신중호 회장님은 우리 회장님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 우리 식으로 회유하기는 어려워. 그보다 어서 놔라. 계속 잡고 있다고 우리 길드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왜, 우리 손에 안 들어오면 부수는 게 그쪽 집안 방식 아니야?”

    “네가 언제 그렇게 우리 집안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다만……. 우리 집안은 탐내는 걸 남이 소유하도록 두지 않아. 일단 잘 보여야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지호의 심정은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중한 듯 보이지만 천희성 역시 지호를 마치 누군가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물건처럼 말하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천희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천희림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천희성을 말리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을 컨트롤했다고 판단했는지, 조금 전 당황했던 게 거짓말처럼 희성은 느긋하게 다가왔다.

    천희성과 천희림. 나란히 서니 두 사람은 닮은 이름과는 딴판으로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천희성은 깔끔하게 포마드로 넘긴 머리,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따분한 눈동자, 정장의 형태로 갖춰 입은 전투복, 손목에 걸린 시계까지, 던전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대도시의 빌딩숲 한가운데가 가장 어울릴 법한 인간상이다.

    반대로 천희림은 훨씬 더 야성적이었다. 그가 걸친 제법 유명한 아이템, [칠흑용의 가죽 재킷]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아이템이지만 오랜 세월을 거친 구제 옷처럼 보였다. 물 빠진 청바지도, 상처가 많은 투박한 손도 모두 형과는 대조적이다. 이 남자의 외모만 봐서는 절대 거대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걸 누구도 믿지 않을 만큼 거칠다.

    하지만 두 사람의 본질은 어느 정도 닮았다는 것을 지호는 막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근본적인 인성이 평범한 인간의 기준에서 벗어나도록 비틀려 있다.

    요약하자면 둘 다 개차반이라는 거다.

    “어때요, 신지호 씨. 하늘 길드로 들어오는 건?”

    “그건 협박인가요?”

    “아뇨, 주이원 무서워서 당신에게 손댈 수는 없고…….”

    천희성은 포획한 사냥감을 보듯 지호를 살펴보다가 씩 웃었다.

    “그런데 좀, 자존심 상하지 않나? 평생 주이원의 그늘에서 발버둥 치는 거.”

    “…….”

    이 새끼가 긁네.

    역시 둘 다 성격이 썩 좋지 않았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천희림의 손부터 치우고 대화를 시작할 텐데.

    제 길드장과 부길드장에게 뭐라 하지도 못하고 눈치 보는 하늘 길드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 그만 작작 하시죠.”

    그리고 그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곳에도 믿을 만한 지호의 편은 있다. 1년간 함께 싸워온 노네임의 부길드장이.

    임승주는 검을 들어 천희성을 똑바로 겨눴다. 그런 승주를 희림이 비웃었다.

    “설마 덤비려고?”

    “…….”

    “네가 날 이길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하나 잊고 있는 거 아냐?”

    순간 지호의 몸이 휙 돌아갔다. 원래는 멱살이 잡혀 있었는데 정신 차리니 목 뒤쪽이 잡혀 있다. 희림은 지호의 목을 손잡이처럼 잡고는 방패처럼 내세웠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네 부길드장이 나 조지려고 하니까 널 써서 막는 거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왜, 비겁해? 그게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거든.”

    비겁 운운하기 전에 공격부터 안 했으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이성적으로 말을 들어 먹을 상대였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쩔래? 검을 버려.”

    “안 버린다면?”

    사납게 받아치는 승주가 같잖다는 듯이 희림이 비웃었다.

    “너희를 죽이지는 않아. 하지만 앞으로 던전이 좀 힘들어지겠지?”

    “…….”

    “물론 폭력을 가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시겠지. 하지만 물자를 주지 않거나, 회복을 시켜 주지 않을 수는 있다. 서른 명의 공략대 중 세 명에 불과한 노네임은 던전 안에서 제대로 항의도 못 하고 며칠간 죽기 직전까지 고생할 것이다.

    하지만 임승주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우리 길드장을 앞세워서 협박하는 것뿐인가?”

    “흠, 기어이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리려고?”

    “왜 얻어맞는다고만 생각하지. 만약 내가 당신을 이긴다면?”

    기어이 천희림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우습기도 할 것이다. 괜히 A급 헌터의 수는 수백 명인 데 반해 S급 헌터는 한 자릿수인 게 아니다. 그들 사이에는 절대적인 격차가 있다.

    게다가 [별의 축언]은 그 격차를 더 견고히 만드는 스킬.

    “그쪽이 이기면 얌전히 길드장 놔줄게. 지면 이건 내가 들고 다니고.”

    “좋아요.”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지만 지호는 듣자마자 냉큼 수락했다. 천희림이 손을 휙 당겨 지호의 태연한 낯을 확인했다.

    “뭐야. 너, 험한 취급을 좋아하는 편이야?”

    “당신이 승부에 응하지 않는 것보단 낫죠.”

    신지호는 천희림이 자신의 패배가 두려워 패배에 대한 리스크를 적게 걸었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하.”

    진심을 담아 빈정거리는 지호의 말에 처음으로 희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납게 타오르는 두 눈은 지금 당장이라도 지호를 짓밟고 깔아뭉개고 싶어 안달 난 듯 보였다.

    지나치게 흥분한 제 길드장의 모습에 불안을 느낀 천희성이 끼어들었다.

    “천희림.”

    “이기면 하늘 길드가 관리하는 던전 중 하나의 관리권을 넘기지.”

    “천희림!”

    천희성이 경고하듯 외쳤다. 그러나 어깨를 으쓱이는 천희림의 태도는 태연했다.

    “괜찮아, 형님. 내가 이기면 되잖아. 저놈은 A급이고 나는 S급이야. 혹시 까먹었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나빠진 거야?”

    “…….”

    틀린 말은 아니라고 여겼는지 천희성이 뒤로 물러났다.

    천희림은 분명 재수 없고 다루기 힘든 놈이지만 그만큼 실력이 확실하다. 지금까지 수많은 고난을 헤쳐 나와 살아남고 여기까지 올라온 천희림이 강자라는 건 이 세상에서 천희성이 가장 잘 알았다.

    하늘의 길드원 사이에서도 긴장된 분위기가 맴돌았다. 신지호나 임승주를 향한 안쓰러움, 이 일이 향후 청람과의 관계에 미칠 악영향 따위를 생각하면서.

    모두 패배를 확신하는 가운데 임승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겼을 때의 조건을 한 가지 더 추가해라.”

    “여기서 더?”

    자꾸 요구하는 승주가 불쾌한지 인상을 찌푸렸던 희림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음대로 해.”

    “내가 이기면 우리 길드장님에게 무릎 꿇고 사과해.”

    진지하게 말하는 승주를 보며 천천히 희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잠깐 제 귀를 의심하던 천희림은 이내 폭소를 터트렸다.

    “하, 하하! 하하하하!”

    요란하게 웃으며 천희림은 지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비틀거리는 지호를 붙잡은 건 희성이었다. 손안의 보석을 다루듯 정중한 희성의 손길을 신경 쓰는 대신, 지호는 승주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춘 희림은 과장되게 눈물 닦는 시늉을 했다.

    “아, 진짜 오랜만에 웃었네……. 그럼 해봐. 네가 이기면 머리를 조아려서 사과해 주지.”

    “네 입으로 약속했으니 지켜라.”

    “그래, 물론.”

    걱정과 경멸이 섞인 시선 속에서 임승주는 여유로운 챔피언처럼 선 천희림을 향해 신중하게 검을 겨눴다.

    오직 임승주만이 그 자리에서 비장했다. 모두가 그의 패배를 확신했다. 도전은 숭고한 것이지만 무모한 도전은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보일 뿐이다.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 천희림을 보며 임승주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기겠다고 호기롭게 말한 건 진심이었다.

    물론 상대는 평소의 임승주가 상대할 수 없는 강자다. 원래대로라면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패배를 점칠 것이다. 특히 몇 달 전이라면 이렇게 검을 겨눌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임승주도 강해졌다.

    지난번 청람과 함께 던전을 공략한 직후 주어진 휴가를 임승주는 모두 자신을 단련하는 데 사용했다. 던전 안에서 주고받은 실전, 그 당시에 느꼈던 감각…….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자신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임승주는 어제보다 더 강한 자신을 만들었다. 예리하게 갈고 닦은 감각을 폭발시킬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이 경지까지 올라오는 길을 훨씬 단축해 준 신지호를 위해.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임승주는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했다.

    고도로 집중한 순간.

    임승주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인간으로서 사고하던 임승주는 완전히 검과 일체화되어 완벽하게 무기로서 기능하며 움직였다.

    탁.

    임승주가 바닥을 박차는 작은 소리만이 들린 후의 일격.

    하지만 그 결과물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침묵이 이어진다. 물론 그건 자신만만했던 천희림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임승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지 못했다. 보기는커녕 그가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를 결과물이 나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빛살 같은 속도로 쏘아진 검.

    모두가 자각한 순간, 임승주의 검은 이미 자신이 노리던 곳에 닿아 있었다.

    천희림의 목에.

    단 일격.

    전투의 시작과 동시에 거머쥔 압도적인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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