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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Level Up!(10) (80/283)
  • 8. Level Up!(10)

    우진이 정신을 다잡는 사이 지호는 그저 해맑게 웃었다.

    “다들 빨리 모였네. 우리가 좀 늦었지?”

    “아, 좀 일찍 만났거든.”

    “정말? 그럼 우리도 일찍 합류할 걸 그랬다. 한강에서 시간 죽이다가 왔는데.”

    지호는 아쉬운 듯 말했지만 그 뒤에 선 이원은 전혀 아쉬운 기색이 아니었다.

    지금과 달리 어릴 적의 이원과는 꽤 가깝게 지냈었다. 가끔 재수 없기는 해도 의리가 있고, 말도 재밌게 잘하고, 축구도 잘하고, 어쨌든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청람의 길드장이자 SS급 헌터가 되어 다시 만난 주이원에게서는 굳건한 벽이 느껴졌다. 고작 1, 2년 만에 다시 만났을 뿐인데 수십 년 만에 재회한 것처럼 위화감이 느껴진다.

    어색해하는 우진이나 동혁이나 가끔 만났기에 그러려니 하는 경현과 달리, 눈치가 별로 없는 민재는 활짝 웃으며 양팔을 넓게 뻗었다.

    “주이원, 진짜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이다.”

    이원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안으려고 달려들던 민재의 움직임을 가볍게 피해 버렸지만, 호들갑을 떠는 민재 덕분에 장난처럼 넘어갔다.

    “오랜만이야, 차동혁. 신우진 너도.”

    평범하게 호의가 담긴 얼굴로 인사하는 이원을 감시하듯 노려보던 지호는 한숨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안도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 배고프네.”

    “우리도 배고파. 배고파 뒤지겠어.”

    “뭐 시켰어?”

    “시키긴 시켰는데 더 시켜야 할걸. 지금 시키면 안 끊기고 먹을 것 같은데.”

    “그럼 바로 시켜야지. 메뉴판 있어?”

    “어, 여기 존나 맛있어 보이는 거 많더라. 다 시킬까 하다가 참았어.”

    “잘 참았네……. 메뉴가 몇 개야?”

    떠들썩한 민재의 말을 꼬박꼬박 받아 주며 지호가 메뉴판을 읽기 시작하자, 여러 개의 머리통이 메뉴판 쪽으로 향했다.

    원래도 민재와 지호는 죽이 잘 맞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다스러운 민재의 말을 귀찮아하지 않고 잘 받아 줬다.

    둘이 떠드는 걸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즐거웠던 시간과 애타던 짝사랑의 추억까지도.

    지호와 오랜만에 재회했을 때는 동요했지만 오히려 차분히 마주하니 마음이 진정됐다. 이젠 애인도 있고, 그냥 추억의 첫사랑에 불과하다. 생각보다 저 얼굴의 위력이 강했을 뿐.

    메뉴를 추가로 주문하고 나니 민재가 가방 속에서 꽤 두꺼운 사인지를 주섬주섬 꺼내 내밀었다.

    “사인 좀 해 봐, 신지호.”

    “……갑자기?”

    “여친이 네 사인 받아 달래.”

    “네 여친이 내 사인을 왜?”

    “나보다 네가 잘생겼단다……. 연애랑 팬심은 다르대.”

    시무룩한 민재의 말에 지호가 빵 터졌다. 웃음은 전염됐지만 단 한 사람, 주이원만이 웃지 않은 채 당연하단 듯이 말했다.

    “그야 눈이 있으면 그렇게 보이겠지.”

    웃던 지호가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며 이원의 옆구리를 퍽 쳤다.

    너무나도 친한 친구처럼 보이는 모습에 우진은 내심 당황했다.

    ‘설마 얘네, 아직도 안 사귀나.’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본 두 사람은 한창 열애 중인 커플로 보여서 이제는 사귀는 줄로만 알았는데.

    하긴, 예전부터 두 사람은 이런 느낌이었다. 누가 봐도 사귀는 것 같지만 사귀지는 않는다. 이쯤 되면 그냥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포기할 사람은 다 포기하고 속 편하게 넘보지 않을 것 아닌가.

    “아, 그리고 선물 좀 가져왔어.”

    허공에서 포장된 선물 상자가 툭 툭 떨어졌다. 언제 봐도 신기한 각성자의 인벤토리 포켓이다.

    “열어 봐.”

    선물을 주는 쪽이 더 기대하는 눈으로 반짝이는데 안 뜯어볼 수는 없었다.

    제법 커다란 상자 안에는 비각성자가 접하기 힘든 아이템이 들어 있었다. 일회용 결계 생성 아이템, 체력 회복 포션, 상태 이상 해제 포션 등. 일반인이 다룰 수 있는 선에서 유용한 고가의 아이템이다.

    “이거 너무 비싼 거 아냐?”

    동혁이 걱정스레 묻자 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 재료는 다 내가 구하고 제작만 맡긴 거야. 길드원에게 맡겼으니까 뭐, 돈도 안 들었지.”

    “오, 좋은데, 길드장.”

    “완전 권력자인데.”

    “……놀리냐?”

    진짜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청람의 길드장은 지호의 옆에서 조용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딱히 모난 데 없지만 정중하기까지 한 주이원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전처럼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생각은 없어 보인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없는 지호의 모습이 우진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잠시 떠오른 우울한 생각을 떨쳐 낸 채, 우진은 오랜만의 모임에 금세 빠져들었다.

    * * *

    자리를 파한 건 자정을 한 시간이나 넘긴 후였다. 다음에 다시 보자고 인사하며 헤어졌지만, 이 멤버 그대로 모이는 날이 가까운 시일 내에 올 것 같진 않아서 아쉬웠다.

    “오랜만에 애들 보니까 좋다. 그치?”

    “자기가 좋으면 나도 좋아.”

    저녁부터 자정까지 거의 말수가 없던 이원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연스레 대꾸했다.

    처음에는 이원의 태도에 별 이상을 느끼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원의 침묵이 티가 났다. 순간순간 지나갔던 어색한 분위기는 다시 생각해도 두 번 경험하고 싶지 않을 만큼 서늘했다.

    다행히 친구들은 이원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그러려니 이해해 줬지만, 지호는 괜히 이원의 일정에 맞춰서 시간 내준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야. 너 왜 그렇게 서먹하게 굴어, 친구들한테.”

    “그야…….”

    웃으면서 가볍게 받아치려던 이원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자정이 넘어갔는데도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는 대도시의 한복판에서 주이원은 홀로 쓸쓸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냥. 애들이 잘 기억이 안 나네.”

    진지한 말이 나올까 해서 바짝 긴장했던 지호의 맥이 탁 풀렸다.

    “뭐 얼마나 오래 지났다고 기억이 안 나?”

    “그러게.”

    이원의 담백한 대답에서 오히려 뭔가가 있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지호는 물어볼까 말까 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제대로 말해 주지 않는 놈이라 주변인 뒷조사까지 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인지 털어놓을 리가.

    “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속 시원하게 해라.”

    “정말로 해?”

    당연히 얼버무릴 줄 알았는데 이원이 진지하게 되물으며 우뚝 멈춰 섰다.

    “사실, 난 말이지.”

    교묘하게 빛이 들지 않는 사각의 어둠 아래에서 이원이 우울하게 입을 열었다.

    “잘 기억도 안 나는 다른 인간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그냥 네가 나를 또 버릴까 봐 무서울 뿐이야.”

    “…….”

    또 버리다니. 그건 이미 한 번 버렸다는 말 아닌가.

    기억에도 없는 일을 확신하는 이원의 말을 평소처럼 가볍게 넘길 수 없었던 것은, 이원의 분위기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기 때문이다.

    “내가 널 왜 버려? 내가 예전에 말실수한 게 있다면…….”

    “아니, 말실수 따위를 말하는 게 아냐. 넌 날 버렸었어.”

    “뭔가 착각하는 거 아냐?”

    “나도 착각이었으면 좋겠어.”

    “…….”

    “그래서 가끔은 네가 원망스러워.”

    이를 악무는 바람에 이원의 마지막 말은 입 안에서 뭉개졌다. 주이원이 제게 했다기에는 지나치게 매서운 말.

    정말 진심으로 억울하고 분해 보이는 이원을 보며 지호는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고 싶었다.

    지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원이 걸음을 옮겼다. 서너 발자국 성큼 걸어오자 이원은 어느새 지호와 거의 틈 없이 서 있게 됐다. 이원은 지호의 뺨을 문질렀다.

    “그런 얼굴 하라고 한 말은 아닌데.”

    “…….”

    “고작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

    “거짓말쟁이.”

    지호는 이원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수많은 비밀을 가진 주제에 누구더러 거짓말쟁이라 한단 말인가.

    이원은 그런 지호가 조금은 우습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항상 말하고 있잖아.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그 말은 귓등으로 들으면서 왜 고작 한마디에 그런 얼굴을 해? 날 버린 주제에.”

    “…….”

    “응? 내 말은 왜 안 믿는 건데.”

    낮은 속삭임은 애원에 가까웠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사실상 매달리는 중인 이원을 보며 지호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런 대화를 몇 번인가 했던 것 같은데.

    왜 안 믿냐고?

    그야 절대로 주이원이 자신을 좋아할 리는 없으니까.

    서로가 특별한 단 한 사람은 될 수 없으니까.

    이원의 말을 차분히 생각해 보려던 지호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배수구가 꽉 막혀 역류하는 것처럼 기억이 멋대로 범람한다.

    ‘잘 들어. …….’

    ‘■■도, ■■도. 전부 다.’

    ‘■■■에게 너는 해가 될 뿐.’

    ‘■■■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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