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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르 길드(5) (61/283)

6. 미르 길드(5)

그 누구도 지호에게 꺼낸 적 없었고, 꺼낼 일 없다고 생각한 말에 놀라 지호가 굳었다.

그도 그럴 게 청람 길드의 근본은 청람 그룹이었다. 지호의 아버지가 청람의 회장인데, 지호가 청람보다 다른 길드를 우선시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놀란 지호에게 태용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 청람에게서 등을 돌리고 저희와 손을 잡자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청람 길드는 길드장님의 가족께서 함께 운영하시는 길드이니, 제가 무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만큼 저희 미르 길드는 노네임 길드, 신지호 헌터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뜻입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미르에서는 노네임에게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S급 길드의 협력.

물론 지호가 바라던 바다. 바라던 바이긴 한데…….

이건 상호 간의 이득을 위해 아폴론 길드의 협력을 받아 냈을 때와 달리, 청람 길드가 지호에게 협력하는 것처럼 뭔가 맹목적이다.

청람이야 혈연과 지연으로 엮여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미르의 호의는 조금 전부터 계속 찝찝함만을 남겼다.

그래, 마치 사이비가 신도를 유인하기 위해 처음에 다가와서 잘해 주는 그런 느낌이다. 김태용이 평균과는 조금 다른 사람인지라 그런 인상은 더더욱 강렬해졌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 그냥 최초의 각성자라는 게 별거 없다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이잖아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러시는 건 사실 과합니다.”

“별거 없다니요.”

혼란스러워하는 지호에게 태용이 손을 뻗었다. 테이블에 반쯤 올라와서 지호의 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 태용은 깊은 눈빛에 진지한 얼굴이었다.

“제게 있어서 길드장님은 무척 의미 있는 분이십니다. 저는 길드장님께 깊은 관심이 있고, 지금보다 훨씬 더 깊고 가까운 관계로 맺어지고 싶습니다.”

“…….”

순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소름이 돋았다.

주이원이 난데없이 약혼반지랍시고 약지에 반지를 끼웠을 때만큼 놀랐다.

아니, 그보다 더 놀랐을지도 모른다.

사실 저 비슷한 말은 평생 숱하게 들어 봤다. 그냥 친하게 지내던 이성 친구들에게서, 혹은 얼굴도 모르던 같은 학교 학생에게서, 지나가다가 행인에게, 심지어 몇 번인가 남자에게 고백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개중에 가장 진지하고 집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당황한 지호와 뭐가 잘못된 줄 모르는 태용을 보며 라희가 곤란하다는 듯 한숨 쉬었다.

“길드장님, 그런 식으로 말하면 플러팅하는 줄 알아요.”

그러자 태용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플러팅?”

“길드장님이 신지호 헌터를 꼬시는 줄 안다고요.”

라희의 답변에 태용의 얼굴이 벌게졌다.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

“네, 저도 아닌 거 알고 있습니다…….”

지호는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태용의 말은 그럴싸한 고백처럼 들렸지만 실제 고백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김태용의 고백은 신지호라는 개인이 마음에 들어서 고백한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 김태용의 호기심과 집념이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도통 모르겠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라희만이 즐겁게 웃고 있다. 아무래도 순진한 길드장을 소소하게 놀리는 게 미르 부길드장의 취미일지도 모르겠다.

“어머, 하지만 괜찮은 상대 아닌가요? 제가 보기엔 신지호 헌터는 주이원 헌터보다 우리 길드장님이랑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네?”

설마 이 사람, 즐기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나?

이게 길드장 간의 미팅인지, 주선자 하나 끼고 연애 목적으로 만난 미팅인지 구별이 안 되기 시작했다.

태용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시뻘겋게 물들었다.

“무, 무, 무슨 말을. 같은 사내요!”

“21세기에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길드장님은 남자도 상관없지 않아요?”

“아니, 그렇지만!”

거기서 긍정을 하면 어떡하냐.

“나는 순수한 호감으로…….”

“그냥 그쯤 하죠.”

지호는 다시 소름이 올라온 팔을 긁으며 슬쩍 소파에 등을 바짝 붙이고 말했다.

변명할수록 나락으로 빠져든다. 김태용도 그걸 깨달았는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저도 농담이었어요.”

여유롭게 미소 짓는 이라희가 얄밉기까지 하다. 뭔 꿍꿍이가 있었든, 조금 전은 순수하게 놀리면서 즐거워한 것 같은데.

실질적인 운영은 이라희가 도맡아 한다더니. 라희의 말에 매번 속수무책으로 말려드는 태용을 보니, 평소 미르 길드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훤히 보였다.

“농담은 이쯤 할게요. 죄송합니다, 귀여우신 분이라 저도 모르게 짓궂게 굴었는데 모쪼록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이라희의 눈에서 웃음기가 걷히고 진지한 기색이 맴돌았다.

“지금 저희의 말이 이상하게 들릴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돌려 말하지 않은 건, 어차피 뻔히 내보일 관심을 빙글빙글 돌려서 접근하면 신지호 헌터께서 저희를 더 의심하실 것 같아서예요.”

라희가 부드럽게 설명했다. 그 말대로 1년 전부터 약한 인간 불신에 시달리는 지호는 어떻게 접근하든 김태용을 수상쩍게 여겼을 것이다.

“저희 길드장님께 잡동사니가 많다고 했지요? 길드장님의 집안은 꽤 유서 깊은 가문으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귀한 물건이 많답니다. 그리고 몇몇 개는 균열이 발생한 이후 아이템으로 변화했고요.”

“그렇군요…….”

어쩐지 길어질 법한 이야기에 지호는 귀를 기울였다.

균열이 발생하고 각성자가 나타난 것만이 지구의 변화는 아니었다. 몇몇 동물이 각성하거나, 평범한 물건이 아이템으로 변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태용은 라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받았다.

“제가 평소에 보던 물건들이 아이템으로 변하는데 신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전 세계와 달라진 것들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사실 학계에서도 신지호 헌터를 꽤 주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좀, 의미 없는 관심을 주고 계시긴 하죠.”

학계라고 부르기에도 아직은 미흡하지만, 균열과 각성자를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최초의 균열과 최초의 각성자가 같은 곳, 같은 시간에 나왔다는 건 풀고 싶은 미스터리 중 하나다.

미지근한 지호의 태도와 달리 태용은 몹시 열정적이었다.

“의미 없는 관심이 아닙니다. 균열과 각성자에 관해 조사하는 건 인류의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이렇게 저희 길드장님은 원래 있던 것이 균열로 인해 변화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고 계시지요. 특이한 각성자는 졸졸 쫓아다니고, 특이한 아이템은 죄다 사들이고…….”

못 말리겠다는 듯이 라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니 신지호 헌터께 관심을 두는 건 당연하지요. 무려 세계 최초의 각성자 아니신가요.”

연구의 요소라면 확실히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각성자 학계에서는 신지호의 존재를 꽤 중요하게 여겼으니까.

하지만 그 설명으로도 다 이해되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하지만… 제가 활동한 지는 꽤 됐는데 이제야 접근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라희가 눈을 깜박이다가 태용에게 고개를 돌렸다. 태용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을 쉬었다.

“저도 진작 접촉하고 싶었으나, 막는 분이 계셔서…….”

“아.”

누가 막았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주이원이다. “주이원이?” 하고 넌지시 물어보니 곧장 고개를 끄덕인다.

“죽일 기세로 막아서며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신지호 헌터께 다가갈 방법이 없어서……. 제가 뭘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야기 좀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듣지 않으셨습니다. 괜히 수작 부리면 미르 길드를 폭파한다고 협박도 하셨고…….”

“포, 폭파요?”

“네. 그런데 때마침 신지호 헌터께서 승급 테스트에 필요한 던전을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

미르 길드에서 그렇게까지 지호와 접촉하려고 했단 말인가? 그 접촉을 주이원은 필사적으로 막은 거고……. 폭파라는 과장 섞인 협박까지 해 가면서.

‘왜 멋대로 그런 짓을 해?’

기가 막혔다. 대체 왜, 무슨 자격으로 지호가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걸 멋대로 막는단 말인가?

‘네 생각보다 나는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거든.’

‘지호야, 김태용을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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