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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르 길드(3) (59/283)
  • 6. 미르 길드(3)

    지호는 태용의 정보를 알려 주는 대신 확인 불가의 내용을 띄운 시스템창을 충격에 젖어 바라보았다.

    [이해] 스킬은 자신보다 높은 등급만 확인이 불가능하니, 즉 김태용의 등급은 SS 이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분명 세간에 알려진 김태용의 등급은 S.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분명 시스템의 설명대로라면 김태용의 시스템창이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으니까.

    ‘애초에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뭐지.’

    현재 헌터들의 등급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유일한 SS급인, 아니 그렇게 알려진 이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다른 S급보다 압도적인 무력을 지녔음에도, 수많은 사람이 논의한 끝에 SS급으로 판정됐다.

    하지만 원래 이런 식의 시스템이란 건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댓값에 의해 운영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면, 전투계 외의 각성자 등급도 너무 박하지.’

    인벤토리 포켓과 균열 예측기를 만들어 낸 그 주하은조차 A급 제작자에 불과하다. 전투 스킬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물론 이건 신지호만 느끼는 의문이 아니다. 제작이나 보조계 헌터의 등급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기준을 바꿀 시 한국의 주하은은 당연히 SS급으로 승급되어야 한다는 의견 때문에 여러 국가에서 반대 중이었다. 한 나라에서만 SS급이 두 명이 생기는 셈이니까 견제하기 위해서.

    ‘객관적인 평가 방식이 필요해.’

    김태용이 어떠한 이유로 하향 평가받았다면 그건 너무 큰 불이익 아닌가?

    김태용은 그나마 S급 헌터로 대우받지만, 비전투계 헌터들은 낮은 등급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현재의 사태를 막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물임에도.

    ‘그런데 난 뭐지?’

    지금까지 수많은 각성자의 시스템창을 확인했지만, 등급에 물음표가 붙은 건 지호 혼자뿐이었다.

    왜 자신만이 예외인가.

    그에 대한 답은 당장 구하기 요원하다.

    “신지호 헌터님?”

    “……아, 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지호가 퍼뜩 정신 차렸다. 김태용이 최소 SS급 이상이라는 데 놀라서 그만 딴생각에 빠져 버렸다.

    “조금만 집중해 주십시오.”

    “네…….”

    지호는 뻣뻣하게 굳은 몸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서서히 태용의 마력이 지호에게로 밀려 들어왔다. 지호와 태용의 손 위로 복잡한 마법진이 허공에 떠오른다.

    잠시 후.

    태용은 한숨을 쉬며 지호의 손을 놓고는 고개 숙여 사죄했다.

    “이건 제힘으로 풀 수 없는 봉인입니다. 주제넘게 나섰는데 해결해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괜찮으십니까? 혹시 제 술법이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것입니까?”

    시스템창에 여전히 정신이 팔린 지호를 태용이 걱정스럽게 살폈다. 지호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긴장했던 것 같네요. 반지를 뺀다고 생각하니까.”

    지호는 대충 변명했다. 이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태용에게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태용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부군이 직접 끼워 준 반지를 다른 사내가 빼는 건 아무래도 조금 곤란하실 것입니다.”

    “네? 아니, 부군이라뇨? 아니에요.”

    “아, 죄송합니다. 난처해 보이셔서 시도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약혼자께서도 불쾌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뇨, 약혼자도 아니에요!”

    “하지만 청람의 길드장께서는 길드장님을 연모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이 자리에 없는 이원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 주고 싶다.

    그러니까 장난 좀 그만 치래도. 이렇게 순진한 사람은 죄다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잖아.

    다음에 또 그런 장난을 치면 혼쭐을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건 그냥 저희끼리 예전부터 해 오던 장난이에요. 가족 같은 친구라서 좀 스스럼없는 편이죠.”

    “그 행동과 눈빛이 장난 같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주이원 헌터께서는 신지호 헌터를 무척 소중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야 다르겠죠. 그 녀석이랑은 오래 알았고.”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애초에 주이원 헌터께서 그런…….”

    말을 하다 말고 김태용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기다려 주던 지호는 끝끝내 열리지 않는 입을 바라보았다.

    “그런, 뭔가요?”

    “인간적인…….”

    “인간적?”

    “아니, 그보다 좀 더…….”

    “좀 더?”

    “음, 유일하게 생물로 대하신다고 해야 할 듯합니다.”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겠는데요.”

    “평소에는 사람을 도구처럼 대하는 분께서 유일하게 인간으로 대하는 분이 신지호 헌터라는 뜻입니다.”

    지호는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렸다.

    주이원은 대중에게 다정하고 상냥하며 친근하다. 무리한 상황에서도 일반 시민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날리고, 세계의 안전을 위해 휴일이 거의 없는 삶을 보낸다.

    그런 주이원이 사람을 도구처럼 여긴다고? 자신을 욕한 것도 아닌데 굉장히 모욕적인 기분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주이원은 그런 애가 아니에요. 무엇보다 걘 이 세상을 구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분명 세상을 구했습니다만 인성은 다른 문제입니다.”

    “아니……. 걔가 사람들한테도 얼마나 잘하기로 유명한데요. 바쁜 와중에도 사람들이 잡으면 다 인사해 주고, 자선 활동도 하고, 또…….”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많지 않습니까?”

    단언하는 태용의 얼굴을 지호가 마주 보았다. 새까만 눈은 흔들림 없이 말갛게 빛난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순한 외모라 그저 순수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태용의 진심이 느껴졌다.

    ‘주이원은 악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지호는 무릎 위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음해를 계속 들으면서까지 미르 길드와 마주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 새끼는 욕해도 내가 해.’

    세상을 구한 영웅. 만인의 우상. 압도적인 SS급 헌터.

    하지만 허울 좋은 칭호를 벗기고 나면 그냥 신지호와 가족같이 함께 지낸 주이원일 뿐이다.

    어릴 때는 자그마하고 약했고, 울보였고, 커 가면서 점점 의젓해졌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얄미운 라이벌이 된 녀석.

    고등학생 때, 지호는 줄곧 이원을 이기고 싶었다. 이기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격차는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다가 이제는 완전히 벌어졌다.

    주이원과 신지호의 격차는 여전히 멀다. 세계 유일의 살아 있는 전설 SS급 헌터와 막 S급이 된 신지호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로.

    누군가는 너무 까마득한 곳에 올라간 상대를 보며 절망을 느끼겠지만, 지호는 아니었다. 주이원이 저보다 못난 헌터거나, 고만고만한 곳에 있는 것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신지호가 이기고 싶었던 주이원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잘난 녀석이었다. 지호는 높은 곳의 이원을 꺾고 싶었을 뿐, 남에게 꺾이는 이원을 보고 싶은 건 절대 아니었다.

    지호는 완벽에 가까운 이원이 좋았다.

    꺾어도 자신만 꺾을 수 있고, 욕해도 자신만 욕할 수 있다. 자신한테 맞는 건 괜찮지만, 남에게 맞고 들어오는 건 안 된다.

    화가 잔뜩 난 지호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던 이라희였다.

    저도 모르게 지호가 쏘아보듯 그녀를 바라보자, 라희는 고개를 까딱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신지호 헌터. 이해해 주세요. 우리 길드장께서 주이원 헌터에게 덤볐다가 깨진 적이 있어서 예민해요.”

    지호는 묘하게 이원에게 불편하게 굴던 태용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전에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긴 했지만…….

    “깨진 건 아닙니다.”

    “그 정도면 깨진 거죠.”

    분한 듯 항변하는 태용에게 라희가 여유롭게 대꾸했다. 태용은 지나치게 과격했고, 라희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아무리 사석에서 나온 이야기라지만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닌데도.

    지호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깨진 건 깨진 거지, 왜 욕을 하십니까?”

    “그야…….”

    뭐라고 말하려던 태용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지호는 테이블 아래의 기척으로 라희가 태용의 발을 콱 밟아 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계속 불쾌해하는 지호를 보며 라희가 이번에는 진지하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많이 불쾌하셨겠지요.”

    “…….”

    “아시다시피 저희 길드장님이 아직 스무 살이잖아요. 어리고 철이 좀 없으니 이해해 주세요.”

    “누가 어리고 철이 없…….”

    발끈하는 태용의 옆구리를 라희가 대놓고 꼬집었다. 그러자 부들부들 떨면서 태용은 풀이 죽어 입을 다물었다. 아직 젖살이 남은 뺨이 동그랗게 부풀었다.

    지호는 조금 맥이 빠졌다. 어린놈이 발끈했구나, 싶어서.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지호도 고작 스물네 살일 뿐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애고 어른이고 주이원에게 이상한 음해를 하는 놈을 상대하긴 싫다. 그래도 상대는 S급 길드의 길드장이다. 지호는 공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 넘어갈 테니 다음부터는 무례한 언사를 주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청람 길드장은 세계적인 영웅인 걸 제외하고서라도 제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물론이죠. 우리 길드장님도 꽁해서는, 정말.”

    라희가 어린아이를 대하듯 태용을 바라본다. 라희의 나이가 서른아홉, 정말 일찍 아이를 낳았다면 아들이라고 해도 될 법한 나이 차다.

    차로 목을 축인 라희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주이원 헌터와는 사이가 퍽 좋으시네요. 저희 길드장님 말로는 주이원 헌터만 일방적으로 치대고 신지호 헌터는 질색하는 앙숙 같은 사이라던데.”

    “……그건 그 녀석이 자꾸 이상한 장난을 쳐서 그래요.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았으니까 거의 가족이죠. 가족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티격태격해도 결국 가족인 거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청람 길드장님을 꽤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한다고까지는 아니고……. 그냥 악우죠.”

    “그래도 특별한 사이시잖아요. 주이원 헌터가 소중하신 거죠?”

    뭐지? 꼭 삼류 기자가 이상한 화젯거리를 얻으려고 끈질기게 질문하는 느낌이다. 설마하니 이라희가 그런 삼류 기자와 연관은 없겠지만. 지호는 조금 찝찝함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 뭐. 특별하다면 특별하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순간, 갑자기 지호의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시스템 관리

    스킬 ‘왕자의 눈’이 ‘신지호’의 발언에 대한 진실을 판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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