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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르 길드(2) (58/283)
  • 6. 미르 길드(2)

    “양호진 헌터는 허소리 헌터한테 같이 안 가 봐도 돼요? 자연스럽게 두 사람 의견은 반영 안 할 것 같던데.”

    “어제 술 마시면서 뭘 좋아하는지… 말, 해서요. 알, 알아서 해 주시겠죠. 편식은 안 하니까…….”

    “오, 어제. 어땠어요? 즐거웠어요?”

    “네, 네. 괜, 괜찮았습니다. 헌터 전용 주점에 가서…….”

    “제대로 달렸네요.”

    감탄하는 지호의 말에 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는 일반적으로 술에 취하지 않는다. 던전에서 채집한 재료로 만든 술에만 취했다. 다만 일반인에게는 독으로 작용할 수 있어서 한정적인 장소에서만 판매한다.

    일부러 헌터 전용 술집까지 갔으면 꽤 마셨을 것이다.

    “양호진 헌터, 술 잘 마셔요?”

    “취, 취해 본 적은 없습니다.”

    “오. 마지막까지 남았어요?”

    “네, 네. 전 쓰러질 만큼 마시진 않았지만…….”

    “쓰러진 사람도 있나요?”

    “임승주 헌터가…….”

    호진의 설명에 지호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생긴 것만 보면 술독을 갖다 놓고 마실 것 같은데 술에 약하다니.

    “그래서 허소리 헌터가 업, 업고 나왔어요.”

    “푸하핫!”

    결국 지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헌터 정도가 되면 남녀의 기본적인 신체 차이는 별 의미가 없어진다.

    하지만 임승주는 조금 마초 같은 기질이 있어서, 은연중에 여성 헌터를 배려하고 기대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었다.

    그런 임승주가 허소리에게 업혀 갔다니.

    “사, 사진 드려요?”

    “사진까지 찍었어요?”

    “허소리 헌터가 찍으라고 해서…….”

    과연 허소리.

    지호는 마구 웃으며 당장 보내 달라고 했다. 허소리에게 업힌 채 순한 얼굴로 잠든 임승주의 사진과 동영상은 정말 웃겼다.

    “임승주 헌터는 이거 찍은 거 알아요?”

    “아뇨……. 나, 나중에 써먹으려고요.”

    소심한 양호진이 퍽이나 써먹겠다. 지호는 본심을 솔직하게 떠벌리는 대신 “좋은 생각이네요.” 하며 씩 웃어 주었다.

    역시 지호도 그 자리에 끼는 게 좋았을 텐데. 다음에 한번 자리를 잡아 볼까? 길드장이 끼는 걸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흐뭇하게 보던 지호는 호진이 어쩔 줄 모르고 손만 만지작거리는 걸 발견했다.

    소심하고 사람을 어려워해서인지 은근슬쩍 빠져나가는 건 잘하는 사람인데.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건…….

    “양호진 헌터. 혹시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네, 네!”

    지호가 먼저 물어봐 주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호진의 얼굴에 화색이 깃들었다.

    “뭔데요? 편하게 말해요.”

    “다른 게 아니라… 아, 아침에 길드로… 미르의 길드장님이 연락, 주셔서요. 내일 방문하고 싶다고, 하시던데…….”

    “내일이요?”

    너무 갑작스러웠다.

    김태용이 신지호에게 이상할 정도의 관심을 보이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노골적으로 나온다.

    고민하던 지호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호진을 내보냈다.

    어제 김태용의 명함을 받긴 했다. S급 헌터와의 연줄이니 고이 챙겼지만……. 과한 관심은 부담스럽다.

    “그런 건 한 명으로도 충분한데.”

    주이원. 무려 SS급 헌터인 녀석의 관심은 피곤할 정도다. 여기에 한 명의 관심이 이상한 쪽으로 추가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물을 주고 싶다며 호의를 보인 상대를 거절하는 건, 미르 길드와 척을 지겠단 뜻이다.

    “그럴 수야 없지…….”

    지호는 한숨을 쉬며 김태용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당장은 바쁘니 모레나 사흘 후에 보자고.

    태용에게서는 곧장 답신이 날아왔다. 빠를수록 좋다며 모레 길드에 들를 테니 잠깐만 시간을 빼 달라는 내용이었다.

    “진짜, 이 인간은 왜 이러지?”

    너무 노골적인 관심과 호의라서 오히려 찝찝하다. 사이비 종교의 포교를 연상시킬 정도로.

    이 관심의 이유를 도통 모르겠고 꺼림칙했다.

    “주이원은 뭔가 좀 알고 있지 않을까.”

    왜 자신에게 부탁하지 않느냐며 화내던 녀석이니, 이 정도는 물어봐도 좋을 것이다. 지호는 밤에 이원이 돌아오면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 * *

    다음 날 아침.

    지호는 한숨을 쉬며 길드장실에 앉았다.

    ‘이 새끼, 집에 안 들어왔어.’

    어제는 분명 일정이 일찍 끝났을 텐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도 연락 한 통 없이.

    그냥 같이 사는 룸메이트끼리니까 연락은 꼭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하지만 남도 아니고 가족 같은 사이에 연락 정도는 해 줘도 되는 게 아닌가?

    거실의 소파에서 꽤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방으로 돌아갈 때의 기분은 꽤 처량했다. 쓸데없이 큰 집에 혼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억지로 끌고 들어와 같이 살기 시작했으면 연락은 해 줘야지. 지호는 성질이 나서 단말기로 메시지를 잔뜩 적었다가 결국 보내지 않고 지운 채 덮어 버렸다.

    “됐어, 원래 그놈 없이 해 보려던 건데.”

    자신한테 의지해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본인이 차 버린 기회니 아쉽다고 하면 코를 비틀어 줄 테다.

    심란한 사감을 정리한 지호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어차피 바쁘게 일하다 보면 주이원의 생각 따위 금세 사라질 터.

    게다가 오늘은 귀한 인재가 첫 출근하는 날이다.

    “안녕하세요, 장효주 헌터.”

    “안녕하십니까, 길드장님. 장효주입니다.”

    새로운 노네임에 첫 번째로 영입된 장효주가 싱긋 웃었다.

    올해로 마흔한 살의 장효주는 평소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견고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새롭게 자신의 상사가 된, 앞으로 승승장구할 날만 남은 노네임의 길드장 신지호에게는 무척 호의 섞인 태도였다.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후, 지호는 효주에게 태웅에게서 받은 자료를 기반으로 자신이 정리한 자료를 보내 주었다.

    아직 적응하지 못했을 테니 천천히 검토하라고 했지만 효주는 오후가 되어 곧장 다시 길드장실로 찾아왔다. 얼굴이 활짝 핀 게 꽤 만족스러운 오전을 보낸 모양이었다.

    “명단 정리해 주신 게 아주 좋은데요. 청람에 있을 때 제가 영입하려던 인물도 몇 있고요.”

    “아,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네. 그리고 추가적으로 C급 이하의 각성자 중에서도 몇 명, 스카우트하고 싶은 인재가 있습니다.”

    “괜찮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요. 눈에 띄는 사람이 있나요?”

    “네.”

    말을 꺼내는 시점에서 완벽하게 준비를 해 온 장효주가 파일철을 꺼내 들었다. 지호는 효주가 정리한 자료를 읽었다.

    등급은 낮지만 하나같이 유용한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던전을 공략할 길드라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채집꾼이나 연금술사, 탐색 스킬이 있는 전투계 헌터 등.

    전투 위주로 등급을 매기니만큼, 비전투 계열은 등급만으로 수준을 판별하기 어렵다. 때문에 현재의 측정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는 여론이 많은데…….

    만약 측정 방식이 바뀌게 된다면 B급, 혹은 A급까지도 받을 만한 각성자가 꽤 보였다.

    “괜찮네요. 게다가 다들 소속 길드가 없거나 계약 만료 직전이고……. 와,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찾으셨어요?”

    국내 B급 이상의 헌터 수는 2천 명 남짓. 그리 많은 수는 아니다 보니 어지간한 길드라면 국내의 중상급 헌터의 명단쯤은 갖고 있다.

    하지만 헌터의 약 80%를 차지하는 하급 헌터는 오히려 세세한 파악이 어렵다. 개중에 이만큼이나 좋은 사람을 골라낸 게 신기하다.

    “허소리 헌터가 잘 알고 계시더군요. 자료도 허소리 헌터가 제게 넘겨준 거예요. 정리가 잘된 편이라 확인하고 추려 내기도 쉬웠습니다.”

    “허소리 헌터가요?”

    “네. 동아리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나, 그 사람들의 추천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그런 점에서 인성 역시 어느 정도는 보장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와…….”

    워낙 내부 분열을 많이 겪은 노네임 길드다 보니, 인성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중요했다. 다만 하급 헌터를 일일이 검증하기는 힘드니까 한동안은 꽤 고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호도 소리가 헌터만 가입 가능한 동아리를 만들었단 사실은 들었다.

    활기찬 성격의 허소리는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좋아한다. 하지만 일반인과 함께 운동하기에는 피지컬이 너무 차이 났다.

    그래서 노네임에 들어온 이후 하급 헌터를 주로 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작게 굴러가던 곳이 꽤 커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모임을 굴리는 허소리의 인맥 또한 어마어마하게 넓어진 모양이었다.

    등급으로만 각성자를 따지는 사람들은 C급 이하의 헌터를 무시한다. 하지만 등급이 낮다고 해도 그들 역시 균열과 게이트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력이다.

    몇몇 길드에서는 등급만으로 차별하는 바람에 특수직 하급 길드원의 설움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호의 노네임에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그럼 이 명단을 바탕으로 최대한 뽑아 보죠. 확실하게 검증된 헌터가 있으면 좋으니까…….”

    “네, 맡겨 주세요.”

    장효주는 그야말로 믿음직하게 미소 지었다. 지호 또한 그런 효주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이제 슬슬 길드가 제대로 돌아가겠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 * *

    다음 날, 바로 길드에 방문객이 찾아왔다.

    이틀 전부터 재빠르게 약속을 잡은 김태용이었다.

    오늘의 김태용은 황금색 실로 용이 수 놓인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고, 본래 하나로 높이 묶던 머리에는 복잡한 매듭으로 된 장식을 달고 있다.

    관광지에서 한복을 대여한 사람 같기도 하지만, 평소에도 늘 이런 복장임을 생각하면 꽤 신경 쓴 듯한 차림새다.

    “신지호 길드장님의 승급을 축하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호는 웃으며 인사했지만 속은 떨떠름했다.

    그도 그럴 게, 김태용은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지호 길드장님. 미르의 부길드장인 이라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라희 부길드장님.”

    아니, 고작 선물 증정식에 S급 길드의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함께 출동한단 말인가?

    미르의 부길드장인 이라희는 위화감 없이 매끄러운 한국어를 구사했지만 영국 태생이었다. 지호를 향한 녹색 눈은 분명 웃음을 가장하고 있지만 어딘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신지호 길드장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 하여 이라희 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혹여 함께 온 것이 불편하십니까?”

    네.

    “아니요.”

    지호는 마음과 반대의 대답을 했다.

    누가 여기서 솔직하게 불편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무려 S급 미르 길드의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한자리에 있는데.

    하지만 진짜 불편하다. 이라희는 김태용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집요한 시선으로 신지호를 살피고 있었다. 시선에 몸이 뚫릴 것 같다…….

    “당일에는 예물을 전달하는 일 때문에 드리지 못한 선물도 드리고자 합니다.”

    이라희에게 정신이 팔렸던 지호는 말도 안 되는 단어에 반응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물 아닙니다.”

    “끼고 계시잖습니까?”

    태용의 시선이 지호의 왼손 약지에서 반짝이는, 누가 봐도 웨딩 밴드 같은 디자인의 반지로 향했다. 지호는 왼손을 슬그머니 오른손으로 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빼고 싶은데 이게 안 빠져서요.”

    “불편하시다면 제가 빼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걸 빼실 수 있으신가요?”

    “시도해 봐야 확실히 알겠습니다만, 원하신다면 해 보겠습니다. 빠지지 않는 장비는 봉인류의 술법이 걸려 있는데, 저는 술법의 해제가 특기이기도 합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법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한 손을 뻗는 태용에게 지호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반지는 역시 너무 부담스럽다. 소리의 말에 따르면 반지를 확대한 캡처가 돌면서 별의별 추측이 다 나오고 있다던데…….

    승급 선물이니 빼더라도 완전히 돌려줄 생각은 없고 줄에 걸어 목에 걸 생각이었다.

    곧 태용이 지호의 손을 잡았다. 지호와 마찬가지로 고생을 모르는 듯 부드러운 태용의 손이 지호의 왼손을 감싼다.

    태용이 정신을 집중한다.

    대체 그에게 어떤 스킬이 있기에 단단히 붙은 듯 고정된 반지를 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걸까?

    지호는 확인차 태용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아니, 정확히는 확인하려고 했다.

    시스템 관리

    자신보다 높은 등급을 지닌 생물의 정보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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