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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리자(8) (50/283)
  • 5. 관리자(8)

    “다, 다행이다…….”

    다시 보들보들한 갈색 털의 토끼 인형을 꺼내 주무르던 양호진이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허소리 역시 한숨을 쉬며 바닥에 털퍼덕 누워 버린다.

    임승주는 여전히 꼿꼿하게 선 채 광삼일의 시체를 노려봤다. 그러다가 바닥에 쓰러진 광삼일에게 다가간 임승주가 핵을 잡아 꺼낸다.

    온전한 상태로 몬스터에게서 꺼낸 핵은 마석이 된다. 그리고 높은 등급의 몬스터에게서 꺼낸 마석은 던전의 주 수입원이기도 하다.

    승주는 마석을 이 던전의 원래 관리자인 태용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태용은 마석을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냥한 광삼일이니 받으십시오.”

    “하지만 이곳은 미르 길드의…….”

    “마석 하나 정도는 괜찮습니다. 오랫동안 고생해서 잡으신 몬스터 아닙니까. 받으십시오. 주이원 헌터께서 상당한 도움을 주고 계시니 이 정도는 없어도 됩니다.”

    그 말대로, 여기서 발목이 잡혀 있던 동안 던전의 길목을 모두 쓸어 온 골렘들의 뒤로 수레가 몇 개나 쌓여 있다. 어지간한 채집꾼이 몰려와도 모으지 못할 만큼의 재료가.

    결국 임승주는 머쓱한 얼굴로 마석을 받아 자연스레 지호에게 건네주었다.

    예전 같으면 갈등하다가 줬을 텐데 기특한지고.

    지호는 기회가 된다면 이 마석으로 승주의 장비를 만들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길드의 간판 A급인데 S급 장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원스레 마석을 넘긴 태용이 뒤쪽에서 쓰러진 소리에게 다가갔다.

    “자, 일단 일어나십시오. 광삼일이 나타나면 반드시 그 근처에 광삼일이 서식하던 공터가 있습니다. 쉬기에는 그곳이 더 적합하니 거기 가서 쉬시지요.”

    “네, 네에…….”

    소리는 자신을 일으켜 주는 태용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무척 지친 소리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태용의 말대로 조금 더 걷자 광삼일이 서식하던 공터에 도착했다.

    공터의 이곳저곳에는 광삼일의 줄기가 드나든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바닥을 통해 드나들지 않는지, 땅에는 보드라운 풀만이 자라나 있다.

    잠시 쉬어 가는 게 좋겠다는 의견에 모두가 동의했다. 마침 괜찮은 채집터를 발견한 골렘들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꽤 넓은 공터에서 제각각 모여 쉬는 동안, 지호는 묘하게 가라앉아 보이는 소리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아, 넵. 저야 물론 괜찮죠.”

    “정말로요?”

    씩씩하게 대답했던 소리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졌다. 소리는 다소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냥… 주제 파악을 한 것뿐이에요.”

    “네?”

    “그냥 길드장님을 도와줄 겸 들어온다고 머리로 생각은 했거든요. 하지만 내심 S급 던전에 들어간다니까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들떠 있었나 봐요. 그러다 얻어맞고 현실 자각한 거죠, 뭐. 내가 C급 헌터라는 걸.”

    지호는 복잡한 얼굴의 소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도 그게 뭔지 알아요.”

    소리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지호를 올려다본다. 지호는 씩 웃고는 소리의 옆자리에 앉았다.

    “다들 아는 사연이겠지만 내가 지구 최초의 헌터잖아요. 신지호는 보나 마나 S급이다, 미래의 SS급이다, 다들 들떠서 그러니까… 저도 한때 제가 뭐라도 된 줄 알았거든요.”

    주변에서는 확고한 믿음에 가득 찬 신뢰가 쏟아졌다. 지호는 제힘도 정확히 모르면서 근거 없는 확신에 차서 들뜬 채 무지갯빛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리고 결과는 B.

    많은 사람이 실망했다.

    하지만 가장 실망한 사람은 지호였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주제에 설레발을 쳤던 게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수치스러웠고,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자신이 죄를 지은 것 같았다.

    담담하게 말하는 지호를 소리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처음에는 이불 속에서 엉엉 울었죠.”

    “……길드장님이요?”

    “저도 애잖아요.”

    길드 하나를 이끈다고는 하지만 지호의 나이는 고작 스물넷. 당시에는 스물세 살일 뿐이었다.

    울고, 도망치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지호는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다음은 허소리 헌터도 아는 대로죠. 이름만 등록해 둔 노네임을 운영하고, 뭐라도 해 보겠다고 아등바등…….”

    그 과정은 노네임의 초기 멤버로서 곁에서 지켜본 허소리가 잘 알았다.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바쁘게 일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몰아붙이고…….

    그 과정에서 더 큰 논란이 터져서 고생하고. 그러면서도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달리고…….

    갑자기 허소리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잠깐 자아도취 하다가 꺾인 허소리의 좌절 따위, 지금까지 봐 온 신지호의 좌절과 노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길드장님은 확실히… 좋은 스킬 생길만 해요. 열심히 하셨으니까.”

    “허소리 헌터도 좋은 보조 셔틀 하나 데리고 다닐 만하고요. 열심히 했잖아요.”

    지호의 말에 소리가 눈만 깜박였다.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보며 지호가 웃었다.

    “솔직히 허소리 헌터 없었으면 저 진작 못 버티고 길드 때려치웠을 거예요. 한 사람이지만, 한 사람이라도 나를 지지해 줬으니까 간신히 버틴 거지…….”

    “전 그냥, 조금 도와 드린 것밖에 없는데.”

    “그게 얼마나 제게 필요했는지 허소리 헌터라면 알 거예요.”

    “…….”

    소리는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당사자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신지호는 허소리의 은인이었다. 정확히는 허소리와 그 가족들의 은인이다.

    신지호의 각성 당시, 허소리의 어머니가 근처에 있었다. 어머니는 정말로 몬스터에게 공격당하기 일보 직전의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각성한 신지호가 몬스터를 죄다 날려 버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이후 신지호가 쓰러진 지난 2년간 어머니는 매일 자신을 구한 은인을 위해 기도했다.

    각성했음에도 길드에 적을 두지 않고 대학부터 졸업하려던 허소리가 휴학하고 신지호의 길드에 들어간 것도 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은인이 욕을 먹고 있으니 보은하고 싶어서.

    보은하겠다고 마음먹고 길드에 가입한 허소리조차 처음에 신지호에게 말을 거는 건 꽤 어려웠다.

    길드장을 얕보고 험담하는 노골적인 분위기가 길드 내에서 팽배했다. 신지호는 길드장이 아니라 길드 내의 암 덩어리처럼 취급받았다.

    신지호에게 손을 내미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온갖 소문을 뜯어내고 본 신지호는 그냥 성격 좋고 사람 좋은 또래 남자애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허소리는 신지호와 길드원 사이에서 완충재 역할을 하려고 애썼다. 물론 쉽진 않았다. 대놓고 욕하는 분위기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길드장을 향한 따가운 시선은 남아 있었다.

    허소리는 자신이 대단한 변화를 끌어내진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지호의 말대로, 크게 바꾼 건 없어도 당시의 신지호에게는 제 도움이 필요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다만 소리는 그 도움이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에 해당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신지호는 허소리의 도움이 길드의 존폐를 결정할 정도로 컸다고 말한다.

    복잡한 감정이 허소리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그렇게까지 힘들었나 싶은 안쓰러움, 지금까지 옆에서 노력한 대가를 받은 듯한 기쁨, 상대의 호의에 반응하는 감사함.

    소리는 벅찬 심정으로 지호의 얼굴을 응시했다. 처음 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을 정도로 예쁜 얼굴이 가까이서 순진하게 눈을 반짝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약간의 이성적 사심도 있었다. 얼굴이 저 얼굴인데 당연히 사심이 생길 수밖에.

    하지만 주이원이 하도 무시무시하게 노려봐서 포기했고, 이후 전우애가 싹트며 연애와는 거리가 먼 감정만 굳건해지긴 했지만.

    사실 지금도 주이원은 허소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신지호는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마력을 억눌러 가며.

    [별의 축언]으로 강화받지 않았으면 따끔따끔한 마력에 속이 뒤집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적대감.

    최근 1년간 지호 때문에 이원과 마주친 적이 많지만, 소리는 여전히 이원이 정말 속 모를 남자라고 생각했다.

    이원이 하는 행동만 보면 그가 지호를 좋아한다는 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죽어도 이원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지호도 이해가 됐다.

    순간의 행동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면, 제멋대로 훅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주이원의 태도는 그저 장난처럼 가벼워 보였으니까.

    하지만 역시 이런 시선을 받다 보면 진심 같긴 한데…….

    역시 모르겠다.

    소리는 깊이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이 이상한 연애인지 우정인지 모를 관계에 제삼자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신지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건 길드 일이지 연애 쪽이 아니니까.

    소리는 따가운 시선에서 도망칠 겸, 지호에게 활짝 웃었다.

    “제가 많이 도와 드리긴 했죠. 노네임의 개국 공신. 뭐 이런 거?”

    “맞는 말이긴 한데……. 회복이 빠르시네요.”

    “음, 제가 길드장님처럼 어느 날 갑자기 센 스킬이 생길 것 같진 않으니까요. 지금 상황에 만족해야죠.”

    소리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고 소박한 수준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전투를 좋아하고 강함을 추구하는 임승주와는 다르다.

    소리에게 헌터란 갑자기 제시된 전공 외의 직업일 뿐이다. 자신의 약함을 직시하고 분해진 건 맞지만, 몬스터를 가볍게 때려잡다가 갑자기 붙잡혀서 휘둘리면 누구든 이 정도는 우울해질 거다.

    굳이 따지면 소리의 관심은 자신의 워라밸에 있었다.

    앞으로 잘나갈 게 뻔한 길드장이 자신에게 큰 신세를 졌다고 하지 않는가.

    정말로 노네임이 신지호의 바람처럼 S급 길드로 성장한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상당하겠지. 지호는 소리가 C급 헌터라고 해도 그녀를 대우해 줄 것이다.

    S급 길드의 간부 연봉이 얼마더라.

    소리는 과거에 기사에서 본 기억을 끄집어내고 행복해졌다.

    “……허소리 헌터, 표정이 이상해졌는데요.”

    “아, 죄송해요. 좀 세속적인 상상을 했더니.”

    “그 상상, 제가 최대한 이뤄 드릴게요.”

    지호의 자신만만한 말에 소리는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지호는 소리에게 조금 더 편히 쉬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앉아서 쉬는 척을 하는 이원에게 다가갔다.

    선 채로 이원을 내려다보니, 이원이 고개를 들으며 애처로운 척 물었다.

    “둘이 진짜 사귀어?”

    “다 들었잖아.”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원의 청력이면 이곳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쯤 모두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다가갈 때부터 이쪽을 쳐다보던 놈이니 못 들었을 리 없다.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지?”

    “그게 연애 감정 있는 대화로 보였냐…….”

    혀를 차는 지호의 허리를 이원이 끌어안았다.

    “나랑 당장 안 사귀는 건 봐줄 테니까, 다른 사람이랑 연애하면 안 돼.”

    지호를 끌어안은 채 이원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지호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 쳤다.

    “내가 연애하면, 뭐. 네가 어쩔 건데?”

    “상대를 노네임 전 길드 건물처럼 만들어 버릴 거야.”

    “…….”

    사람 몸에 구멍을 내겠다는 건가.

    “그래, 그래. 어차피 난 당분간 연애 안 한다니까.”

    설마 주이원이 진짜로 남에게 구멍을 낼 리 없으니 지호는 픽 웃으며 과격한 농담을 즐겨 하는 소꿉친구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원이 지호의 배에 대고 낮게 웃었다.

    “야, 웃지 마.”

    간지러워서 지호는 이원의 머리채를 콱 잡고 떼어 냈다. 머리채를 잡혔는데도 이원은 여전히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그냥. 지호라면 다 좋아.”

    “싱거운 놈…….”

    지호는 손을 떼고 이원의 옆에 털퍼덕 누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원의 무릎을 베개 삼아 베고 눈을 감았다.

    “야, 나 잠깐만 잘래.”

    “그래, 자.”

    “출발할 때 깨워 줘.”

    “응.”

    낮게 속삭인 이원이 지호의 눈 위에 손을 얹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때는 마법이 지호를 잠 속으로 끌고 가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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