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체불명의 무언가(14)
“…….”
지호가 진심임을 알아챈 이원이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동시에 방 안을 가득 채운 위협적인 마력 또한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알았어, 적당히 하면 되잖아. 됐지?”
“……그래.”
이원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식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비를 걸던 경현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 경현아.”
“아, 안녕.”
경현이 얼떨떨하게 이원의 인사를 받았다. 썩 유쾌할 만한 상황은 아닌데, 경현이 워낙 속 좋은 녀석이라 기분이 크게 불쾌해진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지호는 식사를 주문했다. 직접 짐을 옮긴 건 아니지만 이사하느라 신경 썼더니 피곤했다. 친구들과 편하게 저녁이나 먹고 싶지, 괜히 눈치 보며 기 싸움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도 한 번 경고하고 났더니 이원은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친구를 상대한다기보다는 비즈니스적인 미소라서 위화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계속 서로 싸우는 것보단 나았다.
헌터 협회에서 근무 중인 경현은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균열 예측률이 저하되고, 인간형 몬스터까지 나타나면서 연일 비상이었다.
“바쁜데 용케 나왔네?”
“너 만나러 간다니까 보내 준 거야. 협회 쪽에서 잘 보이려고.”
경현은 숨길 것도 없단 듯이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각성은 했지만 F급이라 일반인과 큰 차이 없는 경현은 조금 취한 상태였다.
“협회 그놈들이, 지호 너 무시하고 막……. 그랬잖아, 개새끼들. 그랬으니까 이제 와서 쫄리는 거지. 강태주처럼 튈까 봐. 안 그래도 주이원도 골치인데…….”
경현은 말을 하다 말고 놀라 입을 다물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경현이 이원과 눈이 마주쳤다. 이원은 웃었을 뿐이지만, 경현은 화들짝 기겁하며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지호가 물을 따라 주며 어색하게 웃었다.
“뭔 이야기인지 나도 알아. 호주에서 갑자기 귀국하는 바람에 그거 둘러대느라 고생한 거지.”
“어, 어어. 알고 있었구나.”
툭, 이원의 손끝이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별것 아닌 동작인데도 마력을 실어서인지 단번에 눈길이 간다. 말실수한 손경현을 보는 주이원의 눈빛이 몹시 싸늘했다.
“경현아. 말조심 좀 하는 게 좋겠는데.”
“그, 그렇지. 미안. 내가 취했나 보다.”
서늘한 이원의 목소리에도 순순히 수긍하며 경현이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지호는 그 모습을 다소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호주에서 멋대로 한국으로 돌아온 게 잘못 아닌가? 물론 이원이 돌아와 도와주지 않았다면 죽었을 테니 와 준 것 자체는 고맙지만. 도와주고 나서 돌아가도 충분한 문제였다.
가끔가다 왜 이렇게 극성을 부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이원의 눈에 지호가 아주 작은 이유로도 곧 죽어 버릴 연약한 인간으로 보이기라도 하는 건지.
지호는 이원을 타박하는 대신 경현을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음, 다음부터 실수 안 하면 되지, 뭐. 우리 길드 일이니까 대충 들은 거고……. 협회 입장도 이해가 가고.”
지호는 슬쩍 경현의 눈치를 살폈다. 지호가 실제로 몬스터에게 공격받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태연하진 못했을 것 같은데.
어릴 적부터 종종 쓰러지는 일이 잦은 지호이다 보니, 이원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지호의 상태에 관해 유난스러운 면이 있었다.
일이 복잡해질까 봐 지호가 습격당했다는 정보는 제한되었다. 아직 간부직에 오르지 못한 경현은 거기까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설마 해외로 튀겠어. 청람이 여기 있는데.”
지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신지호는 원래 집안의 사업과는 관계없이 자랄 예정이었다. 하지만 세계 최초의 각성자가 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신지호의 이름은 청람과 항상 함께하게 되었다.
국내의 고등급 헌터가 거점을 완전히 해외로 옮기는 건 국가와 국민의 안전과 직결되는 예민한 문제다. 실제로 해외를 거점으로 두고 활동 중인 S급 헌터 강태주는 지호 이상으로 까이고 있었다.
청람이 한국에서 사업을 완전히 접는다면 또 모를까. 그럴 일은 없으니 지호는 평생 한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난 이민 가고 싶은데.”
“뭐?”
지호와 경현이 놀라서 동시에 말했다. 두 사람의 놀란 시선을 받으며, 이원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한국은 동성혼이 안 되잖아? 지호랑 결혼하려면 가능한 나라로 가야지.”
“……왜 내 허락도 없이 나랑 결혼하려고 그러냐?”
어처구니없어진 지호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경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야, 너넨 아직도 그러고 노는구나.”
“노는 게 아니라 얘가 날 놀리는 거라니까?”
“그 소리도 전이랑 똑같네.”
직접 겪지 않는 사람으로선 그냥 재미있는 일일 뿐인지 경현은 그저 즐거워 보였다. 지호도 결국 어처구니없어 웃어 버렸다.
“민재가 언제 한번 날 잡고 모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 다 모인 지 한참 됐잖아?”
“그러게…….”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신지호와 주이원, 손경현을 포함해 김민재, 신우진, 차동혁 이렇게 여섯 명이서 자주 놀러 다녔다.
균열 사태 발생 이후, 쓰러진 지호를 다섯 명이 특히 자주 문병 왔다고 했다. 무엇보다 지호가 등급 조작 의혹을 받을 때도 변함없이 지호를 지지해 줬다.
소중한 친구들이다.
다만 다들 바빠서 한자리에 모이기는 쉽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섯 명이 모인 적은 많은데 주이원이 포함되기가 어려웠다.
지호가 이원을 슬쩍 쳐다보자 기다리고 있었단 듯이 미소 짓는다.
“날 잡으면 하루 빼 볼게. 한번 모이자.”
“정말? 괜찮겠어?”
“종일 보는 거 아니고 저녁에 잠깐 보는 거라면.”
“그 정도면 충분하지.”
경현이 신이 나서 단톡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당장 날을 잡기는 쉽지 않아서 천천히 계획하기로 하고, 화제는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사이답게 온갖 화제가 오르내렸다. 경현이 응원하는 야구팀, 민재의 새로 생긴 여자 친구 이야기, 최근에 개봉한 영화, 오늘 먹은 음식 같은 사소한 이야기들.
세 명 다 각성자이다 보니 대화의 주제는 각성자나 헌터, 던전에 대한 내용까지 흘러갔다.
한창 이야기에 열이 올랐을 때, 급하게 이원의 단말기가 울렸다. 잠시 화면을 확인한 이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나 연락 좀 받고 올게.”
“응, 다녀와.”
이원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공간 이동을 하는지 작은 마력 파동이 느껴지고, 이내 이원의 기척이 사라졌다.
지호는 괜히 한 번 주변을 둘러보고 테이블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경현아, 경현아.”
“응?”
“나 사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보고 싶은 거?”
“응.”
지호는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너 혹시 이플리스라는 거 들어 봤어?”
“이플리스? 그게 뭔데?”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역시나 전혀 들어 본 적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이플리스에 관해 묻는 게 오늘 경현을 만나려던 목적 중 하나였다. 그래서 기를 쓰고 주이원을 떼어 내려 했던 거고.
전화나 메시지로 물어보면 빠르겠지만…….
이플리스에 관한 정보는 지호의 선에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만약 ‘이플리스’가 금기시된 어떤 것이라 정보를 찾기 어려웠던 거라면…….
그런 가정을 해 보니, 남이 엿듣거나 훔쳐볼 수 있는 곳에 흔적을 남기기는 꺼려졌다. 그래서 직접 얼굴을 보며 물어보려 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를 배신했다. 지호는 실망한 티를 내는 대신 별것 아니었던 것처럼 씩 웃어 보였다.
“나도 모르는데……. 그냥 각성자나 던전, 아이템, 스킬 관련해서 아무거라도 좋으니 뭔가 아는 거 없나 싶어서.”
경현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물었다.
헌터 협회에 다니는 데다가 각성자에 꽤 관심이 많은 경현이라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과한 기대였던 모양이다.
“모르면 됐고.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냐, 잠깐만.”
경현이 지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아리송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나 그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아.”
“정말?”
순간 지호의 얼굴에 화색이 서렸다. 그러자 경현은 조금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근데 나도 확실한 건 아니라서…….”
“괜찮아. 알게 되면 뭐라도 알려 줘.”
“근데 그건 뭐 하러 찾는 건데? 그냥 단어만 아는 것 같은데.”
“음……. 그게.”
경현의 질문에 지호는 뭐라고 설명할지 망설였다.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걸리는 게 많았다.
분명 죽었을 법한 상황에서 [이플리스의 수호]라는 정체불명의 스킬 덕에 살아났는데 대체 뭔지 몰라서 알아보고 싶다고?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고 싶지 않고, 제 눈에 시스템 창이 보인다는 걸 알리기도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손경현을 못 믿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이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기 전까진 남에게 섣불리 알려 주는 게 꺼려졌다.
지호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자 경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냐. 괜히 물어봤네. 곤란하면 말 안 해도 돼.”
“응, 미안. 나중에 말할 수 있게 되면 말해 줄게.”
“알았어. 며칠만 기다려. 이플리스 비슷한 거라도 최대한 알아볼 테니까.”
“경현아……. 고마워.”
지호가 식탁 위로 올라온 경현의 손을 꽉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역시 친구가 최고다. 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는데 억센 손이 끼어들어 지호의 손을 떼어 놓았다.
주이원이었다.
공간 이동까지 하기에 오래 걸릴 줄 알았더니 금방 돌아왔다. 불쑥 끼어든 이원은 사나운 눈초리로 경현을 노려보았다.
“남의 남친한테 껄떡거리지 말랬잖아.”
“주이원.”
지호가 낮게 경고했지만 이원은 기어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던 지호의 손을 원위치시키고서야 손을 뗐다. 지호가 노려보자 그제야 천연덕스럽게 불쌍한 척을 한다.
“네, 네.”
“너희도 진짜 여전하다.”
경현은 불쾌해하는 대신 재밌다는 듯 웃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가볍게 흘러갔다.
* * *
택시에 오르는 경현을 배웅해 주고, 지호는 이원과 함께 집을 향해 걸었다.
이원은 쉴 새 없이 지호의 신경을 거슬려 대던 평소와 다르게 무표정한 낯으로 조용히 걷고 있었다.
앞서가는 이원의 걸음이 조금 빠르다.
지호는 저보다 훨씬 더 커진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