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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체불명의 무언가(13) (40/283)
  • 4. 정체불명의 무언가(13)

    “……나간다고? 오늘? 첫날인데?”

    두다다 말을 쏘아 내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어쩌겠는가. 이사는 지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작스럽게 결정됐고, 약속은 그 전부터 잡아 뒀었는데.

    지호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니 들떠 있던 이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원은 웃을 때 인상이 상당히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편이다. 그렇다는 말은 즉, 웃지 않을 때는 상당히 딱딱한 인상이라는 뜻이다.

    깊이 팬 또렷한 눈매는 차갑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아무런 온기도 담지 않는 눈빛은 무척 오만하고, 한편으로는 비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각성까지 하고 나서는 특유의 분위기와 압도적인 마력 때문에 경계심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던데.

    “금방 나갔다 올게. 응?”

    주이원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 지호에게는 남의 이야기였다. 지호는 대충 키우는 개를 타이르는 심정으로 설득했다.

    하지만 이원은 착한 개와 달리 고집이 셌다.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서 얌전히 놀아. 괜히 돌아다니다가 습격당하지 말고.”

    “강남역에서 보기로 했으니까 여기서 멀지도 않아.”

    “누구랑 약속 있는데?”

    “친구.”

    “친구 누구?”

    부모님도 이렇게 꼬치꼬치 안 물어보시는데.

    말하면 알아?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알 것이다. 그야 같은 학교, 같은 반에 ‘푸른 수염의 방’에서 본 사진 속에도 찍힌 인물이니까. 지호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경현이.”

    “난 그 새끼 싫은데.”

    이원이 1초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지호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너희 사이 좋았잖아…….”

    “별로.”

    그런 것치고는 사진마다 경현이가 빠지지 않고 찍혀 있던데. 다른 연 끊긴 친구들에 비하면 경현이가 훨씬 낫지 않나…….

    하긴, 그건 지호의 사정이고 이원의 경우엔 좀 다를지도 모르겠다. 3년간 지구를 지킨 이원은 뭔가 조금, 인간 불신에 빠져 있는 듯 보였으니까.

    경현이 문제가 아니라 이원은 사람 자체를 믿지 않는다.

    내 외출에 네가 무슨 상관이냐, 라고 화를 내기에는 며칠 전에 구해진 이력이 있었다. 결국 지호는 애원에 가깝게 부탁했다.

    “미안, 이미 약속했던 거라 어쩔 수 없어. 경현이도 시간 힘들게 뺀 거고, 나랑 오랜만에 보는 건데 갑자기 약속을 깰 수는 없잖아. 전에 습격한 몬스터 단서 잡히기 전까진, 다음번에 약속 잡게 되면 너한테 먼저 말할게. 응?”

    지호를 빤히 보던 이원이 뭔가 몹시 짜증 난다는 듯 자기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렇게 쳐다보지 좀 마.”

    “뭔 소리래……. 그냥 본 건데.”

    이원은 대답 대신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저러다 피 나겠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원의 손목을 잡아 내려 만류했다. 그러자 이원의 눈이 몹시 놀란 듯 커졌다.

    어차피 SS급이라 피 좀 나도 금방 나을 텐데 괜한 짓을 했나, 싶어서 슬쩍 손을 내렸지만 이원의 강렬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지호에게 붙잡혔던 자신의 손목을 한 번, 지호의 얼굴을 한 번, 다시 손목, 얼굴, 그렇게 계속 번갈아 보던 이원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응, 고맙…….”

    “대신 나도 데려가.”

    “뭐?”

    말도 안 되는 고집에 고맙다는 말이 순식간에 쏙 들어갔다.

    “나랑 같이 가자고.”

    “……애냐? 노는 데 따라오게.”

    “네가 애지. 내가 보호자로 가는 거고.”

    지호는 이원을 퍽 때렸다. 물론 이원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가긴 뭘 가, 너 바쁘잖아.”

    “안 바빠.”

    “안 바쁘긴? 내일도 출장 가면서. 일찍 자야지.”

    대답 대신 이원이 지호를 빤히 바라본다.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지호는 괜히 이원의 시선을 피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항상 잘 아네, 싶어서.”

    “네 소식이야 유명하니까…….”

    “응. 그렇지.”

    명백히 기분 좋아진 목소리로 이원이 답했다. 어쩌면 보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호는 부드럽게 권유했다.

    “멀리 가야 하는데 일찍 쉬어.”

    “황혜림이랑 같이 가니까 상관없어.”

    “아…….”

    이번에도?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함께 갔었지. 황혜림과 주이원의 이동 동선은 꽤 자주 겹치는 편이다.

    지호는 혜림을 봤던 그 날을 떠올렸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이원 씨, 하고 제법 친근하게 부르던 목소리. 평소 까탈스러운 편이라고 알려진 혜림이 이원과는 거리낄 게 없는 사이처럼 보였다.

    둘이 사귀나?

    수면 아래로 가라앉혀 두었던 의문이 다시 둥실 떠올랐다.

    “안 사귀어.”

    “어?”

    “안 사귄다고.”

    “아, 그래.”

    아직 한마디도 안 했는데.

    이원의 변명이 오히려 지호의 의심에 불을 붙였다.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랬다.

    진짜 사귀나 봐. 묻지도 않은데 혼자 찔려서는…….

    “아니라고.”

    이원이 성질을 냈다.

    지호는 반쯤 믿지 않으면서도 대응이 귀찮아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비밀로 해 줄게.”

    “진짜 아니야. 황혜림을 백 명 가져다줘도 관심 없어.”

    “그건 황혜림 헌터한테 너무 실례되는 말 같은데.”

    부정할 거면 얌전히 하지, 괜히 남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지 않나. 지호가 인상을 찌푸리자 이원은 억울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황혜림이 먼저 나 같은 놈 백 명 가져다줘도 싫다고 했거든.”

    “너한테?”

    “응, 나한테 직접 말했거든.”

    “진짜로?”

    “진짜로. 거짓말 같으면 나중에 만났을 때 물어보든가.”

    “…….”

    황혜림,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무례한 사람이다. 지호는 마음속으로 황혜림에 대한 평가를 약간 하향 조정했다. 유능하지만 동료에게 말버릇이 다소 안 좋은 사람으로.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쨌든 따라오지 마. 멀리도 안 가. 딱 이 근처에서 놀게.”

    “왜, 그냥 같이 가. 동창끼리 만나면 좋잖아.”

    “너 경현이 안 좋아한다며…….”

    불과 몇 분 전에 말해 놓고 금방 말이 바뀐다. 하지만 이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끝까지 뻔뻔했다.

    “좋아하도록 노력해 볼게.”

    “그런 자리 아니거든. 경현이랑 편하게 만나는 자리인데…….”

    “그래도 호위는 필요해. 너 혼자는 별 전투 능력 없는 거,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

    “그건 나도 알지. 그래서 방어 아이템도 샀고, 무기도 샀고. 일회성이지만 S급도 막을 수 있는 아이템까지 있어. 이건 네가 준 거니 잘 알겠지. 게다가 오늘 넌 쉬잖아? 이 근처라면 나한테 이상이 생겼을 때 네가 충분히 공간 이동으로 와 줄 수 있는 거리야. 네가 준 비상 호출기도 여기 잘 들고 있다고. 못 미더우면 아예 손에 들고 다닐게.”

    “…….”

    허점 없는 논리에 이번에는 이원이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지호도 막무가내로 생각 없이 놀러 가려던 건 아니다. 몬스터가 습격하면 지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도 같이 위험해지는데 생각 없이 돌아다니겠는가? 나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아들었지? 그럼…….”

    “알았어, 그래. 난 혼자 남아서 오랜만에 회장님이랑 이야기나 해야겠네. 막내아들한테 있었던 일 좀 얘기해 드려야지.”

    “…….”

    이 치사한 자식.

    꽉 쥔 지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성과 논리 따위,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 있다는 걸 깜박했다.

    * * *

    신지호의 논리로는 주이원의 밑도 끝도 없는 똥고집과 비열함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주이원을 손경현과의 약속 장소에 데리고 왔다는 뜻이다.

    다행히도 미리 경현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흔쾌히 마음대로 하라는 답장이 왔다.

    경현과 약속한 장소는 개별 룸으로 나뉘어진 한정식집이었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아 이곳을 선택하면서도 너무 자의식 과잉 아닌가, 했었는데. 주이원과 오게 됐으니 정말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주이원을 강남 한복판에 떨궜다가는 차까지 멈춰 서고 인파가 죄다 그에게 몰릴 테니까.

    퇴근하자마자 바로 왔는지 경현은 양복 차림에 재킷만 벗은 셔츠와 타이, 바지 차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지호를 보며 경현이 활짝 웃었다. 지호의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떠올랐다.

    “경현아.”

    “안녕, 지호야. 그리고 이원아.”

    서로 사이가 안 좋다는 말과 달리 손경현은 주이원을 보자마자 밝게 웃었다. 하지만 주이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재수 없는 새끼.”

    “야. 미쳤냐?”

    지호는 오랜만에 보면서 욕부터 날리는 미친놈의 옆구리를 쿡 찍었다. 심지어 경현은 이원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데, 이원 혼자 경현에게 날을 세운다.

    지호는 이원을 내버려 두고 급히 경현에게 다가와 사과했다.

    “경현아, 미안. 쟤 돌았나 봐.”

    “자꾸 남의 남친 불러내지 좀 마.”

    “여기서까지 헛소리할래?”

    기겁하며 지호가 이원을 돌아봤지만, 이원은 내가 뭔 잘못을 했냐는 듯 뚱한 얼굴이었다.

    진짜 괜히 데려왔다.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안 데려오면 아버지께 당장 이를 기세니 어차피 데려올 수밖에 없었겠지만…….

    지호는 화를 꾹 참으며 이원에게 손을 휘저었다.

    “너 그렇게 시비만 걸 거면 나가.”

    “위험하다니까.”

    “집으로 돌아가라고 안 해. 여기 문 앞에서 경호 서면 되잖아?”

    뚱하던 이원의 표정이 정말로 차갑게 굳었다. 심지어 눌러 둔 마력마저 위협적으로 스멀스멀 흘러나와, 각성자라고는 해도 F급에 불과한 경현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진심이야?”

    “어.”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지호는 오히려 화가 치밀었다.

    지호는 각성자들이 함부로 힘을 쓰며 과시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원이 그 비슷한 짓을 하고 있다니.

    수틀리면 그냥 부모님께 이르든 말든 쫓아낼 작정으로 지호는 단호하게 문을 가리켰다.

    “선택해. 말 얌전히 하고 앉아 있을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가서 서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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