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체불명의 무언가(12)
이원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소름이 돋았다.
당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지호를 이원이 꽉 잡았다. 제힘을 다 쓰진 않았겠지만 지호가 뿌리칠 수 없을 만큼은 억센 힘이다.
지호는 점점 더 닭살이 오르는 걸 주체하지 못한 채 바둥거렸다.
“야,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닌데……. 아, 지호 귀 빨개졌다.”
이원의 입술이 지호의 귀에 닿았다. 지호는 기어이 이원의 중심을 노리며 발을 내질렀고, 가뿐히 피한 이원은 언제 질척거렸냐는 듯이 깔끔하게 놓아주었다.
“부부 침실은 아직 일러? 하긴, 식도 아직이니까.”
“평생 식 올릴 일 없거든!”
“신혼부부 방이 싫다면 네가 여기 써.”
“내가 왜…….”
“같이 쓸래?”
“미쳤냐?”
“그럼 네가 써. 여기가 현관에서 바로 들어오기 편하잖아.”
당연하단 듯이 떠넘기는 이원의 태도에서 지호는 원래부터 저놈이 이걸 유도했음을 확신했다.
원래 바라는 게 있으면 그쪽으로 살살 유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루어 내는 게 저 주이원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그리고 대부분 지호는 거기에 넘어가는 편이었다. 주이원이 저런 식으로 고집부리는 선은 매번 아슬아슬하게라도 지호의 허용 범위 안에 있었으므로.
해서, 뻔히 결과가 보이지만 지호는 다시 한번 반박했다.
“됐어, 너희 집이잖아. 그냥 네가 써. 본가에서도 2층에서 지냈는데 뭐, 하나도 안 불편해. 오히려 이 방은 부담스럽다고.”
“하지만 네가 이 방을 쓰는 게 합리적이야.”
“합리씩이나?”
“생각해 봐, 지호야. 만약 누군가 옥상으로 폭격이라도 하면 내가 먼저 맞는 게 낫잖아?”
“아니, 그게 무슨…….”
“지호는 한 방 감일 테고, 난 맞아도 안 죽고. 아래층은 방어해 줄 수 있으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예시가 너무 극단적이다. 지금이 전쟁 중도 아니고 폭격을 맞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나 모르는 사이에 어디서 전쟁이라도 터졌어? 폭격은 무슨 폭격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렇지. 근데, 몬스터가 도심 한복판에서 사람 찾아와서 찌를 것도 전혀 예상 못 했잖아. 그렇지?”
“…….”
그건 그렇다.
이 새끼는 신지호 입 틀어막기 1등급이라도 따둔 게 분명하다.
몇 마디 더 토로해 보았지만 결국, 더 안전하다는 아래층은 지호가 쓰는 것으로 결정됐다. 침실을 지호에게 떠넘기고 이원은 희희낙락 욕실 문을 열었다.
욕실 역시 어마어마하게 컸다. 특히나 욕조가 커도 너무 커서, 혼자 쓰기는 휑해 보일 정도였다.
“둘이 들어가려면 큰 게 좋잖아. 여기 부부 침실이니까.”
이원이 지호의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둘이 움직이려면 넓은 게 좋으니까.”
“둘은 뭐야, 다섯 명도 들어가겠다.”
“하하.”
시답잖은 농담이나 나누면서 지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자기 결혼하면 여길 부부 침실로 쓸 거니까 얌전히 쓰란 소린가?’
하긴 연인이 사용하기에 딱 좋아 보이는 방이었다. 실제와 같은 환상을 보며 실내 데이트를 즐기기도 제격이고, 여러 명이 쓸 수 있는 욕조 역시 편하겠고.
그렇게 생각하니 첫 입주인 게 다행이다. 이원이 처음부터 여기 살고 있었다면, 어쩔 수 없이 이원이 사귀었던 정체불명의 상대를 저도 모르게 떠올릴 것 같아서.
주이원이 누구와 사귀든 알 바 없지만 신경 쓰이고 찝찝하지 않은가. 남이 어떤 식으로 썼을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는 잠도 안 올 것 같다.
지호는 있지도 않은 망상을 떨쳐 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집 구경은 지호가 쓰는 1층을 지나 이원이 쓰게 된 2층까지 이어졌다.
1층에 주방이나 식당, 세탁실 등의 공용 공간이 있듯 2층 역시 공용 공간이 있었다. 2층의 절반 정도는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어터 룸이나 훈련실이 차지하고 있었다.
방을 모두 둘러보고 딱 하나의 방만이 남았을 때, 이원이 문을 열려던 지호를 제지했다.
“아, 이 방만은 열면 안 돼. 다른 방은 다 괜찮지만 여기만은.”
“……네가 무슨 푸른 수염이냐?”
푸른 수염.
그렇게 불리던 귀족은 결혼했던 아내가 모두 실종된 불길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새로 결혼한 아내에게 모든 방에 들어가도 좋지만 단 하나의 방만은 들어가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아내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방에 들어가게 되고. 비밀의 방 안에는 실종된 전 아내들의 시신이 있었다… 는 내용의 끔찍한 동화다.
즉, 좋은 놈이 아니란 뜻이다.
괴상한 살인마와 닮았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이원은 태연했다.
“맞아, 지호가 이 방문 열면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신세가 될 거야.”
“웃기고 있네. 푸른 수염에선 마지막에 탈출하거든?”
코웃음 치며 지호는 시원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리 크지 않은 방을 가득 채운 것은…….
사진이었다.
한 사람의 사진.
가구라고는 놓이지 않은 방, 바닥을 제외하면 벽면부터 천장까지 모두에 지호의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
차라리 안에 시체가 있는 게 덜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어딜 둘러봐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경험은 섬뜩했다.
“거봐, 열지 말랬잖아.”
툭,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원이 귓가에 속삭였다. 낮은 웃음소리가 오늘따라 음산하게 느껴졌다.
지호는 질겁하며 이원을 쳐 내고 뒷걸음질 쳤다. 하필이면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게 지호의 패착이었다. 지호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이원과의 거리를 벌렸다.
“다, 다가오지 마.”
“진짜로 겁먹네. 섭섭하게…….”
우울하게 중얼거린 이원이 옆쪽을 손짓했다.
“잘 봐 봐, 친구들이랑 놀러 다녔던 사진이잖아.”
“어…….”
지호는 다시 한번 사진을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사진에는 모두 친구들이 찍혀 있었다.
크게 확대한 사진은 지호가 거의 정면으로 나온 샷이 많지만……. 대부분이 지호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 같았지만…….
그래, 주이원이 변태도 아니고 뭐 하러 신지호의 사진을 방 안 가득 붙여 놓겠는가.
물론 친구들의 사진을 이렇게 붙여 둔 것도 이상하긴 한데…….
“한창 던전 공략하고 생사 오락가락할 때 힘들었거든.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 얼굴이라도 보면 나을까 싶어서 하나둘 붙이다 보니 이렇게 됐네.”
이원이 아련한 눈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사람이 힘들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물론 신지호 자신은 이런 짓을 하지 않겠지만 70억의 인구가 있으면 70억 개의 방법이 있는 법이다. 자신의 관점에서 조금 이상하다고 무조건 나쁘다고 가정하면 안 된다.
지호는 괜한 편견과 억측을 지워 내기 위해 애쓰며 사진을 둘러보았다.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아주 작은 두 사람의 사진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친구들의 얼굴은 바뀔 때도 있지만 지호와 이원은 늘 함께 있었다.
“나, 너랑 왜 이렇게 많이 놀러 다녔냐? 빠지는 적이 없네.”
“네 친구가 내 친구고 내 친구가 네 친구잖아.”
“그건 그렇지.”
어릴 적부터 같이 다녔더니 친구가 죄다 겹쳤다. 특히 놀러 갈 때면 자주 아픈 지호에게 자신이 꼭 필요하다는 듯이 이원이 뒤따랐다. 그래서 친구들도 지호와 이원을 한 세트처럼 취급했다.
뭐, 이제는 그 친구들과 대부분 연락이 끊어졌지만…….
이 방에 있는 사진은 대부분 아직 연이 끊기지 않은 친구들이 찍혀 있다. 그래서 덜 씁쓸했다.
“아직도 힘들어?”
“응? 아니.”
“그러면 떼 버려도 되지 않냐. 아무리 이유가 있다지만……. 이제 떼도 될 것 같은데.”
아무리 사연이 있다고 해도 지호의 얼굴이 빼곡히 붙은 방은 다소 소름 끼친다. 하지만 이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렇게 평범하게 놀러 다니는 건 이제 다 끝났잖아? 추억의 방쯤으로 남겨 두려고.”
이원이 태평한 소리로 말했지만 지호는 철렁했다.
지호는 경험해 보지 못한 시기지만, 갑작스럽게 균열이 발생한 직후의 지구는 말 그대로 혼란스러웠다.
처음부터 이원이 굳건한 위치를 차지했던 건 아니다. 위태로울 때도 있었고, 욕을 먹을 때도 있었다. 지호가 곁을 지키지 못한 동안 이원 나름대로 힘든 일이 많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못해 힘들었던 때, 이원은 고작 친구들의 사진 따위에 의지해서 힘을 얻다가, 상황이 안정된 지금은 평범하게 노는 생활이 끝났다고 말한다.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뭐가 끝나, 나중에 또 놀러 가면 되지.”
“지호가 같이 가 줄 거야?”
“당연하지.”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원도 이전 친구들과의 연락을 대부분 끊은 건 마찬가지였다. 서로 피차 같이 갈 친구도 없으니…….
지호가 친구들과 직접 관계를 끝낸 건 아니었다. 막 깨어났을 때는 병실을 찾아와 준 친구들이 훨씬 많았다.
다만 그 이후 여론이 반전되고, 지호가 욕을 먹는 과정에서 상황이 묘해졌다. 몇몇 친구들이 인터뷰에서, 또는 인터넷에서 이상한 말을 떠들어 댄 것이다.
이원은 지호에게 말하지도 않고 험담한 친구들을 모두 색출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인연을 끊어 버렸다.
안 그래도 정신적으로 한창 취약해져 있던 때의 지호 역시, 그 친구들을 다시 볼 생각이 없어서 연락처를 모조리 차단했다.
그래도 몇 명의 친구는 남겨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녀석도… 내 곁에 남아 준 몇 안 되는 친구지.’
지호와 눈이 마주치자 이원이 눈을 접어 웃는다.
피차 처량한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원의 표정은 밝았다.
“좋아. 그럼 지호가 놀아 주는 거 기대하고 있을게.”
“기대할 거까지야…….”
“기대할게.”
“어, 그래…….”
뭔가 굉장한 계획을 짜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린 채, 지호는 혼란스러운 방의 문을 닫고 나왔다.
대충 이원이 이 방을 만든 이유는 이해했지만 두 번 들어오고 싶은 방은 아니었다.
여전히 소름이 돋아나 있는 팔을 문지르며 지호는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6시 반이었다.
함께 1층으로 내려온 이원이 자연스럽게 지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밥 먹을래? 차려 줄게.”
“아니, 나 약속 있어. 슬슬 나가 봐야 해.”
지호의 대답에 이원의 표정이 동전을 뒤집은 것처럼 완전히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