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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체불명의 무언가(8) (35/283)

4. 정체불명의 무언가(8)

사실 임승주가 [별의 축언]으로 강화되면 너무 강해져서 안 데려간 건데.

[별의 축언]을 받은 임승주는 S급 헌터와 맞먹는다.

그리고 어지간한 사설 훈련장은 S급 헌터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다. 파손되면 고스란히 물어 줘야 하는데 현재의 노네임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서러워하는 걸 보니 일단 데려가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안 들어줬다간 무릎을 꿇는 게 아니라 드러누울지도 모르고…….

“데려가 주실 겁니까?”

“네. 안 그래도 조금 더 스킬을 맞춰 볼 필요도 있으니까요. 다만 훈련장의 결계에도 한계가 있어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기물 파손인데… 조절 잘할 수 있겠어요?”

“네, 물론입니다. 완벽하게 해내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갖진 말구요…….”

결국 지호도 좋은 일인데 그간 퍽 서러웠던지 승주는 몇 번이나 확답을 받고 나서야 일어났다. 얼핏 시계를 보니 이미 시침이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훈련소 위치는 따로 문자 드릴게요. 내일은 그쪽으로 출근하시고, 훈련하려면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목적을 마치자마자 임승주는 아쉬울 것 없다는 태도로 휑하니 길드장실을 나갔다.

지호는 한 번 더 카페로 가서 프라푸치노를 주문해 길드장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쌓였던 서류를 열심히 처리하기 시작했다.

처음 길드를 열었을 때는 막막했는데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완전히 집중한 지호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허리를 펴고 남은 양을 확인했다.

“애매하게 남았네…….”

급한 서류는 모두 정리했다. 평소라면 모두 처리하고 가겠지만 내일부터는 임승주가 추가로 합류하는 만큼 일찍 들어가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지호는 일을 마무리하고 일어났다.

길드장실을 나오니 길드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지호는 괜히 길드를 한 번 둘러보았다.

한국의 길드는 예측되지 않은 균열이나 게이트 발생 시 곧장 출동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대부분 길드에 서너 사람쯤은 남아 있는 편인데, 오늘은 드물게 배정되는 전면 휴일이라 길드 내부에 아무도 없었다.

불이 꺼진 조용한 사무실이나 훈련실을 보니 묘한 기분이 밀려왔다.

낮과는 다른 밤이 주는 특유의 적막에 잠겨 있던 지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아주 조금 긴장한 채.

“…….”

당연하지만 지호가 아무리 허공을 바라봐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혼자 있었지만 괜히 머쓱한 기분에 지호는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돌렸다.

사실 지호는 어릴 적에 귀신을 봤었다.

지호에게 영감 따위가 있었던 건 아니다. 지호가 본 귀신은 딱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애초에 그걸 귀신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은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호만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니 귀신이 맞겠지만, 묘하게 귀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던 존재였다.

그 귀신은 얼굴이 몹시 희고 눈과 머리가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새카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생김새였다.

생김새만 보면 영락없이 귀신이다. 게다가 귀신은 보통 두려운 존재 아닌가.

하지만 지호는 상대에게서 이유 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그 사람은 꾸준히 지호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알아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독순술로 말을 유추해 보려고 해도 어째서인지 한 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화를 시도해 본 적도 여러 번이지만 모두 무용지물로 돌아갔다.

나중에는 그냥 나타나도 무시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하느라 바빴으니까.

무시해도 귀신은 주기적으로 꾸준히 나타났고, 계속 지호에게 전해지지도 않는 뭔가를 말했다.

그 귀신은 지호가 각성한 이후 사라졌다. 더 이상 귀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지호가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자주 보니 익숙해져서 무섭지도 않을뿐더러, 뭘 전하고 싶기에 그렇게 처절하게 부르는지 언젠가는 이해하고 싶었으니까.

그냥 어릴 적의 환상이었을지도 모르지.

추억을 갈무리한 지호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여전히 싱그럽게 피어 있는 장미였다.

거의 한 달 전에 주이원이 준 장미 꽃다발이 무슨 양분을 먹고 자라나는지 미스터리였지만, 일단 다른 길드원들은 분위기가 화사하다며 좋아했다.

주이원은 지금쯤 호주에 있는 던전 공략을 위해 대기 중일 것이다. 두어 시간 후에는 슬슬 공략에 들어가겠지…….

아직 식사도 못 했으니 음식을 포장해 가서 씻고 뉴스나 봐야겠다. 시간대가 얼추 맞으니 뉴스의 각성자 코너에서 이원의 던전 진입을 생중계로 보여 줄 것 같다.

“딱 맞네.”

자신이 세운 저녁 계획에 만족하며 지호는 길드 내부의 불을 모두 끄고 사무실의 마력 패턴으로 인증되는 잠금장치를 잠갔다. 그리고 몇 번 더 확인한 후에야 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의 앞으로 가려던 그때.

뚜벅, 뚜벅.

누군가의 발소리가 계단 쪽에서 울렸다. 먼 곳도 아니고 퍽 가깝게 들리는 소리에 지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건물의 가장 높은 2개 층은 모두 노네임 길드가 사용 중이었다.

노네임은 특성상 방문객을 받을 일이 없는 길드다. 이런 시간이라면 더더욱 찾아올 사람은 없다. 유일하게 방문할 만한 상대인 주이원은 현재, 호주에 있다.

굳이 좁고 더러운 계단으로 올라온다는 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일 확률이 높다.

‘길드 털이범인가?’

길드 털이범은 단순 도둑과는 다르다. 마력 봉인 따위를 해제하는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각성자 등록을 하지 않고 중소 규모의 길드를 털어 아이템을 빼돌리는 사태는 종종 발생했다.

최근 지호는 청람 경매장에서 아이템을 잔뜩 사들였으니 길드 털이범의 먹잇감으로 딱 알맞았다. 그래서 오늘도 길드를 나오며 보안 장치에 더 신경을 기울였던 거다.

이대로 마주친다면 자칫 잘못하다가 전투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잠시 고민하던 지호는 단말기로 긴급 메시지를 보내 신고하고, 상대를 직접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지호의 스킬은 지금 모두 보조계로 전환되어 전투에 유리한 상황은 아니다. 그래도 1년간 전투계 헌터로 활약한 만큼 전투의 요령은 남아 있다.

반면에 길드 털이범은 대부분 전투 능력이 변변찮다. 전투 능력까지 갖춘 각성자라면 도둑질을 하는 대신 길드와 계약했을 테니까. 비교적 만만한 상대다.

최소한 시간 벌이 정도는 문제없을 것이다.

지호는 인벤토리 포켓에서 스태프 대신 무기를 꺼냈다. 얼마 전 경매장에서 구한 총이었다. 화약으로 된 탄환 대신 마력을 충전한 탄환을 쓰는 물건인데 대단한 위력은 아니어도 견제용으로 쓰긴 딱이었다.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내려갔다. 상대에게 발각되지 않을 만한 위치에 선 지호는 아래쪽 비상계단을 훔쳐보았다.

아래층 계단에서부터 사람이 서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사람은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라는 평범한 차림새였다.

길드 털이범이라면 적어도 얼굴은 가릴 텐데. 설마 그냥 행인인가?

지호는 경계를 완전히 늦추지는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세요?”

지호의 질문에 상대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저기요?”

한 발을 계단에 올리고 다른 발은 여전히 아래쪽에 걸쳐진 부자연스러운 자세 그대로 상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오싹한 느낌이 들어 지호는 총을 들어 겨눴다.

“여긴 노네임의 길드 사무실이고 업무 시간은 끝났습니다. 돌아가세요.”

“찾, 았, 다.”

묘하게 어눌한 발음으로 중얼거리며 상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호와 마주한 두 눈이 성취감으로 반짝였다. 씩 웃는 순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던 형태가 변이했다.

눈이 흰자위 없이 온통 새카만 빛으로 물들었다. 조금 전까지는 평범한 사람의 살결이었던 피부가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질거렸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지호는 상대가 몬스터라는 판단을 내리자마자 총을 쐈다. 그러나 몬스터는 총에 정통으로 맞고도 아무런 데미지가 없었다. 지호는 다음 공격을 이어 가는 대신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휘익-

쿵.

머리 위로 섬뜩하리만치 빠르게 무언가가 지나갔다. 지호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로 피했다.

피해 내고 나서야 확인한 것은 상대의 길게 늘어난 팔이었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길게 늘어난 팔은 지호를 빗나가 벽에 박혔다.

그러나 적의 움직임이 봉쇄됐다고 안심할 틈은 없었다.

상대는 힘이 셌다. 벽을 뚫었던 팔은 그대로 벽에 박힌 채,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것처럼 지호를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이번에는 재빨리 피하면서 몬스터의 팔 쪽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윽!”

지호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주먹을 거뒀다. 빠르게 움직이는 팔을 가격했지만 충격을 받은 쪽은 지호였다. 어지간히도 단단한지 지호의 공격은 들어가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

‘아. 빌어먹을…….’

판단 실수다. 신고하고 길드 안으로 대피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길드로 직접 몬스터가 찾아와 습격하는 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에서 몬스터가 자유롭게 활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은 인구 대비 각성자가 제일 많은 나라고, 그만큼 균열이나 몬스터와 관련된 치안이 안정되어 있다.

이미 발생한 균열은 헌터 협회에 의해 감지되어 몇 시간 안에 정리된다. 헌터 협회에서는 마력의 흔적을 추적해 빠져나간 몬스터까지도 반드시 소탕한다. 흔적 추적에 실패하더라도 독특한 형태를 지닌 몬스터는 쉽게 사람의 눈에 띄니 오래 지나지 않아 사살당한다.

하지만 이 몬스터는 완벽한 인간형이었다. 변이하기 전까지는 인간과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재운이 미튜브에서 보여 준 그 영상이 가짜나 조작 따위가 아닌 진실이었다니. 평범한 인간처럼 활보하는 몬스터가 존재한다면 사회는 다시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안 되는데…….’

적어도 이런 위험한 몬스터가 거리를 활보한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알려야 할 것 같은데.

‘저기, 오늘 길드장님 운세가 안 좋으신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꼭, 오늘은 무리하지 마시고 일찍 들어가 푹 쉬세요. 꼭이요.’

호진이 했던 말이 뒤늦게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점괘도 무시하지 말고 귀담아들을 걸 그랬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몬스터의 기다란 팔은 이미 지호의 왼쪽 가슴을 관통해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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