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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체불명의 무언가(7) (34/283)
  • 4. 정체불명의 무언가(7)

    임승주가 신지호를 싫어하는 만큼, 신지호도 임승주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지난 1년간 미움받고 구박받고 눈치받으며 생긴 설움이 뒤늦게 올라왔다. 그동안 미튜브의 고양이 동영상으로 치유 받았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임승주는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당황한 얼굴로 얼어붙었다. 어지간히 당황한 게 아닌지 이마에 땀까지 맺혔다.

    평소라면 ‘됐어요’라며 얼버무려 줬을 지호지만 이번에는 생글생글 미소 지은 채 답을 기다렸다.

    초침이 몇 바퀴쯤 돌았을 때 임승주가 움직였다.

    허리를 90도로 접어서.

    “지금까지 제가 길드장님께 불온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그야말로 길드장실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다란 사과.

    지호는 진심으로 놀랐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무슨 조폭처럼 각 잡힌 폴더 인사를 받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지호는 목청도 큰 승주의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갔을까 두려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들으면 안에서 지호가 승주를 잡는 줄 오해할 소리였다.

    “두 번 다시 길드장님께 불온한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저 인간의 입부터 틀어막아야겠다.

    “아,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지호가 붙들자 승주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야말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이 지나치게 강렬한 눈빛을 마주한 지호가 움찔했다.

    정확하게 종류를 알 수 없는 감정을 속에서 불태우며 승주가 지호의 한 손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A급 헌터의 악력이 뜨겁고 아프게 지호의 손을 옥죈다. 하지만 아프다는 말도 하지 못할 만큼 분위기는 진지했다.

    “그날, 길드장님이 써 주신 그 스킬.”

    “네, 네?”

    “반했습니다.”

    임승주는 낮은 목소리로 비장하게 말했다.

    “…….”

    저런 말에는 주어를 넣어 줬으면 좋겠다.

    이 인간, 그동안 안 친해서 잘 몰랐는데 은근히 급발진하는 성향이 있구나.

    “평생 따르고 싶습니다.”

    “알겠으니까 목소리 좀 낮춰요. 밖에 다 들리겠어요.”

    지호는 승주를 붙잡아 길드장실 한쪽에 있는 소파로 데리고 갔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한 지호는 밖으로 나와 시원한 아메리카노와 달콤한 프라푸치노를 한 잔씩 사 왔다.

    길드 사무실로 돌아오니 진정하라고 한 게 무색하게도,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는지 목까지 새빨간 임승주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지호는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아메리카노와 프라푸치노를 내려놓고 먹으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승주는 자연스럽게 프라푸치노를 가져갔다. 지호가 움찔하는 걸 보지 못한 승주는 한 입 시원하게 마셨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빨대에서 입술을 뗐다.

    “이거 너무 달게 만든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그야 내가 먹으려고 시럽을 더 추가한 거니까…….’

    사무실에서는 아메리카노를 자주 마시기에 아메리카노로 사 왔더니 프라푸치노를 고를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메리카노에 시럽이라도 넣어 올걸. 지호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쓰다.

    지호는 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간신히 폈다.

    어쩌겠는가, 이런 것도 길드장의 고충이겠지. 체면을 위해 맛있는 척 맛도 없고 쓰기만 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호는 승주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시럽을 어마어마하게 때려 박은 프라푸치노를 마신 승주의 얼굴색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호는 몇 모금 마시다 만 아메리카노를 내려놓고 물었다.

    “노네임에 남겠다는 건 제 스킬을 받고 싶기 때문인가요?”

    “아뇨, 그런 건…….”

    “맞잖아요. 반했다면서요.”

    “…….”

    승주는 끝까지 부정하지 못했다. 그야 그렇겠지. 그 스킬을 받고 나서부터 임승주의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으니까.

    지호도 한때 전투계 헌터였던 만큼 그 심정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조금 더 강해지고 싶은 욕망은 목숨을 건 전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라나니까. 게다가 임승주는 호승심이 꽤 강한 편이기도 했고.

    “하지만… 정말로 스킬만 보고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노네임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건 맞지만 중도에 계약을 파기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도 이 길드를 운영하며 책임감이 생기기도 했고요. 물론 길드장님께 처음에 약간의 편견을 가진 건 맞지만… 열심히 하시는 걸 봤으니까 오해는 금방 풀렸습니다. 길드장님께서 워낙 성실하셨잖습니까.”

    “아니……. 굳이 입에 발린 말 안 해도 되는데요.”

    “정말입니다. 제가 길드장님께 무례하게 굴었던 건…….”

    임승주는 말할 용기가 필요한지 프라푸치노를 쭉쭉 마셨다. 한 번에 반 이상 마신 승주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길드장님이 쓰러지실 때마다 제가 남은 일을 모두 떠맡으면서 계속 야근을 하다 보니 좀…….”

    “아.”

    “죄송합니다, 제가 감정적이었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이해했다.

    지호도 의욕 넘치는 길드장이지만 월요일이 오는 건 싫고, 출근하기 싫을 때도 많다.

    대충 계약 기간이나 채우려고 다니던 승주의 입장에서 잦은 야근이 얼마나 짜증 났을까.

    지호도 변명할 말은 있다. 사무직에 특화된 각성자는 일반 기업에서도 선호하니 노네임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각성자 외의 직원을 뽑자니, 줄줄이 지호의 뒤를 캐려는 기자 따위가 섞여 들어왔다.

    안 그래도 피곤한 일투성이인데 길드 내부에서까지 경계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그냥, 맘 편하게 아예 뽑지 않았다.

    대신 일을 길드장인 지호와 호의적인 소리, 부길드장인 승주 셋이서 맡아 했는데…….

    직위상 일반 길드원인 허소리가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소리의 직위를 올리는 건 안 그래도 편애니 뭐니 말 나오던 길드에 불붙이기 딱 좋은 짓이었다.

    결과적으로 중요한 일은 지호와 승주, 두 사람만이 할 수 있었는데…….

    승주에게 시키기 힘들어서 지호가 상당량을 떠맡고 있었지만, 쓰러진 날에는 그게 고스란히 승주의 몫으로 돌아간 거다.

    하기 싫었겠지. 이해한다. 지호도 매번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지호의 표정을 달리 생각했는지 승주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다 예전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제가 알아서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알겠으니까 진정해요.”

    지호는 또다시 목소리가 빨라지고 커지는 승주를 만류했다. 승주는 뭐라도 빨리 해명하고 싶은 사람처럼 초조하게 굴었다. 지호는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하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니, 물론 저도 임승주 헌터를 내쫓고 싶진 않아요. 실력 좋고 유능한 A급 헌터잖아요? 길드에 대해서도 잘 아는 부길드장이고요. 임승주 헌터가 잔류한다는데 내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네. 그러면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사무직 직원은 원래부터 더 뽑을 생각이었으니까, 서류 처리는 그쪽에서 전담하도록 할게요. 일단 며칠만 더 고생해 주시고요. 앞으로는 균열이나 던전 공략 쪽에 집중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승주가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지호는 말리는 걸 포기하고 그러려니 했다. 밖에서만 저러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저, 그러면…….”

    임승주가 빨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러나 지금까지 승주의 용기를 보충해 주던 프라푸치노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호는 자신이 마시던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빼내고 승주에게 내밀었다. 먹기 싫어서 준 건데 승주는 꽤 기쁜 얼굴로 아예 컵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시원하단 얼굴로 입을 뗐다.

    저렇게 아메리카노를 잘 마시면서 왜 프라푸치노를 가져간 거야? 잠시 울컥하려던 지호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그동안 야근하며 빡쳤을 승주의 마음에 공감해 보며, 지호는 최대한 자비로운 길드장처럼 보이도록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승주가 당황했다.

    “어, 어어……. 왜 저한테 미…….”

    “미?”

    “……아닙니다.”

    미이, 하고 무언가 단어가 더 이어지려는 것 같았는데. 승주는 아예 입을 다물었을 뿐더러 지호의 시선까지 피해 버렸다.

    아메리카노 두고 프라푸치노 먹은 놈이라고 짜증 낸 게 티가 났나?

    지호는 몸을 쭉 빼서, 옆 소파에 앉은 승주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근래 검을 쥐어서 그런가, 아니면 원래 야구 선수 지망이어서 그런가……. 지호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한 손을 지호는 양손으로 꼭 붙들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아쉬운 거 있으면 오늘 그냥… 다 털어 내고 평범한 길드장과 부길드장 사이로 지내자고요.”

    “평범한 길드장과 부길드장 사이……. 네, 그렇지요.”

    어째서인지 굉장히 복잡한 심정을 담은 듯한 한숨을 내뱉은 승주가 슬금슬금 지호의 손안에서 제 손을 빼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양 뺨을 짝, 소리 나게 내리쳤다.

    지호는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와 승주의 말을 기다렸다. 뺨을 내리쳐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빨개진 얼굴로 승주가 비장하게 무릎을 꿇었다.

    “아니, 이런 거 하지 말라니까요?”

    “그럼 저,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함께하고 싶습니다.”

    “네? 뭘… 데려가요?”

    “훈련소 말입니다. 요새 허소리 헌터와 양호진 헌터가 매일같이 출근하는…….”

    “아.”

    태평한 지호의 말에 승주가 울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이 촉촉해지는 것을 보며 지호는 몹시 당황했다.

    “그때 방어전에 참여한 건 저도 마찬가지인데, 왜 저만…….”

    “아, 알겠어요. 같이 가요. 내일부터는 훈련소로 출근해요.”

    점점 높아지는 승주의 목소리에 지호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리고 승주를 다시 제자리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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