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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체불명의 무언가(6) (33/283)

4. 정체불명의 무언가(6)

양호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말로 보였을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지호가 남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건 없으니까.

“믿지 않으셔도 이해해요. 제가 지금까지 남을 위해 뭘 한 건 없죠.”

“아, 아뇨! 그렇게 생각한 건 절대 아닌데… 그냥, 그냥 놀란 거예요.”

“뭐가요?”

“보통은 자기 이득이 제일 우선이잖아요……. 특히 제가 봐 온 다른 헌터 분들은, 사실 돈, 이 우선이시고……. 아,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냥 그렇다고요. 보통 그게 목적인데, 저도 그렇고요…….”

지호는 담담하게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호진을 힐끗 보았다.

아직 호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가 자신을 설명하는 것과 달리, 호진 역시 자신의 안위를 우선으로 따지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길드도 지호 때문에 가입했다고 했고.

다른 목적이 더 있을 것 같지만… 거기까지 지적하는 대신 지호는 얌전히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길드장님은… 옆에서 조금 지켜봤을 뿐이라 이, 이런 소리 하는 거 주제넘지만…….”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무슨 생각이든 편하게 해요. 너무 심한 욕만 아니면 다 괜찮아요.”

“욕할 리가 없잖아요……. 어, 어쨌든, 길드장님은 지켜보면 돈 때문에 길드 운영하시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거든요. 그래서 전 사실, 길드장님이, 명예 회복? 이런 거 노리면서 헌터 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네. 뭐…….”

지호는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괜히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았나, 뒤늦게 후회도 됐다. 물론 양호진에게 한 말은 온전한 진심이지만.

빨개진 지호의 귀 끝을 응시하던 호진이 입을 열었다.

“저, 제가 이래 봬도 사람 많이 만났거든요? 사람 보는 눈이 조금… 있어요.”

“아. 그렇구나.”

“……안 믿으시는 거죠?”

솔직히 안 믿긴다.

지호는 딱 잘라 대답하는 대신 애매하게 웃었다.

“아니, 양호진 헌터는 어리시니까……. 저도 어린데, 그보다 더 어리시잖아요.”

지호와 비슷한 나이이니 사람을 만나 봤자 얼마나 만났겠는가? 믿지 못하는 지호의 반응에 호진이 가볍게 쑥스럽게 웃었다.

“근데 진짜, 제가 생각보다 많이 만나 봤거든요……. 이상한 사람은 딱 보면 알아요.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참, 많죠. 물론 좋은 사람도 많지만요……. 길드장님처럼.”

“전 그 정도까지는…….”

“겸손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크게 소리쳤던 호진의 얼굴이 이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저, 치, 칭찬한 거니까……. 길드장님이 계속 그런 식으로 좋게 생각하시면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아, 그… 네. 그래야죠.”

눈을 빛내며 말하는 호진에게 지호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직 5월 중순인데 차 안이 무척 덥다. 괜히 에어컨을 켜면서 지호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고 화제를 돌렸다.

최근의 훈련 상황이나 허소리의 상태 따위를 말하다 보니 길드와 훈련소가 그리 먼 것도 아니라 금방 목적지인 호진의 집에 도착했다.

호진은 처음 차에 탔던 때보다 훨씬 상기된 얼굴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오늘 감사했습니다, 길드장님.”

“네. 내일 또 봐요.”

“아. 그리고요, 길드장님…….”

“왜요?”

“저기, 오늘 길드장님 운세가 안 좋으신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꼭, 오늘은 무리하지 마시고 일찍 들어가 푹 쉬세요. 꼭이요.”

지호는 진지하게 말하는 호진을 다소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지 스킬이 있나요?”

“아뇨, 그냥 취미로 보는 점입니다. 그런데 잘 맞아서요.”

“아아, 네…….”

“흘려듣지 말고 귀담아들어 주세요.”

지호는 성의껏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닫고 인사하는 호진에게 고개를 까딱이고 차를 돌리며, 지호는 호진이 별걸 다 믿는다고 생각했다.

원래 지호는 점괘 따위를 믿지 않는다.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찾아가 만난 무당은 지호의 운수가 엄청나게 좋다고 떠들어 댔다.

청람이 잘된 건 지호 덕분이고, 앞으로도 지호 덕에 더 잘될 거고, 지호 역시 좋은 운을 끌어들여 승승장구할 거라고 했다.

결과물은 어떤가.

잘 굴러가던 청람의 주가를 잠시나마 바닥에 처박고, 모기업이든 길드든 지호 때문에 매번 발목 잡히고, 지호 역시 승승장구와는 거리가 아주 먼 삶을 살았다.

‘아니, 지금부터는 승승장구할 수도 있나?’

문득 떠오른 생각이 어이없어서 지호는 혼자 피식 웃었다. 점괘란 건 듣는 사람이 믿고 싶은 쪽으로 끼워 맞출 뿐이다.

‘내가 노력해야지.’

지호가 좋은 운수를 타고난 건 사실이다. 좋은 집에서 태어났고, 이제는 새로운 스킬까지 얻었으니.

이제는 있는 힘껏 노력할 일만 남았다.

“그러려면 일단… 일을 해야지.”

오늘도 야근 각이다. 호진의 말대로 일찍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지호는 곧장 길드 사무실로 돌아갔다. 길드장실로 들어가서 잔뜩 쌓인 서류를 처리할 준비를 하는데 부길드장인 임승주가 뭔가를 들고 찾아왔다.

“아폴론 길드에서 온 자료입니다.”

“아, 고마워요.”

며칠 전 선태웅에게 부탁했던 자료가 이제 도착했나 보다.

아무래도 약간의 보안이 필요한 자료라 메일로 첨부하는 대신 마력 봉인이 된 채로 도착했다. 지호가 미리 들어 둔 패턴대로 마력을 주입해 봉인을 풀었다.

자료는 기대보다 양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선태웅이 준 자료답지 않게 꼼꼼했다.

선태웅이 딱히 책상에 앉아 얌전히 서류 작업할 이미지는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부길드장인 선태희의 손길이 닿은 자료 같았다.

길드장과 부길드장의 손을 거친 자료.

아폴론은 길드 차원에서 노네임과 협력하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여러모로 만족스럽게 자료를 뒤집어서 내려 두는데 임승주가 바로 나가는 대신 물었다.

“혹시 무슨 내용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임승주를 쳐다봤다. 늘 하던 일만 처리하던 승주가 먼저 지호에게 시키지도 않은 일에 관해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

잠깐 놀랐던 지호는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길드원 영입 좀 하려고요. 아시다시피 이번에 길드원 구성이 상당히 바뀔 것 같으니까.”

“길드원 영입이요?”

“네. C급 이하라면 구하기 쉽겠지만 B급이나 A급은 구하기 힘들잖아요. 올 만한 사람 있으면 이쪽에서 먼저 찔러볼까 하는데,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알고 있으면 협상하기 좋잖아요?”

지난번 선태웅에게 부탁한 자료는 새 길드원 후보 명단과 대략적인 정보였다.

아폴론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팀 단위로 다른 길드에 지원 나가는 일이 잦은 길드다.

선태웅의 능력은 화염. 던전 속성에 따라 S급 헌터만큼의 화력을 뽑아낼 수 있다 보니 수요가 넘쳤다.

주로 한국의 길드와 협력하는 선태웅은 헌터계에서 무척 발이 넓었다.

그래서 선태웅에게 노네임에 관심을 보일 만한 헌터에 관해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청람의 정보망을 빌려도 되겠지만… 너무 손 빌리고 싶지는 않아서. 훌륭하게 독립해 보겠다는 누나와의 약속도 있고, 조금이라도 주이원을 따라잡으려면 청람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청람에 의지해서야 노네임은 물론이고 신지호도 자립할 수가 없다.

물론 조금 더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하기 위해 지호가 먼저 S급으로 승급한 이후에 접촉하게 되겠지만. 일단 태웅이 준 자료를 기반으로 알아볼 수 있는 선에서 더 알아보고 목록을 추릴 예정이었다.

오늘도 일이 많겠다고 생각하며 서류를 훑어보던 지호는 방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펜을 든 채 힐끗 고개를 든 지호는 승주의 충격받은 얼굴을 마주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물갈이할 헌터에 저도 포함됩니까?”

진지한 질문에 지호는 하던 일을 밀어 두고 임승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임승주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신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일까. 지호는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임승주 헌터는 아직 계약 기간이 2년 남은 거로 아는데, 혹시 나가고 싶은 건가요? 위약금은 물어야겠지만 보내 줄 수 있…….”

“아뇨, 아닙니다. 나갈 생각 없습니다.”

지나치게 단호한 대답이 의외라서 지호가 살짝 인상을 썼다. 원래 노네임 길드에 마음이 없다는 티를 팍팍 내던 임승주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확고하게 변했을까.

물론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지만…….

지호는 승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 돌리지 않고 직구로 물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나요? 임승주 헌터는 나도 싫어하고 우리 길드도 싫어했잖아요.”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는지 임승주가 당황했다.

그야 지금까지는 말만 길드장과 부길드장이지 임승주가 갑에 가까웠다.

지호는 승주에게 단 한 번도 속 시원히 제 본심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안 했다기보다는 못 했다.

하지만 이제는 임승주의 존재가 예전만큼 절실하지는 않았다. 물론 임승주를 잡아 두면 좋겠지만 이전처럼 대체 불가는 아니니까.

“길드를 싫어한 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임승주는 민망한지 괜히 큼, 헛기침을 했다.

“원래 저는 던전을 공략하고 싶었습니다.”

“음, 확실히 던전을 공략하는 게 돈이 되긴 하죠.”

“돈 때문이 아니라……. 균열에서 나오는 몬스터만 처리해서는 제 실력을 키울 수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긴 하죠.”

던전 밖에서 싸우는 건 제한이 많다.

예측하지 못한 균열이 발생하면 최대한 도시의 파괴를 피하면서 싸워야 하고, 예측한 균열이라고 해도 결계 술사의 결계가 파괴되지 않도록 힘을 조절해야 한다.

무엇보다 균열에서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만약 나온다고 해도 그건 청람이나 하늘 같은 거대 길드의 몫이지 노네임의 몫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 공략한 후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던전이라면 마음껏 힘을 쓸 수 있다. 강한 몬스터도 얼마든지 있고, 그것들을 상대하며 실력을 쌓기도 쉬웠다.

균열 사태가 발발한 지 3년.

오랫동안 싸워 온 헌터 중에는 처음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평가를 받는 헌터도 꽤 있었다. 등급이 오를 정도로 확연하게 강해진 헌터는 아직 없었지만 언젠가는 나오리라고 보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이제 던전 공략도 하실 것 아닙니까.”

“네. 그럴 생각이죠.”

지호가 길드를 개편하는 것을 가까이서 본 부길드장이라면 앞으로의 계획을 모를 수가 없다. 지호가 간단하게 수긍하자 승주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제 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 노네임에서 던전 공략을 함께해 나가고 싶습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질문에 다 대답하신 건 아니잖아요?”

지호가 웃는 낯으로 지적했다.

“던전 공략을 하고 싶으면 다른 길드에 가도 되잖아요. 굳이 우리 길드를 고집하지 않아도 더 좋은 길드가 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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