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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체불명의 무언가(4) (31/283)

4. 정체불명의 무언가(4)

지호가 생각하는 사이 이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걸쳤다. 예전에 집에서 입던 추리닝과 티셔츠를 주워 입는 주이원의 태도는 퍽 느긋했다.

옷을 모두 갈아입은 이원은 여전히 침대에 앉아 있는 지호에게 턱짓했다.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지호는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시침은 7시와 8시 중간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 밥 먹고 가게? 안 늦어?”

“늦어도 상관없어.”

태연한 이원의 태도에 지호가 기함했다.

“상관없긴 뭐가 상관이 없어? 너, 중국 가야 하잖아.”

오늘은 주이원이 중국의 S급 던전 공략을 지원하러 가는 날이다.

각국에서는 본국의 헌터만으로는 처리하기 힘들거나 위험성 높은 던전이 있을 때 종종 이원에게 공략 요청을 보냈다.

비록 이원이 던전에서 나오는 아이템을 일정량 가져간다는 리스크가 있지만 귀한 S급 헌터를 잃는 것보단 낫기 때문이다.

덕분에 SS급으로 어느 던전이든 여유롭게 공략하는 이원의 수요는 늘 넘쳐났고 항상 바빴다. 지호의 앞에서는 항상 백수처럼 굴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이원은 지호의 말에 묘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아네.”

“네 행적이야 워낙 유명하고…….”

“하루 단위로 바로바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걸.”

“어쨌든, 안 바쁘냐고.”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이원이 픽 웃었다.

“괜찮아. 황혜림 씨가 중국 쪽에 볼일이 있다고 동행해 주기로 해서.”

“아.”

황혜림은 국내에 네 명 있는 S급 헌터이자, 세계에서도 드문 이동 술사였다.

사실 전투 능력은 S급에 못 미치지만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이동 술사이기에 스킬의 특이성을 인정받아 S급으로 판정받았다.

확실히 황혜림의 능력이라면 길어야 십여 분 안에 중국에 도착할 수 있다. 오늘 주이원이 던전 공략에 들어가는 시간은 11시니, 황혜림이 동행한다면 시간은 여유로웠다.

그러고 보면 황혜림은 주이원과 함께 다니는 일이 많았다.

황혜림의 능력은 유용한 데다 독보적이어서 타국에서 노리는 일이 잦았다. 황혜림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호위도 있지만 가장 강하고 안전한 경호원은 주이원이기 때문에, 해외로 나갈 때 두 사람은 자주 동행했다.

그러고 보면 둘이 스캔들도 몇 번 났던 것 같다. 극구 부인한 데다 공적인 자리 외에 사적인 자리에서의 만남은 전혀 없어서 뜬소문으로 끝났지만.

……하지만 공간 이동이 가능한 황혜림이라면 집으로 찾아가 주이원을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두 사람이라면 이원의 일정을 다 꿰고 있는 신지혜를 피해서라도 만날 수 있다. 황혜림이 주이원에게 공간 이동으로 찾아가면 그만이니까.

게다가 주이원의 능력은 카피. 황혜림의 능력과는 상성이 잘 맞지 않아 온전히 카피할 수 없었지만, 이원 역시도 약간의 공간 이동 정도는 가능했다.

비밀 데이트를 하기에는 최적의 상대다.

“지호야?”

“왜.”

“황혜림 씨랑 나, 사귀는 사이 아니야.”

이원은 지호의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지레 찔린 지호는 아무 생각하지 않은 척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생각 안 해. 그리고 둘이 사귀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긴. 자기야, 지금 엄청 신경 쓰고 있잖아.”

“아니거든.”

“난 연상 안 좋아해. 동갑 좋아하거든?”

“어쩌라고.”

지호는 사납게 쏘아붙이고 방을 나왔다.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용케 눈치채고 부득불 부정하는 게 더 수상했다.

지호는 혜림과 이원이 나란히 서 있던 어느 기사의 사진을 떠올렸다. 신문에 나온 기사 사진임에도 마치 화보처럼 멋스러워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던 사진이다.

키가 크고 늘씬한 미인인 혜림과 누가 봐도 이의 없을 미남에 남들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큰 이원은 누가 봐도 잘 어울렸다.

“…….”

지호는 자꾸 떠오르는 잡생각을 몰아내기 위해 뺨을 짝, 소리 나게 쳤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추측만으로 괜히 두 사람의 사이를 오해하긴 싫었다. 주이원은 둘째 치더라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 황혜림에게 실례다.

방으로 돌아와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쓸데없는 생각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지호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고 시간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침 8시.

일찍 일어나 가볍게 산책을 한 부모님이 아침 식사를 하는 시간이다. 부모님의 맞은편에 주이원이 앉아 있기에 지호는 이원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엄마는 요새 잘 자. 지호도 잘 잤구?”

“네, 오랜만에 집에서 자니까 좋네요. 아빠도 잘 주무셨어요?”

“……그래.”

아버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심기가 불편한 티를 다 감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안색이 별로 안 좋아요, 아빠. 건강 검진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다. 괜찮아.”

무뚝뚝하게 말한 신중호는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보통 집에서 식사할 때는 조용히들 먹는 편이다. 어제는 정기적인 모임이라 만찬을 즐기며 이야기하면서 먹은 거지.

조용한 식사 자리는 지호에게 익숙했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지호 또한 입을 다물고 얌전히 식사를 시작했다.

최근 들어 바빠서 아침은 샌드위치 따위로 때웠는데 뜨끈한 국물에 정갈한 한식을 먹으니 입맛이 돌았다. 지호가 조용히 밥 한 공기를 거의 해치웠을 무렵,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지호야.”

“네?”

“아버지가 자리 마련해 줄 테니, 선 한번 봐 봐라.”

“……선이요?”

갑자기?

너무 당황하면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던데, 지금의 지호가 딱 그랬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머릿속이 완전히 새하얘졌다가, 세 사람의 시선이 제게 모이는 걸 느끼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 나이에 선이라니.

지호의 나이는 아직 스물네 살. 최근의 결혼 평균 연령과 비교하면 한참 낮은 나이다.

게다가 형과 누나 모두 자유로운 연애결혼을 했다.

그러니 부모님이 자신의 결혼에 터치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선을 보라니, 솔직히 싫었지만 지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 필요하시면 할게요.”

예전이라면 무슨 소리냐며 반발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1년 전, 지호의 등급에서 시작된 논란은 청람의 부정부패까지 번졌다. 기업을 투명하게 경영하던 아버지는 순식간에 부패한 재벌로 불리며 증거 없는 논란에 휩쓸렸다.

당시 떠돌던 수많은 루머는 이제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한 번 뇌리에 박힌 인식이 완전히 없어지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호에게 무척 죄스럽게 남은 기억이다. 평생 저를 아끼고 사랑해 준 부모님을 걱정시키고, 평생 노력해 온 가치를 한순간에 진흙탕에 구르도록 만들었으니까.

지호가 헌터 일에 아득바득 매달린 이유 중 하나가 그때의 루머를 완벽하게 정정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물론 부모님은 원치 않으셨지만.

여러모로 속을 썩인 불효자식이다. 제 인생에 정략결혼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필요하다면 기꺼이 따를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

지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이원 쪽을 돌아보았다.

순간적이지만 이원에게서 무시무시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각성자라 마력을 예민하게 느끼는 지호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뭔가 위화감을 감지했는지 몸을 움찔거렸다.

“너 지금 뭐…….”

“어머, 이이 좀 봐. 애기 나이가 몇인데 선을 보라고 하는 거예요?”

지호가 이원에게 제대로 따지기 전에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게다가 어머니야 조금 전에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모르니 타박은 온전히 선 얘기를 꺼낸 아버지에게만 향해 있었다.

어머니에게 한 대 얻어맞은 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니, 이 양반아. 왜 가만히 있는 애를 몰아세워요? 몰아세우긴.”

어머니가 아버지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이내 신중호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서렸다.

그들 또한 지호의 죄책감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 헌터 일을 계속하겠다며 고집부리는 것 외에는 뭐든 싫어도 순순히 따르리라는 것 또한.

“아니, 강요하는 게 아니라……. 요새 애들 만나고 그러는 거, 한번 권유해 보려고 했지. 선이 아니라, 그, 요새 뭐라고 하지. 어쨌든 젊은 애들끼리 한번 만나 보라고. 너 잘생겨서 좋다는 애 많다더라. 내 친구들도 너 사위 삼고 싶다고 난리다, 난리.”

뒤늦게 아버지가 설명을 덧붙였다.

보아하니 소개팅 수준의 이야기가 뭔가 과장된 모양이었다. 지호는 그제야 안심했다.

“꼭 해야 하는 거 아니면 죄송하지만 그냥 거절할게요. 저, 지금은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요.”

“없어?”

“네. 사실 지금 그런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요. 더 중요한 일이 훨씬 많은데요.”

그동안 B급 비리 헌터라고 불리던 평가를 뒤집을 수 있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연애에 허비할 시간 따위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사실 지호는 연애에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해야 한다며 수많은 고백을 거절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역시 수많은 고백들을 거절해 왔다.

경험이 없으니만큼 연애에 대한 지호의 환상은 더욱더 커졌다.

원래도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잘 대해 주는 지호다. 친한 사람은 더욱 각별하게 생각했고, 아직 있어 본 적은 없지만 애인은 더욱 정성스레 아껴 줄 것이다.

고백도 멋있게 하고, 데이트도 상대가 좋아하는 곳으로 데려가고, 매일 연락하고, 커플링도 맞추고, 잘해 줘야지. 경험해 보지 못한 채 환상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러니 이 시점에 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은 일을 1순위로 놓고 그쪽에 온 힘을 쏟을 생각이었으니까. 안정되고 애인을 챙겨 줄 여유가 생기면 그때야 연애란 것을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어째서인지 이원과 지호를 번갈아 보다가 인자하게 웃었다.

“으응, 그렇지. 우리 아기가 아직 연애하기엔 좀 이르지? 차차 맘 맞고 좋아하는 상대 생겼을 때 연애하면 되는 거지.”

어머니의 말이 뭔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린 아버지가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래도 서로 마음이 맞아야 연을 맺는 거지. 상대가 좋다고 한 적도 없는데, 응? 밀어붙이고 그러면 못쓰는 거야. 그것들은 아주 저열한 놈들이라고.”

“아이……. 애들 알아서 하겠죠.”

눈을 깜박이던 지호는 대충 감을 잡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이원이 자꾸 이상한 장난질을 쳐서 지호와 엮이니까 꺼낸 말 같다. 아예 그런 말이 안 나오도록 지호에게 진짜 여자 친구를 붙여 주고 싶으셨던 건가 보다.

그건 그냥 어릴 때부터 해 온 장난인데.

힐끔 이원을 쳐다보자 그 역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레 눈썹을 쓱 올리고는 다시 식사하기 시작했다.

‘다음엔 목을 비틀어서라도 그런 인터뷰는 못 하게 해야지.’

물론 SS급인 주이원의 목을 신지호가 비틀기는 불가능하겠지만……. 하여간 쓸데없이 기운 빼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지호 또한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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