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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체불명의 무언가(3) (30/283)
  • 4. 정체불명의 무언가(3)

    그러나 지호가 이원의 뒤를 따라가려던 그때.

    “주이원.”

    아버지가 제법 심각한 얼굴로 이원을 불렀다.

    이원은 지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이곤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아버지는 잔뜩 헛기침하며 이원과 함께 방으로 쏙 들어갔다.

    결국 지호는 방에 들어가는 대신 거실에 앉아 이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이원은 나오질 않았다.

    언제 끝나냐고 물어볼 분위기도 아닌 것이, 방 근처로 갔을 때 안에서 험악한 아버지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 녀석이 누구한테 지금 개수작을……!” 따위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 특정인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사정 모르는 지호가 함부로 끼어들 순 없었다.

    지호가 초조하게 기다리던 때,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재운이 다가왔다.

    “삼촌, 뭐 해?”

    “주이원이 정보 준대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부르셔서. 기다리는 중인데……. 모르겠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네.”

    덩달아 심각해진 지호는 초조하게 문 쪽을 힐끔거렸다.

    “둘이 무슨 얘기 하는 거지? 주이원 잔뜩 깨지는 것 같던데.”

    걱정스러운 지호와 달리 재운은 태평했다.

    “그 형이 어디 가서 깨질 성격이야? 남의 뚝배기를 깨면 깼지.”

    “그렇지. 하지만 아버지 머리를 깨진 않겠지…….”

    주이원은 딱히 인성이 개차반인 놈도 아니고, 개차반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키워 준 아버지 같은 존재에게 대들 성격은 아니었다. 지호의 반응에 재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야 할아버지 머리를 깨진 않겠지만, 할아버지한테 어그로는 끌 것 같은데.”

    “걔가 아빠한테 어그로 끌 일이 뭐 있어?”

    “형이랑 삼촌 사이 할아버지만 눈치 못 챘었으니까. 할아버지가 삐진 거지.”

    대체 이게 뭔 헛소리인지. 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식탁에서 형이 재운에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상한 소리만 한다고 타박하더니만 괜한 한탄이 아니었다. 불쌍하다고 편들어 주지 말고 같이 타박할걸.

    “그야 주이원이 장난치면서 맨날 하던 소리고……. 그놈의 미튜브 좀 그만 봐라. 걔가 또라이긴 해도 아빠한테까지 그런 농담할 또라이는 아니야.”

    “삼촌, 그 형은 또라이가 맞아…….”

    “주이원한테 네가 또라이라고 했다고 말한다.”

    “아, 안 돼.”

    역시 예상대로 주이원에게 용돈을 쏠쏠하게 받고 있었던 건지 재운은 극구 지호를 말리기 시작했다.

    거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릴 기세였던 재운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나서야 건방진 조카는 집에 돌아가겠다며 헤실거리면서 떠났다.

    다른 가족들이 떠나고 지호는 조금 더 멀거니 서서 기다리다가 결국 위층으로 올라왔다.

    여기서 출근해도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니 오늘 하루쯤은 여기서 자고 갈 생각이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지호는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베개에 기댄 채 하품을 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지호는 어느덧 11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일 이원은 해외로 출장을 나간다. 아무리 SS급이라지만 늦게 자면 피곤할 텐데. 너무 붙들고 있는 아버지가 야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이대로 기다리다간 일단 지호부터가 맥없이 잠들 것 같다. 매일 열심히 일하다가 배불리 먹고 느긋하게 쉬었더니 오히려 더 몸이 축축 늘어졌다.

    잠시 고민하던 지호는 바로 옆의 이원의 방으로 들어갔다.

    눈에 익은 방이다. 그야 오랫동안 같이 한집에서 살았으니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방 내부 작은 거실의 장식장에는 어머니가 정리해 둔 상장과 트로피가 가득했다.

    SS급 헌터는 떡잎부터 달랐던 건지, 어릴 적부터 이원은 공부는 물론이고 손대는 운동마다 기가 막히게 잘했다. 가볍게 손댄 온갖 종목에서 ‘이 아이는 미래의 금메달리스트다’ 소리를 들으며 선수가 되라고 몇 번이나 설득 받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원은 결국 문과로 진학해 지호와 똑같은 학교의 똑같은 과로 들어갔다.

    덕분에 얼마 다니지 않았던 대학에서도 수석은 물 건너갔었지…….

    괜히 안 좋은 추억을 떠올린 지호는 장식장을 등진 채 침실로 들어가 그 위에 누웠다.

    지호는 별생각 없이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깨끗하게 세탁된 침구에서는 뽀송뽀송한 냄새만 났다. 그야 이 방에서 자고 간 지 오래되었으니 이원의 체취 역시 당연히 사라졌을 것이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지호는 몰려드는 수마에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호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 * *

    또 꿈이다.

    무척 선명하고 생생한 꿈은 무의식의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 진짜 있었던 현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눈앞의 이런 일이 현실일 리는 없다.

    지호는 커다란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었으니까.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길게 그어진 흉터에서 피가 왈칵왈칵 치솟는다. 지호는 자신의 생명이 빠르게 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곧 마지막 숨을 토해 내고 영원히 잠들 것이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로 보이는 건 자신이 흘린 피 웅덩이와 불타고 있는 도시의 풍경 그리고 누군가의 다리와 발뿐이었다. 자신을 등지고 선 이가 막연히 야속하게 느껴지는 순간.

    지호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처럼 상대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죽어 가는 지호를 향해 몸을 숙였다.

    “널 절대 죽게 놔두지 않아.”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주이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살짝 쉬어 있는 목소리는 평소 듣는 것보다 훨씬 낮고 무거웠다.

    꿈속의 지호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말하면서도 지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원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커다란 손을 들어 눈물이 흐르는 지호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괜찮아, 지호야.”

    “…….”

    “다시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또 볼 수 있을 테니까…….”

    “…….”

    “다음에 새로 시작하자.”

    울음 섞인 낮은 속삭임. 뺨에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닿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이원을 향해 지호는 손을 뻗었다.

    “…….”

    입술을 달싹이며 이원을 불러 보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눈 부신 빛에 휘감겨 사라졌다.

    * * *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아, 이건 너무 잤는데?’ 하는 감이 올 때가.

    푹 잠들었다가 깨어난 지호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다가 한 번 더 놀랐다.

    너른 가슴팍이 눈앞에 보였다.

    이 방의 주인인 주이원이었다.

    파렴치하게도 드로어즈만 입은 이원은 지호의 허리를 팔로 감아 끌어안고 있었다. 덕분에 지호의 코끝은 꼼짝없이 이원의 가슴팍에 닿아 있다. 지호는 기겁하며 손을 들어 이원의 가슴을 짚었다.

    원체 골격 자체가 크고 두툼한데 몸 관리까지 하니 탄탄하게 달라붙은 가슴 근육은 편하게 이완된 상태라 그런지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았다……. 따위의 감상을 떠올린 지호는 자괴감에 빠졌다.

    소꿉친구 놈의 몸을 평가하고 있는 자신도 어이없었고, 분명 어릴 적에는 자신이 더 컸는데 이제는 과장을 좀 보태서 제 두 배쯤 되는 이원의 몸에 자존심도 상했다.

    각성한다고 바로 몸이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전투계 헌터는 근육을 만들기 더 쉽다. 하지만 전투계이던 이전에도 지호의 몸에는 이런 식의 두터운 근육이 잘 붙지 않는 편이었다. 완전히 보조 계통의 스킬을 지니게 된 지금은 더더욱 몸을 불리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한숨을 삼킨 지호는 손에 힘을 주고 이원을 밀어냈다. 하지만 옷을 차려입었을 때보다 더 두툼해 보이는 팔이 지호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주, 주이…….”

    “으음…….”

    주이원이 낮게 신음하며 팔을 뻗는다. SS급 전투계 헌터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라, 가벼운 손짓에도 지호는 종잇장처럼 간단히 끌려갔다.

    “읍!”

    지호의 얼굴이 이원의 가슴팍에 파묻혔다. 힘이 들어가자 조금 더 단단해진 근육이 얼굴에 닿아 지호는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꾸물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비어 있던 이원의 손이 슬금슬금 지호의 허리께로 올라왔다.

    일어나라고 말하려던 순간 이원의 손이 지호의 옷 안쪽으로 쑥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에 비하면 훨씬 가냘픈 허리를 문지르며 더듬는다.

    “야, 미쳤……!”

    “자기야…….”

    이원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요란하게 두근거리던 심장이 단박에 식었다.

    대체 누구랑 착각하고 있는 거지.

    본인이 경험 없다 운운했지만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 학생 때도 이원은 수도 없이 고백을 받았고, SS급 헌터가 된 이후로는 더 많은 유혹을 받아 왔다.

    분명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아침을 시작했던 거겠지. 지난밤에 함께 잠들고, 밤새 껴안고 자다가, 아침에 함께 일어나는.

    그런 주제에 사람을 연막용으로 쓰고, 아버지와도 불화를 일으키고.

    확 짜증이 치밀어서 지호는 신경질적으로 이원을 때렸다. 그러자 이원이 졸음을 단 눈을 떴다. 그리고 지그시 지호를 바라본다.

    “자기야, 잘 잤어?”

    그놈의 자기야는 진짜 애인에게나 말할 것이지.

    지호는 속으로만 툴툴대며 몸을 일으켰다.

    “네가 무거워서 잘 못 잤어. 왜 같이 자고 있어?”

    “왜냐니……. 그야 네가 먼저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잖아.”

    “좁아터진 데서 굳이 옆에서 잘 건 뭐야.”

    “솔직히 좁진 않은데.”

    확실히. 커다란 방을 제법 널찍하게 차지한 킹사이즈의 침대는 둘이서 자도 넉넉했다. 붙어서 자느라 남는 공간이 많을 뿐.

    지호는 뻘쭘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내 방 가서 자든가…….”

    “네 방에서 자라고?”

    갑자기 주이원이 정색했다. 뭔가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쳐다보자 이원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너 거기서 가끔 자고 가지.”

    “응. 나야 너보단 자주 오니까…….”

    “그래, 그렇지. 난 거기서 절대 잠 안 올걸. 딴짓이나 실컷 하겠지.”

    “…….”

    딴짓할 게 뭐가 있지? 방이라도 뒤져 볼 생각인가. 하지만 곰곰이 떠올려 봐도 지호는 숨길 만한 비밀이 별로 없었다.

    일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야한 책을 숨겨 둔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 하나 없이 말끔하기만 한 방이다. 뭘 할 생각인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괜히 불안하니 다음부터는 못 들어가게 막아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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