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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체불명의 무언가(2) (29/283)
  • 4. 정체불명의 무언가(2)

    반가운지 곧장 달려 나가는 재운의 뒤를 따라 지호도 어기적거리며 내려갔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문을 열던 두 사람과 마주쳤다. 무표정하던 신지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지호, 재운이,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고모. 이원이 형 안녕하세요!”

    “누나, 안녕.”

    “지호야. 왜 나한테는 인사 안 해 줘?”

    지호가 자연스럽게 옆에 있던 이원을 무시하자, 이원이 다가와 괜히 친한 척을 했다. 어깨에 멋대로 얹히는 두툼한 팔을 질색하며 떼어 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이원은 더 달라붙을 뿐이었다.

    그걸 보며 재운은 괜히 정색했다.

    “집에서 너무 뜨거운 거 아니에요?”

    “뭔 개소리야.”

    헛소리하는 재운을 흘겨보며 지호는 간신히 이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이원이 입으로 인위적인 흑흑 소리를 내며 눈가를 문질렀다.

    “아, 오랜만에 왔는데. 지호가 홀대하니까 슬퍼서 눈물이 나네…….”

    “우린 며칠 전에도 봤잖아.”

    “여기선 오랜만이잖아.”

    “별걸 다 신경 쓰네.”

    핀잔하긴 했지만 확실히 오늘 같은 가족 모임에서 이원을 본 적은 오랜만이었다.

    물론 주이원은 가족이 아니다. 하지만 혈연이나 법으로 맺어지지 않았을 뿐 주이원은 신씨 일가에게 늘 한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요즘은 이원이 워낙 바빠서 참석을 못 했을 뿐.

    그러고 보면 주이원이 열두 살 땐가, 어머니가 이원에게 양자로 입적하지 않겠느냐고 제안도 하셨다. 하지만 주이원은 단칼에 거절했다고 들었다. 왜 거절했는지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차라리 형제였으면 덜 얄미웠을까.’

    사귄다느니 뭐니 하는 이상한 장난은 치지 않을 테니까.

    지호가 흘겨보자 이원은 그 눈빛이 기쁘기라도 한 사람처럼 미소 지었고, 지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피했다.

    세 사람과 함께 거실로 돌아가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아버지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신지혜가 먼저 부모님께 가볍게 인사하고, 주이원이 허리 숙여 깍듯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머, 그래. 이원이 오랜만이야.”

    “크흠, 흠.”

    어머니는 밝게 인사했지만 아버지는 인사를 받아 주는 대신 괜히 심기 불편한 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헛기침만 했다. 사이에 멀거니 서 있던 지호가 모른 척 넌지시 물었다.

    “아빠. 추우세요?”

    “아니, 아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못마땅하게 인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좀 이상했다. 사실 하루 이틀 이상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오래된 것도 아니고…….

    대충 열 달 전쯤부터인가? 신중호는 주이원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원래는 뭘 해도 잘할 좋은 녀석이라며, 언젠가 회사에 한자리 주고 싶다고 하던 분이셨는데.

    지금 신중호가 주이원을 보는 눈빛은 마치 귀한 보물을 강탈해 가려는 도둑놈을 보는 듯 적대심이 가득했다.

    이유 없이 누굴 싫어할 분은 아닌데, 지호가 보기에는 싫어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서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가족이라서 감싸는 소리가 아니라 아버지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청람 역시 투명하게 운영되었고 사원들의 복지도 좋기로 유명했다.

    무엇보다 고아가 된 주이원을 선뜻 집에 받아들이고 친아들처럼 키워 준 사람이 아버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주이원을 냉대한단 말인가? 지금 이원은 키워 준 은혜를 갚다 못해 몇백 배로 부풀려서 보은하고 있는데.

    더 이상한 건 주이원이 아버지의 태도를 당연하단 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떨 때는 친아들인 저보다 더 능숙하게 아버지의 취미에 맞춰 바둑을 두며 가깝게 지냈는데 서운한 티조차 내지 않는다.

    지호는 이원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원이 어디 가서 부당한 처지를 받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이원은 인류의 구원자 아닌가? 당연히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지.

    끼어들어서 화해시키고 싶었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관여하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부드럽게 정리해 주던 어머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모호한 미소만 짓고 있으니 더더욱.

    어색한 기류에 집 안 전체의 분위기가 냉각되려던 무렵, 잠깐 눈을 굴리던 재운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저 배고파요.”

    “아구, 배고파? 우리 손주가 배고프면 안 되지.”

    가내의 실세인 어머니가 나서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아버지 또한 괜히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이 주방으로 가고, 지호는 불편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방으로 올라가는 누나를 슬쩍 따라갔다.

    “누나. 아버지 왜 저러는지 알아?”

    “네가 모르면 어떡하니?”

    누나가 핀잔하며 가볍게 웃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지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지혜가 살짝 웃었다.

    “별거 아냐. 어릴 때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더니, 그래서 네가 눈치를 못 채나?”

    “뭐를 눈치 못 채?”

    “주이원이 자꾸 너랑 결혼한다고 떠들어 대니까 그러시는 거야. 남자애들끼리 결혼한다고 그러니까.”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누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지호의 긴장이 맥없이 탁 풀렸다.

    “그런 이유로? 장난이잖아, 그냥. 걘 옛날부터 그랬다고.”

    지금이야 인류의 영웅이니 뭐니 하지만, 예전의 주이원은 그냥 장난기 많은 남자애였다. 친구들도 이원의 장난이 조금 유별나다고 생각하면서도 장단을 맞춰 주기도 했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 연령대라면 장난으로라도 동성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충분히 불편하실 수도 있었다.

    지혜가 재킷을 벗고 블라우스에 손을 올리자 지호는 알아서 등을 돌렸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지혜가 말을 이어 갔다.

    “그럼 네가 주이원한테 그만하라고 해 봐. 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도 계속하니까 화내시는 거지.”

    “……아니,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데도 그러고 다니는 거였어?”

    “처음 인터뷰했을 때부터 그러셨지. 처음엔 소식 들릴 때마다 전화해서 한마디 하시고. 이젠 짜증 나시는지 그냥 찾아보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랬단 말이야?”

    지호는 지금까지 이원의 일방적인 인터뷰를 가족들은 그저 장난처럼 여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진작에 아버지가 경고했었다니?

    원래 주이원은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얹혀사는 입장이니 필요한 부탁조차 잘 털어놓지 않았다.

    주이원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가족들은 그런 이원의 눈치 보는 태도를 안타까워하며 편하게 여기길 바랐었지만…….

    이렇게 가족의 말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누나, 누나는 주이원 일정 거의 다 알고 있지?”

    “음, 대부분은? 사적인 건 터치 안 하지만 걘 너 만나러 가는 거 빼곤 사생활이 없어서.”

    “아니……. 내가 볼 땐 애인이 있는 것 같거든?”

    “뭐? 주이원이?”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었는지 지혜가 지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화난 얼굴로 묻는다.

    “아니, 그 새끼가 누구랑 연애를 하는데?”

    “그건… 나야 모르지. 내가 볼 때는 날 상대로 그런 농담 따먹기 하면서 진짜 여친은 연막 치는 것 같거든.”

    “아, 난 또 뭐라고…….”

    지혜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네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건 아냐, 걔 진짜 시간 없어. 애초에 길드에서 살다시피 하는 애가 언제 데이트를 하겠어?”

    “그건… 그렇지만.”

    “아휴, 뭐……. 생각해 보니 걔가 다른 사람이랑 연애한다고 내가 열 낼 일은 아니네……. 아니, 아냐. 아니지. 다른 헌터랑 연애라도 시작하면 그쪽 길드로 홀랑 가 버릴지도 모르니까…….”

    심란하게 중얼거리던 지혜가 뭔가 퍼뜩 깨달은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지호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주이원이 다른 놈이랑 연애해서 다른 길드로 가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네 탓이 아니니까.”

    “물론 내 탓은 아니겠지만……. 주이원이 설마 다른 길드를 가겠어? 걔도 지금까지 여기서 일궈 놓은 게 있는데.”

    “하긴, 그렇네. 걔가 누굴 사귀겠어.”

    아직 미심쩍음이 남은 지호와 달리 지혜는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가 모르는 무언가로 나름의 확신을 내린 모양이었다.

    “어쨌든 아버지도 진지하게 그러시는 건 아냐. 정말 역정나셨으면 아예 집에 발도 못 들이게 하셨겠지.”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 아빠도 전엔 주이원을 아들처럼 생각한대 놓고.”

    “아들이랑은… 좀 다르게 됐으니까…….”

    지혜가 말을 흐리며 지호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볼을 슬쩍 꼬집는다.

    “뭐, 뭐야.”

    “귀여워서 그러지, 우리 지호. 이제 내려가자. 우리 때문에 기다리시겠어.”

    그러고 보니 이 방에 들어온 지도 벌써 몇 분이 지났다. 다 같이 식사를 시작하는 편이니 다들 식탁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더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어차피 다음 기회도 있으니 지호는 지혜를 따라 방을 나왔다.

    지혜의 말대로 가족들은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간 또 아버지와 이원이 충돌한 건지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자, 어서 먹자.”

    그나마 어머니의 중재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가족이 본가에 모여 식사하는 이 날만큼은 회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무언의 규칙이었다. 한 시간에서 두 시간쯤, 느긋하게 식사하며 소소한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중간중간 아버지와 이원이 대화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분위기가 다시 냉각되었지만 그때마다 잽싸게 재운이 끼어들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아슬아슬한 선에서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재운이 원래 이렇게까지 가족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녀석이 아닌데…….

    지호는 신재운이 주이원에게 미리 용돈을 받고 이런 류의 일을 청탁받았다는 쪽에 임승주를 걸 수도 있었다.

    가까스로 평화롭게 끝난 식사 후, 이원이 지호를 불렀다.

    “지호야.”

    “왜.”

    “나, 할 말이 좀 있는데.”

    “뭔데?”

    “여기서는 좀 그렇고 방에 가서 얘기하자.”

    이원이 씩 웃으며 멋대로 지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붙이며 작게 속삭였다.

    “길드 관련 얘기야. 기왕 만난 김에 하면 좋잖아?”

    “중요한 내용이면 길드 차원에서 연락해.”

    “그건 아니고, 유용한 정보를 좀 줄까 하고.”

    정보? 그런 거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원을 따라가려고 했다. 여전히 이 집의 2층에는 지호와 이원이 쓰던 방이 나란히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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