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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전과는 다릅니다(12) (26/283)
  • 3. 이전과는 다릅니다(12)

    게이트 방어전을 끝내고 며칠간,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다.

    급한 일을 끝내고 점심을 후다닥 먹고 나니 임승주가 신지호를 찾아왔다. 그리고 오전 중에 자신이 처리한 일들에 관해 꽤 상세하게 보고했다.

    조금 더 자세해진 설명보다 파격적인 변화는 임승주의 태도였다.

    평소처럼 신지호를 깔보는 시선은커녕, 오히려 꽤 중요한 사람을 대하듯 깍듯하고 정중한 태도다. 맹세하건대 근 1년간 임승주를 봐 오면서 제일 예의 바른 태도였다.

    고작 스킬 한 번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지나? 싶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임승주는 처음부터 신지호를 약하다는 이유로 싫어한 사람이었다. 지호가 강해졌으니 인정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간 승주의 태도를 무던하게 넘기던 지호가 되레 아니꼬워졌단 것이다. 애초에 지호는 타인을 어떤 기준으로 차별하는 인간을 몹시 싫어하기도 했다.

    ‘아냐, 이런 게 사회생활이지.’

    지호가 따로 길드를 차리겠다고 했을 때, 그나마 가장 긍정적인 반응이던 형이 충고했다.

    시작부터 사람들의 미움을 산 신지호가 걸을 길은 가시밭길이라고. 싫어도 웃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그러기 싫으면 대충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마무리 지었지만……. 형 나름대로 신경 쓴 충고였다.

    스멀스멀 밀려드는 잡념을 몰아내고 지호는 승주의 보고를 마저 들었다.

    다른 보고들은 이전의 균열이나 게이트 방어전보다 규모만 커졌을 뿐 별다를 게 없었다. 가장 중요한 보고는 임승주가 마지막에 한 말이었다.

    “이번 달 18일이요?”

    지호의 시선이 달력으로 향하자, 자세히 보기도 전에 승주가 곧장 덧붙였다.

    “네. 일단 그날 다른 일정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18일에 진행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네.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네, 없네요. 그럼 가서 일 보세요.”

    임승주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인사한 후 길드장실을 나갔다.

    지호는 달력을 팔랑 넘겨 보았다. 오늘이 5월 4일이니, 18일까지는 고작 2주일의 시간이 남았을 뿐이다. 지호는 달력에 메모를 써넣었다.

    「등급 재심사일」

    한때는 그 무엇보다 두려워하던 날이 2주일 후다.

    더는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기대되고 있었다.

    F급 각성자를 도와준 건과 A급 게이트의 처리 건 이후 신지호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쯤 바람 잡아 놨으면 S급 승급에 이의를 표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신지호를 까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헌터 커뮤니티조차 여론이 꽤 반전됐다.

    이젠 명목상의 확인과 승급만이 남은 상태.

    ‘내 생각보다 더 급하게 날을 잡긴 했는데.’

    재심사 요청 자체도 엊그제 넣었으니 준비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이른 날짜를 잡은 것 같았다.

    왜 그렇게 급하게 구는지는 얼추 짐작이 간다.

    예측과 맞지 않는 게이트의 이상 발생으로 민심이 불안한 상황.

    헌터 협회나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S급 헌터를 하나쯤 추가하고 싶을 것이다. S급 헌터는 존재만으로도 안정감을 줄 테니까. 실제로도 조금 더 안전해질 것이고.

    지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결재가 필요한 서류를 처리했다.

    지금의 노네임은 B급 길드에 불과하다. 길드장이 S급으로 승급한다면 동급의 B급 길드 중에는 가장 매력적인 길드가 된다. 새 길드를 구하고 싶은 각성자들에게 뽐낼 만한 길드가.

    신지호는 이전과 다른 노네임을 상상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길드원으로 채울 노네임에서 기존의 길드원은 반의반도 남지 않는다.

    개중 심하게 반감이 있던 길드원은 모두 잘라 냈다. 얼결에 동조했던 길드원 중 능력과 인성이 쓸 만한 인물과는 조건을 다시 협상해 재계약을 진행했다.

    내보낼 인원을 확정하는 데는 허소리가 꽤 도움을 주었다.

    ‘A급 헌터, 최소 B급 헌터를 몇 명은 충원하고 싶은데.’

    문제는 헌터의 충원이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이다.

    국내의 A급 각성자는 모두 252명.

    적은 숫자 같지만 인구수 대비로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렇다고 해도 길드를 굴리며 각성자를 영입해야 하는 처지에선 적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A급 이상의 길드는 국내에 아홉 개. 길드에 가입할 의향이 있는 헌터 대다수는 이미 아홉 개의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

    소속이 없는 A급 프리 헌터의 수도 제법 많다. 하지만 이미 아홉 개의 길드를 차 버린 A급 헌터가 노네임에 와 줄까?

    최대한 노력해 보겠지만 영입할 수 있는 확률은 낮았다.

    지호가 길드장실에서 혼자 머리를 굴리는 사이, 노네임 길드에는 드문 일이게도 손님이 찾아왔다.

    오늘은 신지호가 선태웅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지난번 S급 던전에 단둘이 갇힌 이후 첫 만남이다.

    태웅은 복장에 잔뜩 신경 쓴 채 노네임 길드로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당황했다.

    “아니, 뭔 꽃이…….”

    순간 길드가 아니라 꽃집을 찾아왔나 싶었을 정도로 길드 내부에는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건물 안에 화단을 만들었나 싶어서 확인했지만 꽃병에서부터 올라왔을 뿐이다.

    장미 자체는 아름답다. 하지만 너무 무성하게 자라 있으니 식물형 몬스터 따위가 생각나서 소름 끼친다. 신지호의 취향에 의구심이 들 무렵…….

    “청람 길드장께서 보내 주신 꽃이라더군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선태웅은 생각을 수정했다.

    청람 길드장이 준 꽃이라면 분명 특별한 꽃이겠지.

    태웅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임승주 헌터.”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임승주는 언제나 그렇듯 오늘 역시 딱딱한 무표정이었다.

    예전에 청람 길드에 있을 때는 그나마 생기 비슷한 게 돌았는데, 노네임에 들어온 이후로는 약간 썩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초췌해져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니, 정말 모르겠다. 이번 기회에 노네임은 최소 A급 길드로 올라갈 테니 부길드장인 임승주의 입장에서는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임승주는 선태웅의 손에 들린 포션 선물 세트에 눈길을 던졌다.

    “오늘은 길드장님을 찾아오신 겁니까?”

    “네, 지난 일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드릴 겸…….”

    태웅이 멋쩍게 웃었다.

    그간 선태웅과 임승주 사이에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 선태웅은 같은 A급인 임승주가 신지호의 아래에 있다는 걸 안쓰럽게 여겨서 굳이 그에게까지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그리고 임승주 역시 선태웅에게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선태웅이 신지호에게 시비를 걸고 물어뜯는 동안에도 그는 늘 입을 다문 채 구경만 하고 있었으니까…….

    ‘아, 그래서 저러나.’

    그동안 무시하던 길드장이 잘나가기 시작했다면 부길드장으로서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게 진작 잘하지……. 라고 하기에는 태웅 역시 승주에게 지적할 처지는 아니었다.

    오늘도 신지호에게 잘 보이려고 심사숙고 끝에 옷을 고르고, 미용실에 가서 메이크업까지 받고, 선물도 직접 청람 백화점의 헌터관에 가서 사 왔다.

    그걸 보고 누나인 선태희가 소개팅이라도 가냐며 비웃었지만, 솔직히 말해 이성을 상대할 때보다 더 떨렸다.

    신지호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다.

    신지호와 다시 한번 같이 싸워 보고 싶다.

    스킬을 받았을 때의 고양감은 정말 끝내줬으니까…….

    “선태웅 헌터.”

    “아, 네.”

    잠시 그때의 생각에 젖어 도취한 태웅을 승주가 불렀다. 망설임이 묻어나는 얼굴로 승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 선태웅 헌터께서도 [별의 축언]을 받으신 거지요.”

    “아, 그런 이름인지는 몰랐는데……. 네, 그럴 겁니다.”

    “어떠셨습니까?”

    “대박이었죠. 아무도 무섭지 않겠던데요?”

    “그때 뭔가 달라진다는 느낌은 없으셨습니까?”

    “내가 존… 아니, 개쎄졌다? 아니, 굉장히 세졌다. 그런 느낌이었죠.”

    계속 사무적인 말투를 쓰려 노력하던 태웅의 목소리에 노골적으로 들뜬 감정이 실렸다. 잔뜩 신난 태웅을 승주가 심각한 눈으로 관찰했다.

    “뭔가 스킬을 쓸 때 다른 감각은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다른 감각이라면 어떤?”

    “저는 검을 휘두를 때 이전보다 동작이 나아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체력이나 근력만이 늘어난 게 아니라, 제 검술 실력 자체가 한 단계 높이 올라간 느낌이었죠. 그때의 감각을 되살리며 훈련을 좀 해 봤는데…….”

    임승주가 말을 흐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의 움직임은 현재의 임승주에게 있어 완벽에 가까웠다. 스킬의 효과가 사라지자 그대로 재현해 낼 수는 없었지만, 한 번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인지 어느 정도 따라갈 수는 있었다.

    헌터의 강함에는 등급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지만, 등급이 비슷하다면 거기서부터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갈린다.

    한 번 더 스킬을 받을 수 있다면 더욱 확실하게 따라갈 수 있을 텐데.

    등급 재심사가 확정되었으니 신지호는 당분간 외근을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간 매번 외근 나가지 말라고 구박했는데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승주의 말을 듣는 태웅의 얼굴에는 의문만이 떠올라 있었다.

    “어, 전 잘 모르겠던데…….”

    “…….”

    임승주의 눈에 언뜻 한심하단 감정이 스치자 선태웅이 황급히 변명했다.

    “그때 저나 신지호 헌터나 둘 다 거의 빈사 상태였습니다. 뭔가를 비교할 만한 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러실 만도 하지요.”

    하긴, S급 던전에서 다치고 간신히 살아 나왔다. 멀쩡한 정신으로 자신의 감각에 몰입했던 임승주처럼 정교한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선태웅의 상황은 이해했지만, 자신이 당시에 느꼈던 감각이 진짜였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임승주는 아쉬움을 느끼며 물러났다.

    임승주가 가고 길드장실로 안내받으며 선태웅의 머리는 더욱더 복잡하게 돌아갔다.

    ‘스킬 자체의 효율이 좋아졌다고?’

    선태웅의 스킬은 마법 계열. 마법 계열 역시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마력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쓰거나 위력을 높이는 쪽으로 개선될 수 있다.

    그때 좀 더 집중했어야 하는 건데.

    선태웅은 아쉬움을 느끼며 포션 선물 세트를 꽉 움켜쥐었다. 그간 폭언을 퍼부었던 자신의 입을 마구 때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라도 잘 보여야지.

    자신에게 마력을 건네주던 때의 신지호가 잔상처럼 남아 자꾸만 눈앞을 떠다닌다. 그간 인터넷으로 신지호의 지난 기사나 찾아보며 살았는데, 드디어 실물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상하게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선태웅은 길드장실의 명패가 붙은 나무문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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