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전과는 다릅니다(11)
─ 자기야.
전화를 받자마자 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간 뉴스 화면 속 정신없는 현장 상황과는 달리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하냐, 너? 기자들 다 모였는데 죄다 무시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이원은 지호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다.
─ 오늘 일 축하해 주고 싶어서 전화했어. 잘했다면서.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 대단한 거지, 우리 지호가 열심히 노력한 건데.
“어, 그래…….”
지호는 답지 않게 어물어물 대답했다. 간질간질한 말은 하루 이틀이 아닌데 오늘따라 묘하게 열이 오른다.
인정받은 느낌이라 그런 걸까.
지호는 순간 떠오른 생각을 고개를 저어 털어 냈다. 대등해지도록 달려야 할 마당에 고작 인정 따위에 기뻐하긴 일렀다.
지호는 스포츠 뉴스로 넘어가는 TV를 껐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며 물었다.
“……넌, 다친 데 없고?”
휙 사라진 게 신경 쓰여서 물으니 전화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다치겠어?
잘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서려 있다.
그래, 너 잘났다. 새끼야…….
걱정할 사람이 따로 있지, 괜한 걱정을 했다.
지호가 입을 꾹 다물자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조용한 지호의 집과 달리 주이원의 주변에서는 멀찍이 사람들의 소음이 들린다.
딱히 할 말도 없고 이제 그만 끊으려던 찰나.
─ 사랑해, 지호야.
자주 듣는, 그러나 들을 때마다 적응되지 않은 달콤한 목소리가 사랑을 고백했다. 지호는 순식간에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핀잔했다.
“뭐야, 갑자기? 소름 끼쳐.”
─ 처음 하는 말도 아닌데.
“매번 소름 끼치니까 하는 소리야. 적당히 좀 해라.”
─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만할게.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은 여친한테나 써먹어.”
─ 지호가 내 애인인데.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들어가 쉬어라.”
─ 지호야.
뭔가 대답해 주려던 지호는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조금 전부터 피로를 호소하던 몸이 이제 그만 자라고 신호를 보냈다.
─ ……잘자.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던 이원이 인사했다. 지호는 대충 대답해 주고는 통화를 끊었다.
“별론데…….”
들뜬 기분과는 별개로 몸 상태가 별로다. 지호는 중얼거리며 소파에서 꼼지락거렸다.
일어나서 씻고 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몸을 일으킬 기운이 없었다. 지호는 빠르게 수마에 사로잡혔다.
* * *
부드럽고 포근한 이불의 온기가 느껴졌다.
곧장 든 생각은 ‘나 거실 소파에서 자지 않았나?’였다.
“잘 잤어?”
“…….”
깜박깜박 눈을 뜬 지호의 앞에 주이원이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지호는 자신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얼떨떨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게 현실임을 확신했다.
차라리 꿈인 게 나았을 텐데.
지호는 떨떠름한 눈으로 어느샌가 침대에서 자고 있던 자신의 몰골을 확인했다. 분명 옷도 갈아입지 않고 쓰러졌는데 어느샌가 잠옷으로 곱게 환복했다.
“옷은 몬스터 체액도 좀 묻어 있길래 갈아입혔어. 그런 건 제대로 갈아입고 자야지. 당장 문제가 없어도 자는 동안 피부에 스며들면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어. 피곤해도 씻고 자. 알았어?”
“어……. 으응.”
갑작스레 쏟아지는 훈계조의 잔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던 지호는 이내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발끈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 어떻게 들어왔어?”
“문 열고 들어왔지.”
“땄어?”
“아니. 여기 비밀번호 0408이잖아.”
“언제 봤대…….”
그리 어려운 번호도 아닌 데다가 몇 번 본의 아니게 집에 데려온 적도 있다. SS급의 동체 시력이라면 슬쩍 봐도 뭘 누르는지 알아차리기 쉬울 것이다.
요즘 각성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마력 인식 잠금으로 바꿔야 하나. 그런데 주이원이라면 그것도 뚫고 들어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착각은 아니겠지.
지호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이원을 노려보았다.
“아니, 그런데 왜 남의 집에 온 거야? 이거 주거 침입이다, 너.”
“부부 사이에 주거 침입은 무슨.”
“부부 사이에도 충분히 성립할 수… 아니, 애초에 네가 내 아내도 아니잖아?”
“응, 남편이지.”
“지랄 났다. 넌 그거 질리지도 않냐.”
저런 농담도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했다. 철 좀 들면 그만할 줄 알았는데.
사실 저 정도면 장난친다기보단 말버릇이 되어 버린 거 아닌가. 어릴 때 별명이 의외로 평생 간다는데, 진짜 평생 자기야를 별명으로 쓰는 게 아닐지 두려울 정도다.
코웃음 치는 지호에게 이원이 훌쩍 다가왔다. 지호가 움찔하며 몸을 물렸지만 이원의 손이 지호의 이마를 감싸는 쪽이 빨랐다. 평소처럼 뜨거운 체온이 지호의 이마 위를 부드럽게 데웠다.
“혹시 어디 아프진 않지?”
“응? 응, 괜찮아.”
마력을 많이 써서 잠들기 전엔 꽤 힘들었는데. 기절하듯 잠들긴 했지만 하룻밤 자고 나니 완전히 멀쩡해졌다. 오히려 어제 그렇게 피곤했던 것치고는 꽤 상쾌한 기분이었다.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며 웃는 주이원의 뒤로 그가 늘 입고 다니는 코트가 보였다.
“지금 아침이지?”
“응, 8시 반이네.”
이원이 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제 바로 와서 지금까지 이 집에 있었던 걸까? 예전에는 얼굴만 보고 휙 사라지더니, 경매장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제법 오래 붙어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왜 온 거야? 전에는 할 말만 하고 가 버렸으면서.”
“지호가 보고 싶으니까.”
추궁을 해 봤자 소용없다. 이원은 매번 실없는 소리로 말을 돌려 버리니까. 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어서 주거 침입까지 해?”
“주거 침입 정도는 별거 아니지.”
이게 과연 인류의 구원자라 불리는 SS급 헌터에게서 나와도 괜찮은 발언인가……. 지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자 이원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너 아팠던 것 같아서 열고 들어온 거야. 아프면 병원 데려가려고. 왔을 때는 열 좀 있던데.”
“나 아픈 건 어떻게 알고…….”
“감시 카메라 같은 건 설치한 적 없으니까 안심해.”
“‘카메라가 없어도 유용한 스킬이 많으니까’ 뭐 이런 건 아니지?”
“아니야. 그냥 목소리 들으면 알지.”
다정한 목소리에 지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머리 한쪽이 쿡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통증과 함께 찾아온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시감이었다.
“음…….”
“왜?”
“우리 전에도 이런 적이 있나?”
“이런 적?”
지호는 한참 입술만 달싹였다.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절대 떠오르지 않는다. 구체화되지 않는 생각을 뭉뚱그리며 지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금 같은 상황……? 그러니까 네가 나 챙겨 주고 이러는 거?”
“있었겠지?”
“있었어?”
“너 아플 때마다 내가 많이 챙겨 줬잖아. 계속 학교도 같았고, 등하교도 같이했고. 비슷한 일이야 많았지.”
“그렇지…….”
하긴, 한집에서 같이 산 세월이 몇 년인데. 의식이 없던 시간을 포함하면 거의 20년이다.
등하교를 제외해도 가족 여행도 같이 가고, 어쩌다 보니 세트로 묶여서 여기저기 여행도 다녔다. 친구도 겹치니 떨어질 틈 없이 늘 거의 붙어 다녔다.
그렇게 붙어 다닐 시간에 공부라도 했으면 학창 시절에라도 1등을 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이원이 자신에게 언제부터 다시 스스럼없이 붙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지호가 새로운 스킬을 얻고 난 다음부터다.
주이원은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적어도 지호의 상태가 더 나아졌다는 정도는 확신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SS급 마석의 가치를 곧장 알아볼 정도로 눈썰미 좋은 녀석이니, 지호의 변화쯤이야 충분히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지.
“밥 먹자, 지호야.”
마치 자신이 집주인인 양 이원이 자연스레 일어났다. 얼결에 따라간 지호는 뭔가 바뀌었단 것을 깨달았지만 이제 와서 말하기도 늦은지라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식탁 위에는 호화로운 한식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을 가득 채운 찬은 아침으로 먹기에는 과한 수준이었다.
“이걸 다 먹으라고?”
“물론. 많이 먹어, 지호야. 많이 먹고 기력 보충 좀 해야지. 어젯밤은 자기가 먼저 잠들어서 나 혼자 베갯잇을 적셨잖아.”
헛소리는 무시하며 지호는 자리에 앉았다. 대충 시리얼로 때울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차려진 12첩 반상은 부담스럽긴 해도 주이원의 말처럼 기력 보충하기엔 제격이었다.
“이거 다 어디서 사 온 거야?”
“내가 한 거지. 새벽부터 하는데 안 일어나더라?”
“시간도 없을 텐데 괜히 뭐 하러…….”
익숙하게 타박하다가 이원과 눈이 마주쳤다. 다 가진 놈이 버려진 강아지 같은 얼굴로 지호를 바라본다.
생각해 보면 무단으로 주거 침입을 하긴 했어도 피곤한 일이 끝나자마자 지호가 아플까 봐 챙겨 주러 온 녀석이다. 주거 침입도 사실, 가족 같은 사이에 굳이 범법을 따질 만한 일도 아니고.
괜히 밥 정도에 타박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다 싶어서 지호는 말을 돌렸다.
“아냐, 잘 먹을게.”
“응.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이거면 됐지, 뭘 더 필요해.”
“뭐든. 아무거나.”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진지한 눈빛의 이원과 눈이 마주쳤다.
뭐든, 아무거나.
세계에서 가장 큰 길드인 청람의 길드장이자, 유일무이한 SS급 헌터인 주이원으로서. 신지호가 원하면 다 들어줄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 소꿉친구는 꽤 근사했지만…….
지호는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이원에게 기대려면 진작 기댔을 것이다. 아침을 먹고 출근하면 이전과는 또다시 달라져 있을 사람들의 인식을 생각하며 식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