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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전과는 다릅니다(4)

경매장 안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필사적으로 모자를 눌러쓴 지호와 달리 이원은 제집 안방처럼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깔끔하게 천억 부를 걸 그랬나? 금액이 너무 커지면 문제 될 것 같아서.”

“미쳤냐?”

귀를 의심하며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질문에 이원은 그저 환하게 웃었다.

“안 미쳤는데? 나도 너한테 돈지랄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

그냥 돈지랄도 아니고 300억 골드를 날리는 돈지랄이라니……. 주이원이 그 어떤 길드나 개인보다도 더 많은 골드를 보유했다고 해도, 이건 정말 지랄이었다.

“호구 새끼……. 다른 데 가서는 이러지 마라.”

“내가 다른 사람한테 돈 쓸 일이 뭐 있어? 사실 너한테는 아이템 그냥 다 줄 수도 있는데.”

“필요 없어.”

“네가 안 받아 주니까 내놓은 걸 사는 거 아냐. 어차피 수수료 떼도 청람 백화점으로 들어가잖아? 결국 다 돌고 돌아 장인어른 주머니에 들어가는 건데, 좋은 거지.”

“아니, 누가 장인어른이냐고…….”

“너희 집안에 은혜 갚는 중이라고 생각해.”

태연한 이원의 말에 지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지만 지호는 이원이 저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원이 신씨 일가에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이원은 받은 만큼 충분히 돌려주었다.

어릴 때부터 이원은 늘 지호를 챙겨 주었다. 어떨 때는 이원이 신분제 사회의 하인이라도 된 것처럼 지극히 정성스럽게. 어린아이에 불과한 이원에게 아픈 친구를 신경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도.

게다가 헌터가 되고 나서는 청람 길드에 붙박여 있으면서 충분히 은혜를 갚고도 남았다.

요 몇 년 사이 청람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까지 이름을 알리며, 길드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도 어마어마하게 성장했으니까.

하지만 이원이 SS급 헌터가 아니었다고 해도, 딱히 그에게 은혜를 갚으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호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주이원을 남처럼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원이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막상 이원이 은혜 따위를 말할 때마다 선을 긋는 것 같아서 섭섭하고 어색하고, 한편으로는 자각하지 못한 새 그에게 괜한 부채감을 심어 줬던 게 아닌가? 하고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태연하게 앉아 있다가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10억대에 낙찰받을 물건은 아닌 것 같아서.”

예리한 발언이었다. 지호가 알기로 이원에게 감정 스킬은 없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누구보다 빠르게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는 했다.

“대체 어떻게 알아, 그런 걸?”

“그냥 보면 알지. 어차피 설명해도 모를걸.”

주이원은 모호하게 웃었다. 만년 2등의 입장에선 굉장히 아니꼽게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실제로 시스템이 없다면 지호 역시 저 마석의 가치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잘났다, 그래.”

잘난 건 잘난 거고 얄미운 건 얄미운 거다. 지호가 뚱한 표정으로 침묵하자 이원이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자기야. 뭐 사려고 보고 있었어? 마력 옵션 붙은 거?”

“응. 회복 옵션이나 퍼센트 증가 옵션 붙은 거로…….”

말하다 말고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 영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지호는 눈을 지그시 뜨고 이원을 노려보았다.

“사 줄 필요 없어.”

“응, 그래.”

당연히 사 주니 마니 하는 문제로 실랑이할 줄 알았더니 이원은 곧장 수긍했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지호에게 이원이 씩 웃는다.

“내가 300억에 마석 사 줬으니까 그걸로 사. 너한테 좋은 장비라도 들려 둬야 안심될 것 같으니까.”

“알아서 잘 돌아다니는데 뭘 그렇게 사서 걱정하는 거야.”

“미리미리 대비하는 거지. 좋은 거 사서 꼭 들고 다녀. 안 들고 다니면…….”

“안 들고 다니면?”

“너 가둬 둬야지.”

가두기는 무슨. 지호는 코웃음 쳤다.

지나치게 많은 금액을 조정해서 거래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조금 전에 이원이 했던 말이 신경 쓰인다.

은혜를 갚는 중이라는 그 말.

사실 300억 골드가 지호에게나 큰돈이지, 툭하면 몇십억짜리 장비를 내다 파는 이원에게는 엄청나게 부담되는 돈은 아니었다.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지만 본인이 부채감을 덜 수만 있다면야.

게다가 3속성의 SS급 마석이라면 지금껏 경매에 나온 적이 거의 없는 물건이다. 제대로 감정받았을 때 얼마에 낙찰될지 모르겠지만, 잘만 활용할 수 있다면 그리 바가지를 씌운 가격도 아니다.

고민 끝에 지호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만 받을 거야. 다음에는 이러지 마.”

“다음엔 그럴 필요도 없지.”

이원이 턱을 괴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무슨 뜻인가 싶어서 쳐다보니, 마주친 이원의 눈이 사르르 곱게 접힌다.

“네가 S급으로 승급하고 나면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벌어들일 수 있을 테니까.”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말에 오히려 지호가 놀랐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뭐가?”

“넌… 내가 승급해서 잘해 나갈 거라고 생각해?”

지호 본인조차 자신이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걱정을 산처럼 쌓아만 가고 있는데.

어릴 적의 지호는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아플 때는 어쩔 수 없이 안 좋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아프지 않을 때는 늘 기운 넘치게 돌아다녔다.

그때는 뭐든 해낼 자신이 넘쳤다.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게 두렵지 않았다. 지호의 삶은 긍정적인 단어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루머에 물어뜯긴 지난 1년은 지호가 살아온 23년의 세월을 뒤집어엎을 만큼 강렬했다. 자신감은 점점 낮아졌고, 이상은 점차 허상으로 변했다.

누구도 지호를 깊이 신뢰하지 않는다. 지호 본인조차도 더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원만은.

“물론. 확신하고 있어.”

“…….”

“너는 약하지 않아.”

변함없이 신지호를 믿는다고 말한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 평소 빈말을 하지 않는 주이원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신뢰가 가는 말.

태연한 척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던 지호의 속이 조금이나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지금껏 내내 의심만을 받다가 얻어 낸 한 조각의 신뢰가 달았다.

게다가 그 신뢰를 내어 준 사람이 SS급의 헌터인 주이원이라면 더더욱.

‘아니, 잠깐.’

벅차오르던 지호의 감동에 잠시 제동이 걸렸다.

“믿는다면서 왜 반대하는데.”

“믿음이랑 걱정은 별개지. 우리 고운 지호에게 작은 상처라도 난다면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니까…….”

이원이 손을 가슴 위에 포개며 불쌍한 척을 했다. 못 볼 꼴이라 지호는 이원을 외면했다.

그냥 헛소리는 없었던 셈 치고 지호가 약하지 않다고 했던 말까지만 기억하자.

선택적으로 말을 걸러 내고 나니 다시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 또 스태프 나오네.”

이원의 말에 지호는 다시 경매에 집중했다. 비록 지금 나온 매물은 지호가 원하는 장비와 거리가 있었지만 기다리다 보면 하나쯤은 나오리라.

인맥으로 얻은 300억 골드에 마음이 든든했다.

물론 그 골드를 여기서 탕진할 생각은 없었기에 지호는 애매하게 고민되는 장비들을 과감하게 넘겼다. 평생 쓸 장비는 아니어도 오래 쓸 만한 장비를 구하고 싶다.

그렇게 계속 시간만 흘러서, 다음 기회를 노려봐야 하나 싶을 때 즈음…….

한눈에 시선을 잡아 끄는 장비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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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이아의 스태프

등급SS
설명신성한 해목(海木) 투이아를 재료로 만들어진 스태프.
전체 마력 20% 증가. 스킬 공격력 10% 증가.
[마력저장]이라는 시동어를 읊어 마력을 사용자의 최대 마력량만큼 저장해 둘 수 있다. 사용자의 마력이 소모되었을 때 저장된 마력을 사용해 보충할 수 있다.
제작자레일레이 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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