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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전과는 다릅니다(3)

골드를 펑펑 쓰다 보니 가진 재화로는 부족해 결국 길드의 공금에까지 손을 댔다. 어차피 지호 본인이 착용할 장비가 아니라 길드원들에게 지원해 줄 장비니 상관없다. 그렇게 계속 사 대다가 결국은 그 공금마저 거의 바닥났다.

이대로라면 다음 달의 길드 운영에 큰 지장이 가겠지만… 지호는 어차피 믿는 구석이 있었다.

‘마석만 팔면 돼.’

선태웅이 준 추정가 12억 골드의 마석.

경매장 측이 제시한 시작가는 10억이다. 요즘 한창 제작 스킬을 가진 각성자들이 뜨고 있어서 재료로 들어가는 마석 역시 인기 품목이었다. 경쟁이 잘 붙는다면 25억까지도 기대해 볼 법했다.

물론 3속성의 마석은 25억에 팔아도 손해다. 하지만 마석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느긋하게 방법을 알아보기에는 당장 S급 승급을 위한 골드가 급했다.

결국 더 비싸게 팔릴 줄 알면서도 싸게 내놓은 것이다. 속이 쓰렸지만 어차피 지호도 다른 아이템을 염가에 샀으니 만족하기로 했다. 이른바 정신 승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오는 아이템의 등급이 점점 더 올라갔다.

그쯤 되니 제대로 감정받고 받을 만한 가격에 팔리는 아이템들뿐이라 지호가 살 건 별로 없었다.

‘아니, 사실 사고 싶은 건 좀 있는데.’

지호는 길드 사무실에 놓여 있을 자신의 장비를 떠올렸다.

원래 지호는 육체 강화 계통으로 장비를 모두 갖춰 뒀다. 하지만 보조 계열로 스킬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장비도 완전히 바꿔야 했다.

지호가 원하는 건 마력을 퍼센트로 늘려 주거나, 마력 회복 옵션이 붙어 있거나, 마력을 보존해 두는 장비 같은 종류다.

이번에 얻은 새 스킬은 시전자인 신지호의 마력을 기반으로 한다. 주변의 마력을 흡수해 강화할 수 있다지만 던전은 이세계에 속하므로, 미리 얻어 둔 마력을 저장해 둘 만한 장비가 있어도 좋았다.

물론 장비를 사려면 마석부터 팔려야 했다. 이후 높은 등급의 헌터와 계약할 때 골드가 필요할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여유는 남겨 둬야 한다.

일단 마석이 낙찰되는 것을 확인하고 남은 예산에서 써야겠지.

대금을 받는 건 경매가 끝난 이후라지만, 다름 아닌 청람 백화점이니 가장 먼저 받아서 결제해도 괜찮을 거고…….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굴리며 지호는 쓸 만한 물건이 나오지 않을지 계속해서 경매에 집중했다.

한창 경매가 이어지고 있을 때쯤, 갑자기 경매장 바깥쪽에서부터 소란이 일었다.

마침 쓸 만한 장비가 하나 나왔기 때문에 집중한 지호는 미처 그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른 헌터가 지호보다 높은 금액을 불렀고, 잠시 계산해 본 지호가 포기하며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

일부러 비워 둔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지호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좌석 배정식이라 여기 앉을 사람은 없을 텐데 왜 멋대로 앉는 건지.

‘날 알아봤나?’

몰래 들어온 기자이거나 어지간히 자신에게 앙금이 있는 헌터일 확률도 높았다. 이전에도 그런 일이 꽤 있었으니까.

지호는 옆 사람을 최대한 조용히 쫓아낼 작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호의 눈에 보인 상대는 기자나 낯선 헌터 따위보다 훨씬 익숙한 사람이었다.

“……주이원?”

“안녕, 자기야.”

놀란 지호의 얼굴을 본 주이원이 퍽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원을 살피는 지호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분명 오늘 주이원은 던전 공략 일정이 없을 텐데.

일하다 말고 어디 갑자기 생긴 균열이라도 처리하고 온 건지, 스리피스의 슈트 위로 주이원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방어구가 걸쳐져 있다. 겉보기에는 검은 롱 코트 같지만 어지간한 마법 공격을 흡수하는 SS급의 방어구였다.

“뭐야, 왜 왔어.”

싸우다가 왔으면 피곤할 텐데 좀 쉬지.

걱정의 말은 속으로 삼키면서 지호는 모자의 챙을 꾹 눌러썼다. 주이원과 어울린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지호라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귀찮은 일은 사양이다.

지호가 신경 쓰는 걸 본 이원이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가볍게 훑어볼 뿐이었지만 이원의 시선에 닿은 헌터들은 모두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는 착각에 빠졌다.

이원의 눈이 머리 위의 불빛만큼이나 환하게 황금빛으로 빛나는 순간.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절할 만큼의 강렬한 살기가 내리꽂혔다. 헌터라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강렬한 압박이었다.

이쪽을 바라보던 헌터들이 도망치듯 슬그머니 고개를 다시 돌리고 경매에 집중했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원은 다시 지호를 돌아보았다.

“자기 보고 싶어서 왔지.”

“난 너 꼴도 보기 싫은데.”

지호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헌터를 그만두라면서 명령이니 뭐니 지껄인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선태웅의 기자 회견을 보고 놀라서 어물쩍거리다가 인사하며 보내긴 했지만 여전히 앙금은 남아 있었다.

“그때는 미안해.”

곧장 나오는 사과가 그다지 미덥지 않다. 지호의 눈썹이 불만스레 들썩이자 이원이 눈을 내리깔았다.

“걱정되어서 그랬어. 어릴 때부터 너 많이 아팠잖아. 힘들어하는 거 보기도 싫고. 만약 등급 재판정받아서 잘 풀린다고 해도 헌터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또 위험할 수도 있어.”

“난 괜찮아.”

구구절절 이어지는 말에 지호는 딱 잘라 대답했다. 뭐라고 하든 이대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빌빌거리다 간신히 쓸 만한 스킬을 얻게 됐는데 여기서 그만둔다고?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지호의 눈에 깃든 굳은 의지를 본 이원이 한숨을 쉬었다.

“경매장에서 꽤 많이 샀던데. 그래서 정말 헌터질 계속할 생각이야?”

“당연한 거 아냐?”

“그냥 그만두지. 뭐가 재밌다고 굳이 하려고 그래?”

자꾸 이어지는 설득에 지호는 발끈했다. 그러는 자기는 세상에서 제일 헌터질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서…….

장소가 경매장이라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지호는 이원에게 바싹 다가갔다.

“씨발, 관두고 내조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나보고 때려치우래? 지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너나 관두든가!”

가까운 거리에서 씹어뱉듯 작게 외친 지호가 씨근덕댔다.

이원은 그런 지호를 가만히 보다가 씩 웃더니 갑자기 제 손을 지호의 허리 위에 얹었다. 깜짝 놀란 지호가 밀어내기도 전에 이원이 지호를 확 끌어안았다.

지호가 주먹으로 이원을 퍽 때리며 밀어내려고 애썼지만 이원은 간지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신 웃으면서 지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드디어 나한테 내조받을 맘이 생겼어?”

“그 얘기가 아니잖아!”

“나도 은퇴하고 싶은데 미뤄야겠네. 결혼하고 내조하면서 남편을 사지에 몰아넣는 것보단, 그냥 결혼을 포기하는 게 낫지. 난 지호를 사랑하니까.”

“뭐라는 거야?”

“아니면 여기서 사고라도 칠까?”

이원이 음험하게 속삭였다. 평소 이원의 말은 개소리로 치부해 넘기는 지호가 듣기에도 몹시 불온한 목소리였다.

지호가 이원을 때리는 것도 멈춘 채 바라보니, 이원은 씩 웃었다.

“지호가 얼굴 못 들고 다닐 만한 일을 여기서 하는 거지. 사회적으로는 매장되겠지만 죽는 것보단 낫잖아? 남은 인생은 내가 책임져 줄 테니까.”

사회적으로 매장될 만한 사고는 뭐가 있지?

순식간에 지호의 머릿속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설마 여기서 대량 학살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라지만, 당당한 태도를 보니 영 예감이 안 좋았다.

“그런 짓 하기만 해 봐.”

“그런 짓이 뭔지나 알면서 하는 소리야?”

“뻔하지…….”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네 생각이랑 내 생각은 많은 차이가 있을걸.”

“뭐든 간에 하지 마. 그리고 이거 좀 놔.”

하여간 또라이 새끼.

퍽퍽 때리며 진저리를 치자 이원이 지호를 놓아주었다. 지호는 반쯤 벗겨진 모자를 다시 꾹 눌러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쳐다보진 않은 것 같지만……. 이렇게 노닥거린 시점에서 어차피 다 들켰겠다.

이원이 등장하고 고작 몇 분 만에 몹시 피곤해졌다.

지호는 의자를 뒤로 끌어 이원과 거리를 잔뜩 벌렸다. 그리고 이원에게 신경 쓰는 대신 경매에 올라온 아이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끝까지 하겠다 이거지…….”

“…….”

지호가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무시하자, 결국 한참 후에 이원이 한숨을 쉬었다.

“하고 싶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헌터 계속해.”

“네가 허락 안 해도 할 거거든?”

지호가 곧장 쏘아붙이자 이원이 슬쩍 웃었다.

“지호는 나랑 결혼도 안 해 주지만, 내가 최대한 내조해 줄게.”

“지랄…….”

욕하던 지호의 시선이 다시 옆으로 돌아갔다.

마침 경매장에서는 지호가 내놓은 마석이 막 소개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지호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저게 얼마에 팔리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예산이 결정된다. 얼마에 팔리든 후려친 가격이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비싼 가격에 팔려야만 한다.

마석이 얼마에 낙찰될지 신경 쓰여서 지호는 늘어졌던 자세를 똑바로 세워 앉았다.

“저거, 네 거야?”

“응.”

지호는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가격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이 기세라면 20억은 넘을지도 모르겠는데. 꽤 만족스러운 금액이다.

그때, 가만히 보고 있던 이원이 나섰다.

13억, 13억 5천으로 조금씩 오르던 마석에 이원이 제시한 가격은…….

“3백, 3백억 골드 나왔습니다.”

열 배를 훌쩍 뛰어넘은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이런 일에 익숙한 경매사조차 당황했는지 순간 말을 더듬었다.

순식간에 수십 배나 치솟은 입찰액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쪽을 쳐다보지도 못하던 시선이 슬그머니 다시 모인다. 10억에서 30억 정도에 거래될 마석에 300억씩이나 쓸 만한 인물은 주이원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히 더 높은 금액을 부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지호가 등록했던 마석은 300억 골드에 낙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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