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스템(6)
“자, 그럼 간다.”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태웅이 문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선태웅의 손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붉은빛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아름다우면서도 불길한 광경이었다.
빛이 문의 가장자리까지 모두 가 닿은 순간.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문이 물리 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가벼운 움직임으로 소리도 없이 스르르 밀려난다.
열린 문 너머는 새카만 먹물을 부어 둔 것처럼 빛 한 점 없이 캄캄했다.
아니, 단순히 빛이 없다는 말로는 그 안쪽을 모두 묘사할 수 없다.
거대한 어둠 자체가 숨을 죽이고 웅크린 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둠.
그리고 어둠으로 묘사되는 그에 맞닿은 것들.
절망, 질투, 증오, 공포, 병, 죽음…….
판도라가 상자를 열기 전 상자에 갇혀 있던 온갖 해악들이 이 던전의 가장 안쪽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봉인된 상자를 열어 버렸다.
“이런 씨발…….”
태웅의 목소리에는 조금 전까지 타오르던 투지가 완전히 꺾여 짓눌려 있다. 볼품없이 떨리는 태웅의 몸.
물론, 지호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윽…….”
몬스터가 부여하는 절망과 공포가 정신을 파고든다. 여기서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속살거린다.
이건, 감히 쓰러트릴 수 없다.
이 몬스터는 결코 S급 수준이 아니다. 어쩌면 SS급조차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보고된 바가 없는 형태의 몬스터. 약점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기묘한 형태. 게다가 애초에 인간의 의욕을 뿌리부터 꺾어 버리는 강력한 정신 지배 계통의 스킬까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
지나치게 높은 급도 문제이지만, 저 몬스터가 주는 공포에 저항하지 못한 채 사로잡힌 채로는.
끼이이이이익.
얼어붙은 두 사람을 움직인 건 손톱을 세워서 철판을 긁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소음이었다.
극한의 공포에 되레 생존 본능이 깨어났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얼어붙어 있던 정신이 깨어난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제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멍청하게 굴지 말고 움직여!’
마지막이라고 결심한 게 헌터로서의 마지막이지 생의 마지막이 아니다. 여기서 멍청하게 쫄아 있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지호는 후들거리는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떨리는 손끝이 지호의 의지대로 움찔거리다 까딱, 움직여졌다. 그러자 고장이 난 것처럼 멈춰 있던 몸에 자유가 찾아왔다.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다. 지호는 여전히 얼어붙은 태웅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몸을 던졌다.
카가각!
거대한 어둠 속에서 무형의 충격파가 두 사람이 있던 곳을 덮쳤다. 지호가 태웅을 잡고 몸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바로 몸이 두 동강 났을 만한 위력이었다.
“야, 선태웅!”
지호는 이를 악문 채 쓰러진 태웅의 뺨을 쳤다. 철썩 소리가 났음에도 태웅의 눈빛은 여전히 멍했다.
태웅은 자의로 공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적이 건 정신 계열 스킬에서 자연적으로 빠져나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등급이 더 낮은 지호가 쉽게 상태 이상에서 빠져나온 게 사실 기적이었다.
느긋하게 깨우고 있을 틈도 없었다. 지호는 태웅을 거의 안다시피 잡고 뛰어오면서 외쳤다.
“정신 차려, 선태웅! 저건 어둠이야. 주변을 밝히면 사라질 거라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지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어둠은 빛에 물러난다. 산업이 발전하기 전까지 인류의 밤을 밝혀 주던 것이 바로 불이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이긴 해도 상성으로는 선태웅이 유리하다.
선태웅만 깨어난다면.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태웅을 안고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하면서 지호는 품에서 포션을 꺼냈다. 먹여 줄 틈도 없어서 병째로 태웅의 머리에 내리쳤다.
두 병이나 들이붓자 그제야 태웅의 풀린 눈에 또렷한 빛이 돌아왔다.
“아, 어…….”
곧장 정신이 들진 않는지 멍하니 신음하던 태웅은 지호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최대 전력인 태웅을 보호하느라 지호의 몸은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다. 특히, 태웅을 감싸며 생긴 팔의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제길.”
자존심 때문인지 미안하단 말은 못하고 태웅이 지호를 뿌리치고 똑바로 섰다.
“괜찮아요?”
“어, 그래.”
태웅이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정면을 쏘아본다. 괜한 자존심 세우는 게 좀 같잖긴 해도 정신은 차린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불의 장벽.]
태웅이 스킬을 사용하자 사람 키의 두 배만 한 불길이 장벽처럼 높게 치솟았다. 그러자 보스 몬스터가 날려 보내는 공격의 위력이 확연히 약해졌다.
쿠웅!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닿으면 치명상을 입을 만한 위력이었다.
문 너머의 공간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보스 몬스터를 견제하기 위해 태웅은 장벽을 유지했다. 그리고 발을 땅으로 툭 쳤다.
태웅의 발끝에서 붉은 실선 같은 마력이 수십 갈래로 쭉 뻗어 나갔다. 마력선은 순식간에 문의 안쪽까지 이어졌다.
[점화.]
태웅은 실선이 시작된 발밑에 강한 마력을 쏟아부으며 스킬을 사용했다. 평소 태웅이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스킬인 [점화]는 조금 전 사용한 스킬과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마치 도화선처럼 타고 간 마력은 허공에 날리는 것보다 더 강한 위력으로 폭발했다. 흡사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는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거대한 폭음이 일었다.
콰과과광!
요란한 불꽃 아래 마침내 빛 한 점 없는 어둠이 실체를 드러냈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무형의 존재라고 생각했던 보스 몬스터는 중앙에 거대한 바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몬스터의 몸에 움직일 만한 팔이나 다리는 없다. 대신 감고 있는 거대한 눈과 쉴 새 없이 달싹거리는 수백 개의 입이 몸체를 빼곡하게 채웠다.
모습이 드러난 보스 몬스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동시에 수백 개의 오물거리던 입이 한 번에 쩍 벌어졌다.
「카가가각!」
입이 만들어 내는 파동이 일종의 거대한 충격파로 변해 이쪽으로 날아왔다.
“B급!”
“윽!”
지호는 간발의 차로 날아온 공격을 피했다. 충분히 주의하고 있었는데 이전보다 공격이 날아오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공격 패턴이 바뀐 것 같으니까 집중해!”
“집중하고 있거든!”
조금 전까지 공포에 질려 있던 놈이 잔소리하는 게 아니꼬워 지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 정신을 집중했다.
공간을 가득 채웠던 어둠은 다시 차오르지 않는다.
선태웅 역시 품에서 마력 포션을 꺼내 마시면서 몬스터에게 공격을 쏟아부었다. 화염이 몸에 닿아 폭발할 때마다 몬스터의 입들이 지져지며 비명을 질렀다. 입의 수가 줄어들수록 날아드는 공격의 위력이 줄어들었다.
몰아붙이는 건 순조롭다. 그럼에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입의 수가 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때.
지금까지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스르르 열리고 그 아래에 있던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 새카만 홍채. 염소의 동공처럼 가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은 피처럼 새빨간 색이다.
동공이 번쩍이자 새카맣던 홍채 역시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요요히 빛났다. 그와 동시에 비명을 지르던 입들이 귓가에 속삭이듯이 아주 작게 달싹인다.
「지호야.」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는 주이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늘 듣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친숙하고 다정하다 못해 달콤한 목소리.
「괜찮아, 지호야.」
「이제 쉬어도 돼.」
「가만히 있어.」
「힘들었잖아.」
현혹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지호는 떨떠름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뭔 개수작이야?”
사람의 정신을 파고들어 조종하는 몬스터들은 흔히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거나 약한 대상을 베낀다. 하지만 지호에게 얄미운 소꿉친구 겸 구 라이벌 놈의 목소리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하지만 선태웅은 사정이 달랐다. 이번에도 훌륭하게 적의 스킬에 당한 건지 태웅의 눈에서 또다시 초점이 사라졌다.
“아, 진짜!”
또냐?
지호는 짜증스럽게 미리 쥐고 있던 포션 병을 선태웅의 머리에 내리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한 번으로는 태웅의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날아드는 공격을 태웅을 안은 채 가까스로 피하며 지호는 포션을 두 병 더 선태웅의 머리 위에서 깨 버렸다. 그제야 선태웅의 눈에 희미하게 초점이 돌아온다.
“정신, 차리라고……!”
이를 악문 지호가 포션 병을 한 번 더 깨 버리자 그제야 태웅의 눈에 완전히 빛이 돌아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태웅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이제 알아서 잘 좀, 하라고요…….”
힘겹게 말하는 지호의 입에서 쿨럭, 피가 한 움큼 토해졌다.
더 빨라진 공격을 지호가 태웅을 붙잡은 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몸으로 막았다.
직격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빨리 치료받지 않으면 곧 죽음에 이를 만한 중상이다.
“너, 왜 날 위해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선태웅이 중얼거렸지만 대답해 줄 기력은 없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태웅이 예뻐서 구해 준 건 아니다.
이게 훨씬 효율이 좋을 뿐.
적을 쓰러트릴 가망이 전혀 없는 신지호가 몸을 바쳐서라도 선태웅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게 이길 확률이 높다.
괜히 감동할 필요 없다고 설명해 줄 정신은 없었다. 시야는 온통 붉게 물들고, 그러다가 다시 검게 내려앉는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끝… 이야.’
이걸로, 끝.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니 그간의 모든 고민이 사라지고 묘하게 차분해진다.
만에 하나, 선태웅이 적을 빨리 죽인다면 운 좋게 지호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운이 좋으리라고 낙관하지는 않지만…….
아무렴 둘 다 죽는 것보다는 한 명만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
완벽한 결과는 아니지만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이 정도면 마지막에라도 충분히 한 사람의 몫을 한 게 아닐까.
그래, 이걸로 됐다.
정말 그걸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