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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스템(3) (7/283)

2. 시스템(3)

의식이 정신세계의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다. 종종 느끼는 익숙한 감각에 신지호는 얌전히 휩쓸렸다.

지난 2년간, 의식 불명의 상태일 때 신지호의 의식은 이런 식으로 목적 없이 표류했다.

그때 무엇을 봤는지 정확히 기억나는 건 아니었지만 감각만은 선명했다.

아련한 그리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안타까움까지.

가족이나 간병인의 말에 따르면 쓰러져 있는 동안, 신지호가 무엇에 반응했는지 모르게 눈물을 흘린 일이 많았다고 했다.

대체 그간 무슨 꿈을 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로도 종종, 과거가 이렇게 꿈의 형태로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이건 실제가 아닌 꿈이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일이다.

신지호는 과거를 비추는 꿈을 분명하게 인지한 채로 눈을 굴렸다.

꿈속의 세상이 형태를 이뤄 의식 속에 구현된다.

시야가 환하게 밝다. 눈앞에 환한 빛을 받은 커튼이 흰 구름이 만든 그림자처럼 나부끼고, 그 너머에는 나무와 철로 만든 책걸상들이 늘어서 있다. 멀리서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요란한 발소리.

익숙하지만 조금 먼 기억에 자리한 풍경. 여긴 학교 수업이 막 끝난 교실 안이었다.

꿈속인데도 감각이 실재하는 것처럼 생생하다. 더위가 들러붙은 팔 위로 타인의 온기가 얹어진다. 지호는 팔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흰 교복 셔츠 아래 드러난 희멀건 손목은 제 것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누군가의 손에 잡혀 있었다.

‘꿈 깨, 신지호.’

장난스러운 주이원의 목소리. 신지호는 고개를 든다. 하지만 창 너머에서 비치는 역광 탓에 상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다만 희미하게 보이는 미소 띤 입매가 어딘지 그리운 느낌이다.

‘무슨 꿈을 깨라는 건데?’

질문하는 신지호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다. 토라진 듯한 목소리지만 거기에는 애정이 담뿍 담겨 있다. 시원스레 올라간 주이원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언뜻, 상대의 눈이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상대를 대하듯 다정하고 상냥한 눈빛이…….

‘네가 1등 하는 거. 넌 다음번에도 2등일 거고, 넌 나 못 이겨.’

아니, 이 새끼가?

“윽…….”

신지호는 잔뜩 빡친 채 꿈에서 깨어났다.

주이원, 이 빌어먹을 놈. 저딴 소리도 했었단 말이야? 하루 이틀 약 올린 게 아니지만 생각날 때마다 화난다.

홧김에 곧장 몸을 일으키려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냥 뒈져 버리지, 깼냐?”

머리를 부여잡는데 선태웅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지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쓰러지기 전에 받은 충격 때문인지 시야가 곧장 돌아오지 않는다.

“얼씨구. 가지가지 하는군.”

“잠깐만요,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냥 있어도 돼. 어차피 우리 둘 다 뒈졌으니까.”

평소처럼 시비를 건다기에는 미묘하게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그제야 신지호는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대응할 새도 없이 두 사람을 덮치고 집어삼킨 어둠.

가끔 자료로 남은 영상 속에서나 목격했던 상황이었다.

신지호는 믿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주변을 관찰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서울 한복판에 있었음에도 태양 빛이 내리쬐지 않는 어떤 공간의 내부였다. 눈꺼풀 위로 번져 드는 태양 특유의 환한 빛이 없었다.

공간의 이변을 인식하자마자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쳐 든다. 비스듬히 쓰러진 지호의 몸을 받치는 건 인간의 손이 닿은 아스팔트 바닥과는 거리가 먼, 바스러지는 울퉁불퉁한 바위였다.

희미하게 돌아오는 시야에 서울 한복판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거대한 암석 덩어리들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전이된 정체불명의 공간. 결론은 하나다.

두 사람은 게이트를 통해 던전에 들어왔다.

“던전…….”

“그래, 던전 안이다.”

분명 F급의 균열로 예측했는데 던전이 출현하다니…….

사실 균열과 게이트는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다.

다만 균열은 무질서한 형태로 나타나 그 틈에서 몬스터를 쏟아 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듯 스르르 사라진다.

게이트는 균열이 확장되어 문의 형태로 발전한 것을 뜻한다. 문 너머는 다른 차원으로 추정되는데, 하나같이 던전과 연결되어 있었다.

던전과 이어진 게이트에서도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데, 던전은 반드시 일정 시간 내에 공략을 해야 했다. 공략 조건은 대부분 보스 몬스터를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던전을 공략하는, 소위 레이드라고 불리는 행위는 A급 이상 길드의 전유물이다.

헌터의 수가 부족한 다른 나라에서는 B나 C급의 길드까지 던전을 맡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한국은 인구 대비 헌터 수가 가장 많은 나라다. A급 길드까지만 던전을 공략해도 충분하기에 중위권 이하의 길드와는 연이 먼 존재다.

즉 던전은 노네임이나 신지호와 거리가 먼 존재였다.

조금 전까지는.

F급 균열이 게이트로 확장된다고?

예측이 어긋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틀리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시시각각 절망적으로 변하는 지호의 표정을 본 선태웅이 한숨을 쉬었다.

“통로에 돌아다니는 놈들이 최소 B급은 되겠더라. 그럼 보스는 최소 S급이야. 운 나쁘면 SS급일 수도 있겠지.”

“…….”

“넌 그냥 안 일어나는 게 곱게 죽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 일어나기 전에 자비를 베풀어서 미리 죽여 둘 걸 그랬나?”

빈정거리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저게 덕담이었다.

정말 보스가 S급 이상이라면, 두 사람이 쓰러트릴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굶어 죽든가, 자살하든가, 둘 중 하나 선택하는 게 낫겠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아사는 괴롭다던데, 자살하는 게 편할 수도 있어.”

늘 자신만만하던 평소와 달리 선태웅이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축 늘어진 꼴을 보며 비웃어 줄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던전은 크게 개방형, 폐쇄형, 채집형, 특수형의 네 종류로 나뉜다.

그중 이것처럼 갑자기 사람을 덮쳐들어 안에 가두는 형태의 던전은 채집형이다.

게이트가 상시 개방되어 있어 출입이 자유로운 개방형 던전이나, 일정한 수의 인원이 들어가면 게이트가 봉쇄되는 폐쇄형, 애초에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만이 게이트를 통과해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특수형 던전과는 다르다.

채집형 던전은 사냥이라도 하듯 게이트 주변의 사람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폐쇄형 던전과 마찬가지로 게이트를 완전히 봉쇄한다. 한 번 게이트가 봉쇄되면 바깥에서 진입하는 게 불가능해 지원을 요청할 수 없었다.

폐쇄형이나 채집형 던전의 닫힌 입구가 다시 열리려면 안에 갇힌 사람이 모두 죽거나, 특정한 조건을 충족해 안에 갇힌 사람이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조건이 바로, 대부분 던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보스 몬스터를 죽이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채집형 던전이 발견되었을 때 첫 발견자는 대부분 사망했다. 평범한 사람이 던전 보스를 퇴치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헌터가 첫 발견자라면 일반적으로는 운이 좋은 경우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역시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선태웅의 말대로라면 이 던전은 지나치게 급이 높다. A급과 B급 헌터 두 사람이 깨기란 불가능했다.

신지호는 욕을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는 선태웅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심란한 건 지호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아빠…….’

가장 먼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사람은 부모님이다.

집안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엄격한 환경에서 자란 형이나 누나와 달리,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며 사랑만 받고 자란 만큼 부모님은 지호를 몹시 아꼈다.

헌터 일을 하느니 차라리 다른 재벌가 망나니 놈들처럼 술이나 마약이라도 하라던 부모님의 간청이 떠올랐다.

2년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불효자식 놈은 거기에 반발해 집을 뛰쳐나왔고…….

결국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지원해 주셨지만 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라니.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선태웅의 말대로 자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차라리 곱게 둘 다 자살한다면 던전이 곧장 열릴 테고, 시신 정도는 온전하게 부모님 곁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넌 나 못 이겨.’

꿈에서 본 얄미운 주이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계 제일의 헌터 겸 빌어먹을 소꿉친구 놈.

아직 학교에 다니던 무렵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비등했다. 늘 이원이 1등이고, 지호는 2등.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들 사이에 못해도 수십만 명 정도가 서 있다. 평판으로 따지자면 수십억 명쯤 서 있을지도 모른다.

이원은 한심하게 죽은 지호를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어차피 걘 안 돼. 그냥 편하게 놀면서 살았으면 죽진 않았을 텐데.’

설마 이런 식으로 비꼬는 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갔다.

이원이 지호를 심하게 비웃지는 않더라도, 한심한 소꿉친구와의 추억 따위는 몇 년 안으로 털어 버리고 깔끔하게 잊겠지.

그리고 앞으로도 승승장구하며 대대손손 이름을 남길 것이다.

반대로 신지호는 세계 최초의 헌터이지만 허무하게 죽은 인물로서 역사에 이름이 조롱으로 남을 것이다. 지금보다도 훨씬 심하게 조롱하다가 결국에는 잊혀지겠지.

‘그건 싫어.’

지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세게 꽉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기어이 피를 냈지만 그 덕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어찌 죽든 사람 우스워질 꼴이 훤히 보이는데 어떻게 여기서 죽겠는가? 발악이라도 해 봐야지.

지호는 여전히 머리를 감싸 쥔 채 절망하고 있는 태웅을 쏘아 보았다.

“선태웅 씨, 죽고 싶으면 죽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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