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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의 B급(3) (4/283)

1. 최초의 B급(3)

존나 즐거워 보이네, 개새끼…….

신지호는 꽃다발로 주이원을 후려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보통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던데, 지금 여기서 주이원을 꽃으로 때린다면 불쌍한 건 꽃이다. 꽃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지호는 이원을 때리는 대신 한숨만 푹 내쉬었다.

“넌 진짜, 한가하지도 않은 놈이 왜 이러고 사냐? 생산적으로 살아.”

“생산적으로 살고 있어.”

“대체 어디가?”

“워낙 일이 바쁘니까 피로나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근데 왜 여기 있냐?”

“지금 스트레스 풀고 있잖아.”

“……나 놀리면서?”

주이원이 또 웃는다. 발끈한 지호는 결국 죄 없는 꽃으로 이원을 내려쳤다. 이원은 자신을 때리는 꽃다발을 뺏어 얌전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대체 꽃다발에 뭔 짓을 한 건지, SS급 헌터를 내리쳤는데도 싱싱한 장미 꽃다발에서는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는다. 이원은 형태만 조금 망가진 꽃다발을 손보며 웃었다.

“난 열심히 살고 있어.”

“그래 보이긴 한다.”

“오늘은 청혼도 했잖아.”

“맨날 까이는 그거 말이지……. 그건 비생산적이야. 성공할 일이 영원히 없는 일이잖아?”

“될 때까지 할 건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

“네가 찍은 게 한, 천 번은 될걸.”

“겨우? 몇만 번은 될 텐데.”

본인이 말했던 열 번을 천 배쯤 늘리면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주이원이 혼자 웃는다.

인터넷에서 주이원과 신지호가 사귀는 게 찐이라고 헛소리하는 사람한테 이 광경을 보여 주고 싶다.

정말로 주이원이 자신을 좋아한다면, 이렇게 매번 까이면서도 타격감 없이 멀쩡할 수가 있겠는가?

이원의 이런 장난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그 역사가 제법 오래되었다. 헌터가 되고 나서는 물질적 공세가 더해졌을 뿐.

한결같은 장난인 걸 아니까 지호도 매번 가볍게 대응했다.

“너 결혼하면 축의금은 넣어 줄 테니까 딴 데 가서 알아봐라.”

“지호는 세컨드도 괜찮다는 거야?”

“뭐?”

“나랑 사귀는데 내가 결혼해도 된다니, 너무 파격적이다. 지호가 날 위해 그 정도까지 감수해 주겠다면 기쁘지만…….”

“미쳤냐?”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좀 선을 넘은 발언에 지호가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이원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아, 혹시 불륜이 취향이야? 금단의 관계가 꼴려? 좀 곤란해. 난 지호 말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진 않거든.”

“닥치랬지.”

“으응, 애초에 나는 지호밖에 없는걸. 애초에 지호를 위해 간직한 동정인데,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수는 없지.”

귀를 씻어 내고 싶다. 슬프게도 이미 입력된 정보이긴 했지만 ─ 주이원이 끊임없이 자기 어필을 한 결과였다 ─ 들을 때마다 짜증 났다.

욕을 바가지로 먹여 줄까 하다가, 이놈은 지호가 화내는 걸 보면서 즐거워하는 변태라 꾹 참았다. 이원은 지호가 화내든 말든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지호야, 나 이번에 한 인터뷰 봤어?”

“무슨 인터뷰? 네가 인터뷰를 한두 개 하냐.”

“가장 최근 거지. 이번에 P에서 나온 인터뷰.”

지호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누가 봐도 신지호를 지칭하던 그 X같은 인터뷰는 안 보려고 해도 안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소소하게 화제가 됐으니까.

인터뷰의 대상은 누가 봐도 신지호였다. 물론 묘사는 실제의 신지호와 상당히 달랐지만.

신지호가 보기에 자신과 맞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정작 주변 사람에게 다정하고 무르고 섬세하고, 그런 사람에게 의지가 되어 주고 싶다고 했던가. 이건 완전 가상의 신지호였다.

“야, 애초에 전제부터 틀렸거든?”

“뭐가?”

“누가 예민하고 섬세하다고… 그리고 내가 진짜 그런 인간이라도 넌 의지 안 해. 내가 미쳤냐?”

지호는 제게 매번 못된 장난을 치는 소꿉친구를 향해 코웃음 쳤다.

지호의 추측이지만, 아무래도 이원은 비밀스러운 여친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연막을 위해 가깝고 만만한 신지호를 방패막이로 세운 거다.

더 큰 대한민국이 아직 오지 않은 탓에,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해도 기사에서는 [주이원, 신지호와 여전한 우정 과시……] 이런 타이틀만 뽑아냈으니까.

“솔직히 말해 봐. 너 여친이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숨기는 거야.”

“여친 없어. 내가 몇 번 말해야 해?”

“믿을 수 있게 처신을 하든가……. 너, 나 방패막이로 쓰는 거 아냐?”

“아니라니까. 진짜 아냐. 내가 누구 숨겨 놓고 만날 시간이 어딨어.”

“…….”

그건 맞는 말이다.

주이원의 하루는 분 단위로 쪼개져서 돌아갔다. 정말 바쁘게 사는 놈이었다. SS급 헌터로서 던전 공략 외에도 수많은 일정이 있다. 행사에 참여하고 가끔은 방송에도 나가고 인터뷰도 빼지 않고…….

워낙 지호를 자주 찾아와서 깜박깜박하게 되지만, 앞으로의 일정이 연 단위로 빼곡하게 차 있는 놈이다.

대통령보다 높은 듯한 주이원의 인지도는 세계 1위의 헌터인 덕분도 있지만, 그의 왕성한 활동에서도 기인했다.

“방패막이로 쓸 거 아니면 자꾸 언론에 개소리하지 마라, 좀. 왜 그러는 거야?”

“지호 인기 많잖아. 누가 채 가면 안 되니까 찜해 두는 거지. 나랑 결혼해야 하니까.”

“아니, 씨발, 안 한다고…….”

“난 빨리 지호랑 결혼해서 은퇴하고 싶어. 그럼 내가 내조해 줄게.”

“미쳤나.”

청람 망하는 소리 하고 있다. 청람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길드가 된 게 절반은 주이원 덕분인데.

진지하게 따져 보려던 지호는 이마를 짚었다.

헛소리에 괜히 열을 내며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었다. 괜히 머리만 아프지…….

그때, 주이원이 신지호에게 바싹 고개를 들이밀었다. 상대의 피부 결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감에 신지호는 바짝 긴장했다.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봐 온 얼굴인데도 이렇게 가까워질 때면 새삼 긴장됐다.

실력만큼이나 외모로 유명한 녀석이기도 하고, 헌터로 활약하며 사선을 넘나들면서 묘하게 무겁고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덧씌워지기도 했고.

물론 반응한다는 티를 내고 싶진 않아서 지호는 태연한 척 퉁명스럽게 밀어냈다.

“뭐야.”

“머리 아파?”

“……조금. 좀 떨어져.”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주이원은 흥이 떨어진 건지 뭔지, 다소 가라앉은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알았어. 그래…….”

“어.”

“그럼 나, 이만 가 볼게, 자기야.”

갑작스러운 작별 인사에 지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간다고?”

“응. 안녕.”

“어…….”

지금까지 이상한 농담 따먹기나 하며 질척거린 게 무색하게도 주이원의 태도는 곧장 차분해졌다. 짧게 인사한 주이원이 곧장 몸을 돌렸다. 그리고 왔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물러났다.

순식간에 병실은 지호 혼자만 남게 되었다. 지호는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눈을 떴을 때는 그저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장소였던 병실이었는데.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1인실이 갑자기 휑하게 느껴졌다.

“왜 왔대…….”

머리가 아프다고 하자마자 가 버려서인지, 직접 쫓아낸 게 아닌데도 괜히 죄책감이 밀려든다.

헛소리 좀 그만하길 바랐지만 이렇게 쫓아낼 생각은 아니었다. 물론 쫓아내지 않아도 금방 가 버렸겠지만 말이다.

매번 이원은 이런 식으로 지호를 방문해서 5분 정도, 짧은 시간 동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 대며 놀리다가 가 버린다.

바쁠 때나 바쁘지 않을 때나 부지런히 찾아와서 일주일 이상 못 본 적이 없을 정도다.

한국에서 제일 바쁘다는 놈이 굳이 시간 빼서 찾아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분명 주이원의 일정은 1년 365일 중 340일쯤 차 있을 텐데. 찾아오는 횟수만 보자면 거의 백수였다.

아무리 SS급 헌터의 체력이 좋다지만 피곤하지 않을 리 없다. 얄미운 놈이지만 가족처럼 지낸 놈이라서 그런지 솔직히 걱정되기는 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헛소리 좀 작작하라고 할 때와 마찬가지로, 찾아오지 말고 쉬라는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놈이다.

말만 좋아하느니 어쩌느니 할 뿐, 순 제멋대로인 놈.

“모르겠다……. 지가 알아서 하겠지.”

진지하게 저놈이 왜 저러나, 이해해 보려고 하던 때도 있었다. 물론 그럴싸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직접 물어봐도 시시껄렁한 소리만 해 댔고.

그래서 그냥 워낙 잘난 놈이니 뭐든 잘 풀려서 인생이 심심한가 보다,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스트레스를 술 마시고 약을 하고 문란하게 살며 푸는 것보단 틈내서 찾아와 지호를 놀리는 게 건전하긴 하다.

어차피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오해받는 게 싫어서라도 이상한 소리는 알아서 그만할 것이다.

밉고 짜증이 나도 소꿉친구니까 조금은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저놈은 예전부터 신지호를 놀리는 걸 삶의 낙으로 여기던 녀석이다.

중학교 때부터인가, 주이원은 징그럽게 달라붙으며 지호를 ‘자기야’ 따위로 부르기 시작했다. 지호가 질색하면 즐거워하고, 그런데 남이 지호를 그렇게 부르면 화내고.

저놈이 진짜 나를 좋아하나, 의심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주이원은 신지호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너무 진심으로 놀려 댔다.

특히 매번 이원이 1등, 지호가 2등인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잔뜩 뻐기면서 의기양양한 얼굴이란…….

좋아하는 사람에겐 절대 그렇게 못 한다. 지호였다면 최소 한두 번쯤은 일부러라도 져 줬을 것이다. 아니면 미안해하거나.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이원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착각은 쓰레기통에 처박은 지 몇 년 됐다.

그리고 사실 이원이 지호를 좋아하는 것처럼 친근하게 인터뷰하는 게, 동성애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찐한 우정으로 포장되고는 했다. 이원의 이미지가 워낙 좋아서 덕분에 지호의 이미지가 아주 조금 세탁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고마웠는데 더 세탁될 것도 없이 인터넷 밈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 계속 저러는 건, 역시 놀리는 거라고밖엔 느껴지지 않지만.

신지호는 가 버린 주이원에게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지호 주제에 주이원을 걱정씩이나 하다니. 헌터 커뮤니티에서 알았다가는 사흘 밤낮으로 비웃고 까댈 생각이다.

다시 지호가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을 때, 또다시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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