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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의 B급(2) (3/283)
  • 1. 최초의 B급(2)

    B급.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꽤 쓸 만한 등급이다.

    문제는 신지호가 지나치게 과도한 기대를 받았다는 데 있었다.

    ‘최초의 각성자’로서 한때 전 세계가 주목한 각성자.

    그러나 막상 까 보니 결과물은 특별한 임팩트가 없는 B급.

    모두가 실망했다. 과도한 기대만큼이나 실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단지 등급이 낮게 나왔을 뿐이라면 신지호가 지금처럼 조롱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신지호가 현장에서 자주 기절하거나 피를 토하면서 발생했다.

    본래 각성자의 육체는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하다. 고등급의 각성자일수록 육체는 인간을 초월해 강인해진다.

    물론 힐러나 특수 계통 스킬을 지녀 전투력이 약한 헌터가 예외적으로 높은 등급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신지호는 [강화] 스킬을 지닌 평범한 전투계 헌터였다. 몸 단단한 걸로 먹고사는 전투계 헌터.

    그런데 B급 전투계 헌터가 매일 빈혈에 시달리고 쓰러지기까지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때문에 신지호는 B급 판정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온갖 추문에 휩싸였다.

    신지호의 판정에 다른 무언가가 개입되지 않았는지 성토하는 소리가 순식간에 대한민국을, 그리고 전 세계를 들쑤셨다.

    안타깝게도 추문에 휩싸인 것은 신지호만이 아니었다.

    신지호의 아버지 신중호가 회장으로 있는 청람 그룹, 청람 그룹 산하의 청람 길드, 등급을 판정한 헌터 협회의 한국 지부에까지 의심이 쏟아졌다.

    청람이 협회에 돈을 먹여서 헌터의 등급을 조작한다는 의혹이 바싹 마른 들판에 불을 붙인 것처럼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재벌, 협회, 비리. 사람들 불 지르기 딱 좋은 세 가지 주제는 불판에 올라간 신지호의 위에 기름처럼 끼얹어졌다.

    국내로도 모자라 국외에서도 몇 차례나 재검사를 받고 나서야 논란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신지호를 못마땅하게 보는 의혹의 눈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신지호는 최초의 각성자이지만 어딘가 비리의 냄새가 구리게 나는 헌터였다.

    특히 헌터들은 등급 조작설을 그 누구보다 강렬히 신봉했고 정말 신지호를 진심으로 싫어했다. 신지호 이름 세 글자만 나오면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며 까댔다.

    욕을 먹으면서도 신지호는 물러나는 대신 오히려 활동을 늘렸다. 가족들은 지호를 계속 뜯어말렸지만, 지호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신지호가 여기서 물러나면 사람들이 ‘아, 그만두고 싶으니까 그만두는구나’라고 생각하겠는가? ‘돈으로 비벼 보려다가 무능하니까 슬그머니 내빼는구나’라고 생각하겠지.

    전 세계에 무능하고 보잘것없는 데다 비리까지 저지른 헌터로 이름을 날리고 여기서 그만둔다고? 그건 싫었다.

    신지호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었다.

    ‘사실 이쯤 되면 그냥 때려치우는 게 낫지 않나 싶긴 한데.’

    신지호는 자신이 세운 길드 노네임의 길드장이다.

    처음부터 대단한 열의를 갖고 만든 길드는 아니었다. 주이원이 청람에 들어오라고 제안하기에 안 들어간다고 고집부리며 만든 길드에 불과했다. 이름부터 대충 지었고.

    하지만 마음먹은 이후로는 정말 열심히 했다. 물론 노력만으로 된 건 아니고 돈의 힘도 있었지만.

    덕분에 1년간 신지호의 길드인 노네임은 중위권 길드 중에서는 꽤 탄탄하게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노네임의 한계였다.

    노네임은 여전히 금수저가 취미로 운영하는 길드의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신지호가 사비를 쏟아붓지 않았다면 길드는 진작 망했을 테니까.

    단순히 길드만 유지해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헌터에 관심 없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신지호는 이미 시들해진 화제고,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도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는 한물간 떡밥 취급이었다. 헌터들이야 뭐, 죽어라 까고 있고.

    지금의 여론을 반전시키려면 S급으로 판정받은 던전 하나쯤은 공략해 줘야 한다.

    하지만 그건 지호가 간절히 바라고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노네임은 영원히 중위권 길드에 머물 것이다.

    정해진 운명이다. 타개할 방법 따위는 없다.

    외부 인사를 영입해서 던전을 공략하는 방법도 있다. 도와 달라고 하면 돈 한 푼 안 받고 도와줄 헌터도 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싫었다.

    심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누워 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이 나지…….”

    신지호는 생각을 떨쳐 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어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1년째. 벌써 포기를 말하기엔 이른 시기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집이나 가야겠다. 퇴원을 위해 환자복을 갈아입으려던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대답 대신에 멋대로 문이 열렸다. 지호는 혀를 찼다. 저렇게 싸가지 없이 멋대로 들어올 인간은 하나뿐이었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버르장머리 없는 남자가 곧장 지호에게 다가왔다.

    남자의 이름은 주이원.

    주이원에게 붙는 수식어는 수없이 많다.

    세계 유일의 SS급 헌터.

    2위와의 격차가 압도적인 절대적 1위.

    전 세계에서 최초로 던전을 공략하고 게이트의 원리를 밝혀낸 헌터.

    제 손으로 길드를 설립해도 됐을 텐데 굳이 청람의 산하에서 세워진 청람 길드로 들어가 길드장이 된 이후, 청람을 세계 제일의 길드로 키워 낸 남자.

    그리고 신지호와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지내 온 소꿉친구이자, 밉살맞은 한때의 라이벌이었다.

    그래, 한때는 그랬다.

    원래 두 사람은 한집에 살면서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함께 다녔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늘 경쟁했다.

    그리고 그 성적은 항상 주이원이 1등, 신지호가 2등이었다.

    이젠… 주이원은 1등이고, 신지호는 순위권 밖이라 차라리 등수 하나 차이 나던 그때가 그립기까지 한 과거가 됐지만.

    “자기야.”

    설탕을 잔뜩 쏟아부은 것처럼 달콤한 이원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언제 들어도 적응 안 되는 호칭이다. 지호는 괜히 팔을 긁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야, 왜 왔어.”

    “자기 보러 왔지. 일 끝나자마자 달려왔는데 안 반겨 줘?”

    “가서 씻고 잠이나 자라.”

    지호는 혀를 차며 상대를 훑어봤다.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오늘의 주이원은 각성자 관련 행사에 참석하는 일정이 있었다.

    주이원은 앞머리를 깔끔하게 올려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채 격식을 차린 정장을 입고 있었다. 생긴 껍데기만은 참 번듯하다.

    거기까지는 평소와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닌데, 한 손에 든 커다란 장미 꽃다발이 눈에 띈다. 격식 있는 행사라 저런 꽃다발을 받을 일이 없을 텐데, 어디서 받은 걸까.

    딱 봐도 수십 송이는 되어 보이는데, 설마 저런 걸 들고 병원 한복판을 걸어 다닌 걸까? 본인이 유명인이라는 자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무시하고 옷을 갈아입으려던 지호는 이상하게 집요한 시선에 멈칫했다. 주이원의 시선이 단추를 두 개쯤 풀고 있던 신지호의 손 부근에 가 있다.

    “…….”

    남들은 맑고 깨끗하다고 칭하는 주이원의 눈에서 묘한 안광이 번뜩인다.

    어쩐지 소름이 끼쳐서 지호는 곧장 옷을 갈아입고 퇴원하려던 계획을 보류한 채 단추를 도로 채웠다. 그제야 묘한 안광이 누그러진다.

    어색한 느낌이 사라지자 지호는 왠지 모르게 조금 안심하면서 장미 꽃다발 쪽으로 턱짓했다.

    “그건 뭐야. 받았어?”

    “궁금해?”

    “아니, 여기 올 거면 좀 놓고 오지 싶어서.”

    “내가 남한테 장미 받을 일이 뭐 있어. 우리 지호 주려고 산 거지.”

    “받을 일이 없기는 무슨……. 맨날 받잖아.”

    다른 나라에 가서 받은 환영 꽃다발만 수천 개는 될 거다. 지호의 말에 이원은 고개를 저었다.

    “내 손으로 받은 적은 없어. 비서한테 넘기지. 이건 너 주려고 내가 직접 만든 거거든?”

    “네가 만들었다고?”

    “응, 한 송이 한 송이 내가 직접 손질하고 꽃다발로 만들었는데.”

    진짠가.

    지호는 떨떠름하게 장미 꽃다발을 노려보았다. 주이원은 신지호를 좋아한다는 헛소리를 제외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 놈이었다.

    이원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꽃다발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가 꽃다발을 흔들 때마다 진하고 풍성한 장미 향이 기분 좋게 코를 간질인다.

    “받아 줘. 그냥 꽃 정도는 받아도 되잖아.”

    주이원은 평소에 선물 공세를 즐기는 편이었다. 던전에서 얻은 유용한 아이템이 주 선물이었는데 너무 좋은 아이템이 많아 부담스러웠다.

    유일하게 받아 준 아이템은 장갑 하나뿐이다. 장갑은 부모님까지 합세해서 그 정도는 끼고 다니라며 성화를 부리길래 어쩔 수 없이 받아 줬지만, 이후로는 쉽게 받아 주지 않자 종류를 바꾼 모양이었다.

    지호가 계속 떨떠름한 얼굴로 고민하자 주이원이 토라진 척을 했다.

    “맨날 거절만 하고.”

    “남자끼리 무슨 꽃이야.”

    “꽃에 하나하나 의미 부여하지 마, 지호야. 꽃도 못 사 줘?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데.”

    “가족 같은 사이잖아. 안 받아 줄 거야?”

    지호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아니, 이 치사한 놈.

    저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읜 이원은 지호의 부모님이 거둬 준 덕분에 함께 살았다.

    주이원을 그걸로 놀리는 놈들도 있었는데……. 다 지나간 예전 일이라지만 지호의 입장에서는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밉살맞다고 해도 일단 형제 같은 녀석이니까.

    “알았어, 받는다고…….”

    지호는 어쩔 수 없이 꽃을 받았다. 그러자 이원이 활짝 웃는다.

    “그럼 이제 나랑 결혼해 주는 거야?”

    “미친놈아, 꽃에 의미 부여하지 말라며.”

    “아무나 꽃을 주면 다 받아 줄 거야? 자기 쉬운 사람이구나.”

    “가족이래서 받은 거야, 가족이라.”

    “남편도 가족이지.”

    “개소리할 거면 도로 가져가.”

    “개소리가 아니고 진짜인데, 못 믿으니까 그렇지. 왜 못 믿을까? 내가 우리 지호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신지호가 진저리 치자 주이원이 큰 소리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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