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문이 열리며 누군가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율은 상상도 못 한 이의 정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어서 선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온다. 어머니! 율도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머니가 들고 있던 돌을 떨어트리더니 휘청 바닥에 쓰러졌다. 몇 년을 누워만 지내던 그녀가 일어선 것도 놀라운데 사람 머리통만 한 돌을 들고 광의 문짝을 부쉈다는 건 더 믿기지 않았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어찌 된 일입니까?”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버선발로 뛰쳐나온 선이가 율과 함께 어머니를 부축하여 마루로 옮겼다. 부엌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던 이도 나와 보더니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다.
“세상에. 이게 웬일이랍니까.”
“의원을 좀 불러 주십시오!”
그녀가 밖으로 뛰쳐나가고, 율은 하얗게 질린 어머니의 안색을 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의원의 말로는 오랜 병치레로 몸이 너무 쇠하여 기력을 찾을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 하였는데…. 여전히 믿기지 않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애틋한 눈으로 율을 바라봤다.
“안에서 아버지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 율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니의 비쩍 마른 손이 율의 뺨에 닿는다.
“그이가 약초도 구해 주고, 널 많이 챙겨 줬다지.”
“…….”
“가고 싶으냐…?”
율은 눈물을 애써 삼켰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어미한테 솔직히 말해 보거라…. 가고 싶어…?”
“…….”
“율아.”
율은 울컥하여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라고, 가족과 이곳에 남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마음은 자꾸 육지를 향한다.
“죄송해요…. 어머니….”
가고 싶어요…. 이락 님을 만나러 가고 싶어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자 어머니가 웃으며 애틋하게 안아 준다.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에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여길 떠나거라…. 가서, 널 아껴 주는 이하고 살아.”
그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던 율은 몸이 굳었다. 외출하였다던 아버지가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아버지는 밖에 나와 있는 어머니를 보고 놀란 듯하더니 부서진 광의 문짝을 보고서는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당신이 어떻게…. 몸은 괜찮소?”
그러나 율을 대하는 눈빛은 한없이 사나웠다. 네놈이 어떻게 나온 것이냐. 선이 네가 저놈을 꺼내 줬어? 아버지는 양손에 있던 것도 팽개치고 성큼성큼 율에게 다가왔다. 순간 어머니가 율의 손을 놓는다. 가거라, 어서.
단호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가도 됩니까…? 정말… 그래도 됩니까? 아버지가 코앞까지 다가왔고, 때마침 방으로 뛰어 들어간 선이 율의 봇짐을 꺼내 와 힘껏 던진다. 오라버니! 율은 그것을 잡아채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감히! 내 말을 무시하고!”
율은 저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아버지를 밀치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달아났다. 돌아보니 무섭게 쫓아오는 아버지와 어서 가라고 손짓하는 어머니, 눈물을 참는지 얼굴이 빨개진 누이의 모습이 각각 눈에 들어왔다.
다시 올게요. 반드시 올게요. 꼭 돌아오겠습니다….
***
“큰형님이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지 아시오?”
“몰라. 나도 답답해 죽겠다.”
“강에 뭐가 있나? 아님 누가 오기로 했든가.”
“오긴 누가 와. 방울이가 오면 또 모르겠다.”
대화를 나누던 왕태와 왕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용궁에서 온 다음 날부터 이락이 강둑에 죽을 치고 앉은 지 며칠째다. 혹여나 몸이 상할까 먹을 것들을 가져다주는데, 그것마저도 늘 남겨서 둘은 애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정말 방울이를 기다리시나? 왜?”
“그러니까, 내 말이. 대체 왜?”
곰곰이 생각하던 둘은 그간의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니 방율이 오고 나서부터는 이락이 여인을 만나지 않았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영월관에도 뜸하였고, 지나치도록 방율에게 아량을 베풀고 신경을 쓰지 않았나.
왕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큰형님이… 방울이를 좋아하나?”
왕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나도 방울이가 좋소. 형님도 좋아하는 거 아니우?”
“멍청하긴.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뭔데.”
“됐다, 말을 말자.”
그렇게 둘이 떠드는 사이 어느덧 강가에 도달하였다. 아니나 달라 오늘도 이락은 강둑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언덕을 올라가며 기척을 내는데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큰형님! 우리 왔습니다.”
“배도 안 고프십니까. 온종일 여기서 이러고 있게.”
이락은 대답하지 않고 강물만 쏘아봤다. 왕태는 먹을 음식과 물을 옆에다 놓아 줬다. 역시나 어제 가져다준 것도 그대로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이락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답답한 듯 물었다.
“뭘 그리 보고 계십니까?”
“그냥 오는 게 아니었다. 강제로라도 끌고 왔어야 하는 건데.”
이락이 혼잣말을 중얼대자 왕태는 그를 슬쩍 떠보았다.
“혹시 방울이?”
“그 아비가 붙잡은 게 분명하다. 바다에 갔을 때 확 죽여 버릴걸.”
“그러니까 방울이?”
재차 물으니 이락이 귀찮은 듯 손을 내젓는다. 가라. 혼자 있고 싶다. 왕태가 왕구를 쳐다봤다. 왕구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그만 가자고 눈짓을 한다. 하는 수 없이 도로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데 이락이 왕태를 부른다.
“창고에 가둬 둔 놈은?”
“왕자의 호위 무사 말입니까? 호전은 되었으나, 다리는 완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그놈을 끌고 와라.”
“왜요?”
“용궁에 가야겠다. 다리가 부러졌어도 가는 길은 알겠지.”
“농담이시죠? 그놈이 순순히 말을 듣겠습니까?”
“잔말 말고 데려와. 두들겨 패지 말고 살살 달래야 한다.”
달래는 건 내 특기가 아닌데…. 투덜거리면서도 왕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형제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이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의 길은 육지와 다르다. 그들만 다니는 길이 따로 있으니 저 혼자 헤엄쳐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길을 아는 놈을 데려가는 수밖에.
매서운 눈으로 수면 위를 노려보고 있는데 물속에서 검은 형체가 삐죽 올라왔다가 사라진다. 아! 이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율인가? 기쁜 마음에 내려가려고 하던 찰나, 그것이 서서히 정체를 드러냈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물귀신이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채 이락을 쳐다보고 있다. 하, 이락은 피곤한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싸울 기운도 없어 무시하고 장죽을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내뿜는데 해가 산 뒤로 넘어가며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앞에서 버티고 있는 물귀신이 거슬렸다. 물에 사는 귀신은 지독하고 악랄하니 혹여라도 방율의 영안이 트였다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이락은 귀신을 쫓기 위해 강으로 들어갔다.
첨벙, 첨벙, 가까이 다가가자 귀신이 물 아래로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먼 곳에서 툭 튀어나온다. 이락은 미간을 구겼다. 이것이! 나를 유인할 생각이구나. 속아 주는 척 또다시 거리를 좁히자 이번에도 숨는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뒤에서 첨벙, 소리가 난다.
이락은 홱 돌아서며 귀신의 머리채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잡았다!”
“아악!”
어? 이락은 당황하여 상투를 잡은 손을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너 어째서…!”
“아, 아픕니다. 이거 놓고 말씀하십시오!”
상투를 놓자 율이 머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아니, 왜 갑자기 머리끄덩이를 잡고 그러십니까. 제가 물고기처럼 보였습니까? 아파서 눈물을 글썽이는데 이락이 평소와 달리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다. 율은 뜨끔하여 주눅이 들었다.
“제가… 많이 늦었지요…? 실은 사정이,”
순간 이락이 율을 와락 끌어안는다.
“컥, 이… 이락 님!”
얼마나 팔에 힘을 주는지 늑골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는데 이락이 율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안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율은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설마… 여기서 계속 기다리셨습니까…?”
이락이 고개를 들고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을 떨었다.
“아니, 방금 막 왔다.”
“다행입니다. 매일 나와서 기다리실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럴 리가.”
율은 이락을 자세히 살피다 걱정스레 물었다.
“그런데 얼굴이… 전보다 많이 상하셨습니까. 못 주무셨습니까?”
“아닌데?”
“눈 밑이 검게 변했는걸요….”
“아니야.”
“맞습니다…. 평소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입니다.”
이락이 인상을 썼다.
“기분 탓일 거다.”
“그런가….”
뒤늦게 이락 또한 율의 차림새가 엉망이라는 걸 알았다.
“너야말로 꼴이 왜 이래? 갓은 어디다 팔아먹고?”
거기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았고, 옷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으며 뺨에도 멍 자국이 선명하다. 그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네 아비 짓이냐?”
“…….”
“말해라. 지금이라도 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줄 테니까.”
율이 곤란한 듯 웃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저에겐 모질게 하시지만, 어머니한테는 다정한 남편이고, 선이한테도 좋은 아버집니다.”
흥. 이락이 콧방귀를 끼었다.
“더 마음에 안 든다. 왜 너한테만 모질게 대해? 너처럼 어여쁘고 착한 애가 어딨다고.”
“어여쁘다니요…. 그런 것은… 여인들한테나 하는 말이 아닙니까….”
구시렁거리면서도 율은 목부터 빨개졌다. 그러자 이락이 손으로 그 부분을 끈적하게 만진다.
위험을 감지한 율은 흠칫하여 뒤로 물러섰다. 왜 이러십니까….
경계하는 율을 향해 이락은 변함없는 미소를 지었다.
“일단 집으로 가자. 가서 어디가 예쁜지 내가 찬찬히 알려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