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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99화 (99/102)
  • 99화

    무령이 배를 잡고 깔깔대고 웃자 산신령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신이 나는가?”

    “암, 신나지. 이락이 그놈이 바다에 가서 선비한테 된통 차이고 왔다잖아.”

    “차인 게 아니라 며칠간 말미를 준다지 않았어? 왜 없는 말을 지어내나.”

    “그게 그거지.”

    또 낄낄대고 웃는데 숲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이락이 모습을 드러낸다. 둘의 대화를 모두 들었는지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이락을 향해 무령이 빙그레 웃었다.

    “여긴 어쩐 일이냐. 강가에 가서 님을 기다리질 않고?”

    “누가 내 소문을 떠들고 다니나 했는데, 너였군.”

    “내가 떠든 것이 아니라, 이미 신령들 사이에선 쫙 퍼졌다. 전 염라였던 이락이 일개 자라한테 청혼했다가 대차게 까였다고. 네놈이 고백하자마자 선비가 구역질하며 뛰쳐나갔다지? 얼마나 싫으면 그랬겠냐.”

    이락이 말없이 노려보자 무령은 흥이 나서 떠들었다.

    “내가 말 하였지. 너하고 선비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예정대로라면 선비는 너의 목숨을 거둬 가야 했는데 네놈이 운이 좋았다.”

    “운이 아니라 그 애의 마음이 내게 기운 것이다.”

    “그래, 맞아.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가족을 택할 테니까.”

    “흥. 너의 예언은 하나도 맞는 게 없으니 신경 쓰지 않는다.”

    “네 속이 편하다면 그리 믿으렴.”

    실실 웃으며 놀리는 무령을 보고 이락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대로 엉덩이를 걷어차 버렸다. 졸지에 무령이 연못으로 휘청하며 넘어갔고, 풍덩 빠지려는 것을 산신령이 품에 받쳐 안아 줬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자 그걸 본 이락이 비웃었다.

    “잘 어울리네. 이참에 서로 진지하게 만나 보는 건 어때?”

    무령이 깃털처럼 날아 연못 밖으로 나오더니 부채로 이락을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이, 이놈이! 감히!”

    보다 못한 산신령이 나서서 말렸다.

    “그만들 해. 피곤하지도 않아? 어째서 허구한 날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 게야.”

    “자네도 보았지 않은가. 이락이 저놈이 나한테 먼저 방자하게 군 것을. 한참이나 어린놈이!”

    “그러니까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자네가 이해해. 가뜩이나 마음이 좋지 않고 속이 상할 텐데,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산신령의 말에 이락의 눈썹이 들렸다. 내 마음이 왜 안 좋은데? 표정을 보니 둘 다 방율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 눈치였다. 하, 이락은 어이없어하며 홱 돌아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뒤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보아하니 소식도 없는 거 같지?”

    “내 뭐라던가. 혼인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구역질까지 했다니까.”

    “딱하구먼.”

    “뭐가 딱해?”

    “저 녀석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정을 준 것은 처음이지 않나. 하필 그것이 바다에 사는 수컷이라니….”

    “잘됐지, 뭐. 앞으로 족히 100년은 놀릴 거리가 생기지 않았나.”

    이락은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쫓아가서 한바탕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렇게 숲길을 걷고 또 걸어 강가에 도착하였다. 방율과 약속한 나흘까지 하루가 남았다. 무령에겐 호언장담하였으나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내일은 오겠지. 와서 답이라도 주겠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 올 마음이 없는 거면…? 가족이 더 소중한 거면…. 이락은 언덕 위에 털썩 주저앉아 강에 비치는 달을 막연한 심정으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

    “어디 가시는 겁니까?”

    “생각을 정리할 겸 책방에 다녀오려고 그런다.”

    “오라버니….”

    신을 신는데 동생 선이가 평소와 달리 우물쭈물한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라 율은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러자 선이가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요즘 도성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은 학당의 동기들까지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아무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이상한 소문?”

    “예. 어떤 정신 나간 수컷이 오라버니에게 청혼하였다고…. 그것도 육지에 사는 수인이라고….”

    할 말을 잃고 얼어붙자 선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지요? 헛소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육지에 사는 수인이 이곳에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들 오라버니가 큰 공을 세워서 시기 질투를 하는 것이지요?”

    율은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해 수척해진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뭐라고 하여야 할까. 이락을 뭍으로 보내 주고 약속한 나흘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지만, 가족에게는 여태까지 아무것도 알리지 못하였다.

    “선아…. 실은 말이다.”

    때마침 대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가 들어온다. 그는 술에 취하지 않았음에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씩씩대고 있었다. 율은 덜컥 밀려드는 두려움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 오셨,”

    인사를 마칠 새도 없이 아버지가 율의 목덜미를 잡아 마당에 내동댕이친다. 충격으로 쉽게 일어나질 못하자 이번엔 멱살을 잡고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말해 봐라! 소문이 사실이냐. 수컷하고 혼인해? 사방에 소문이 쫙 퍼진 걸 나는 이제야 들었다. 육지에 올라가 뭐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여태 수컷하고 붙어먹은 것이냐. 그놈은 어디 있어? 그놈도 너처럼 반푼이냐? 하긴 그러니 좋다고 만났겠지!”

    순간 울컥하여 아버지를 밀쳐 냈다. 휘청하고 뒤로 밀려난 아버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선이 또한 놀란 듯 보였다. 율은 두 주먹을 꼭 쥐고 눈이 붉어져 울분을 터트렸다.

    “그만하십시오! 그분은 저 같은 반푼이가 아닙니다! 좋은 분입니다! 어머니를 살리라고 약초를 보내 주셨고, 제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구하러 와 주셨습니다. 알지도 못하시면서 함부로 말씀하시지,”

    짝, 두툼한 손바닥이 율의 뺨을 후려쳤다.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자 발길질이 날아온다. 네가 돌았구나. 어디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대들어! 집안 망신을 시킨 것도 모자라 결국 이런 불미스러운 일까지 만들다니! 차라리 죽어라! 그럴 거면 죽어!

    선이 옆에서 울부짖으며 아버지를 말리었다.

    “그만하십시오! 아버지! 그만하시라고요!”

    “선이 넌 들어가거라. 이놈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

    그러고는 율의 상투를 잡아 광으로 질질 끌고 가서 홱 던져 버린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곧장 문이 닫혔고 밖에선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율은 겁에 질려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쾅쾅! 아버지! 아버지! 꺼내 주십시오! 아버지!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선이 너! 네 오라버니를 돕기만 해 봐라. 경을 칠 테니!”

    “아버지!”

    “시끄럽다. 썩 들어가지 못해!”

    훌쩍거리며 우는 선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뒤 밖이 잠잠해진다. 쾅쾅! 열어 주십시오! 제발 열어 주십시오! 있는 힘껏 문을 밀고 두드려도 소용이 없었다. 한참을 그 앞에서 씨름하던 율은 결국, 지쳐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율아. 나는 네 아비와 어미가 아닌, 너의 생각이 알고 싶다.]

    [나와 혼인을 하는 게 그리도 싫으냐? 육지에 가서 둘이 오순도순 사는 게 그리 싫어?]

    얻어맞은 뺨이 욱신댔으나 더 아픈 건 따로 있었다.

    눈물이 뚝, 뚝,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락 님과 사는 게 왜 싫겠습니까…. 싫지 않습니다….

    애초에 아버지의 승낙을 얻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을 떠나면 돌아오기 힘들겠지. 어머니도, 선이도 쉽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락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져 온몸을 짓눌렀다.

    보고 싶다….

    만나러 가고 싶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틈으로 들어오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고요하다. 모두 잠이 든 것일까. 일어나 문을 열려고 애를 썼으나 굳게 닫힌 문은 꼼짝도 하질 않는다. 율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웅크린 채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보니 다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들어온다.

    벌써 하루가 지난 것인가….

    그때 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율은 다급히 돌아앉았다.

    “선이니?”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다…. 밖에 혼자 있는 것이냐?”

    선이 울먹였다.

    “아버지께서 외출하셨습니다. 그런데 열쇠가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나 하여 방을 다 뒤졌는데도 눈에 띄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선이가 율을 풀어 준다고 하면 아버지는 선이에게까지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율은 실금처럼 벌어진 문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선이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가거라. 괜히 너까지 혼나지 말고.”

    “제가 지금 궁으로 찾아가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오라버니가 공을 세웠으니, 전하께서 해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곤란해질 것이다.

    “아니다…. 아버지의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러니 넌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선이 훌쩍거렸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도움이 되지 못해서….

    우는 그녀를 달래어 보낸 뒤 구석에 몸을 뉘려 하는데 머리가 핑 돌고 숨이 조금씩 가빠진다.

    내가 구명환을 언제 먹었더라…. 약을 봇짐에 넣어 두었는데….

    불안함과 서러움이 복받치자 눈물이 쏟아진다.

    [너는 울보다.]

    맞습니다. 저는 울보에 겁쟁입니다….

    지금쯤 강에 도착했을까. 나를 기다릴까. 무슨 생각을 하려나.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할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찰나, 쾅! 굉음과 함께 문짝이 흔들린다. 놀라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다시 쾅! 흔들리더니 철컹, 무거운 쇠가 바닥에 떨어지며 한쪽 문짝이 끼이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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