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짠! 어떠냐, 방울아. 감쪽같지?”
율은 왕구가 만들어 온 물건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했다. 등껍질을 도둑맞아 시무룩해 있으니 왕구가 박을 반으로 갈라 등껍질을 만들어 주었는데, 조각을 새기고, 옻으로 칠을 하며 정성을 들였으나 원래의 것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모양 또한 동그래서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저번에 심은 박이 남았길래, 내가 널 위해 만들었다. 한번 메 봐라.”
정성을 무시할 수 없어 어깨에 멨더니 왕구의 눈빛이 반짝인다.
“이야, 딱이다! 너의 귀여움이 한층 돋보이는구나!”
율은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우물가로 갔다. 대야에 물을 받아 비춰 보려는데 등껍질이 잘 보이질 않는다. 대신 멍이 남아 있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다시금 그날의 악몽이 떠올라 손끝이 떨린다. 그날 이락은 얼마나 많은 피를 묻힌 걸까…. 그러다 다른 궁금증이 생겨났다. 내가 그곳에 갇힌 걸 어떻게 알았지?
“왕구 형님….”
“응.”
“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이락 님하고 형님들 말입니다. 그날 제가 있는 곳을 어찌 찾아내신 겁니까?”
멀찍이 앉아 화살을 만들던 왕태가 대화에 껴들었다.
“말도 마라. 그날 무령인지 뭔지 여우한테 가서 큰형님이 사정하는 바람에 바로 네가 있는 곳으로 간 거다. 아니었으면 큰일을 치를 뻔했어.”
처음 듣는 소리였다. 무령이 이유 없이 도와주진 않았을 텐데….
“자세한 건 나는 모르니, 이락 형님이 오면 물어봐.”
율은 마음이 불안해져 문밖을 내다봤다. 이락은 아침 일찍 도성에 다녀온다며 나갔는데 해가 지는 와중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 병조 판서의 무리에게 붙들려 해코지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뒤늦게 걱정이 몰려온다. 심란한 표정으로 서성이던 율은 부엌으로 가 음식과 물을 챙겨 창고로 향하였다.
그러자 뒤에서 왕태가 한 소리 한다.
“그놈이 뭐가 이쁘다고. 굶어 죽든 말든 내버려 둬.”
창고로 들어가니 기진의 호위 무사 휘가 한 손이 기둥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망가진 다리를 의원이 치료해 줬다고는 하나, 걸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라고 들었다. 옆을 보니 어젯밤 가져다준 음식엔 손도 대지 않은 모양이다. 율은 거리를 두고 새 음식과 물을 놓았다.
“드십시오…. 고집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살아서 돌아가야 할 게 아닙니까….”
휘는 눈을 감아 외면했고 율은 망설임 끝에 물었다.
“기진 마마가… 정말 저를 죽이라 하셨습니까.”
휘는 대답하지 않았고, 율은 눈이 시큰해져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됐습니다. 이제 와 물어 무엇하겠습니까.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휘가 그제야 말문을 연다.
“불쌍한 분이다…. 궁에서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자랐고, 그것이 응어리가 됐어. 살려고 그런 거다. 자신이 살려면 어쩔 수 없었어. 너는 마마를 어릴 적부터 지켜봤으니 알 것 아니냐. 다른 이는 몰라도 너는 그분을 이해할 줄 알았다.”
율은 먹먹해지는 감정을 추슬렀다.
“내일 용궁으로 갑니다…. 이락 님이 기진 마마를 살려 준다 약조하셨습니다….”
“바보 같긴. 그 말을 믿는 것이야?”
“…….”
“그자는 언젠가 너도 죽일 것이다!”
율은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놈이 뭐라 해? 너를 위협하든?”
왕구의 물음에 율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가뜩이나 마땅치 않아 하는데 더 미움을 사게 할 순 없었다. 그때 저 멀리 누군가 나타난다. 당나귀를 타고 등장한 이는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렸으나 소월이라는 기녀가 분명했다.
사립문까지 온 그녀는 하인의 도움을 받아 땅에 발을 딛고 율을 향해 서둘러 왔다.
“세상에, 선비님. 무사하셨군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며칠 새 얼굴이 수척해지셨네요. 곱던 피부가 꺼칠해진 것이,”
소월은 거리낌 없이 율의 뺨을 손등으로 스윽, 끈적하게 훑고 내려갔다. 놀라서 흠칫 뒤로 물러서자 그녀가 눈을 접으며 웃는다.
“살아서 보니 반갑습니다. 참, 제가 며칠은 이곳에서 지낼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다소곳하게 인사를 하는 그녀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창고 방을 빼면 방은 두 개뿐인데…. 대체 어디서 지낸다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전에도 사랑방에 머물렀었지. 때마침 왕구와 왕태가 다가왔다.
“소월아 고생했다. 네가 알려 준 덕에 우리가 방울이를 구하러 갈 수 있었어.”
“과찬이십니다. 제가 뭘 했다고요. 그나저나 이락 님이 궁으로 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궁에 갔다는 말에 율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궁이라뇨?”
“선비님은 모르셨나 봅니다. 지금 장안에 난리가 났습니다. 아침부터 병조 판서의 집에 군사들이 들이닥쳐 의금부로 모두 압송됐습니다. 그와 관련된 이들도 마찬가지고요.”
율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왕이 전부 알게 된 것인가. 그럼 이락은? 이락은 왜 궁에 간 것이지? 따지고 보면 이락도 병조 판서와 작당하지 않았던가.
소월이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물론 저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락 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하였으니 믿고 기다려 봐야지요.”
“이락 님은 궁에… 왜 간 것입니까?”
“왕께 직접 병조 판서와 나눈 밀서를 증좌로 내주고, 또 뭐라더라… 아무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다고 하였는데…. 정신이 없어 뒷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네요. 호호.”
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락이 책을 만드는 일에 도움을 줬다 한들 왕이 그것을 이해할까. 자고로 후환이 될 것은 남겨 두지 않는 게 권력을 쥔 이들의 특징이다. 그건 부모 형제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기진도 그토록 용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나.
율은 도무지 안 되겠어 집을 나섰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는데 해가 저물고 숲에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돌아갈까 고민하는 와중에 멀리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난다. 날이 어둑어둑하여 식별이 어려웠다. 경계하며 나무 사이로 모습을 숨긴 율은 상대방이 가까이 오자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락 님!”
반가운 마음에 껴안으려다 멈칫하니 이락이 대번 인상을 쓴다.
“쉬지 않고 왜 나와 있어?”
“집에 소월이란 처자가 왔습니다….”
“오해 마라. 전에도 말하였지만, 그 아이하고 나는 아무 사이 아니다.”
“압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율은 이락의 몸을 살피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이락은 너무나 멀쩡한 표정으로 손에 쥔 봉투를 내밀었다. 확인하지 않고도 그것이 만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율이 만두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이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궁에 가셨다면서요…. 돌아오지 않아, 옥에 갇힌 줄 알았습니다….”
“갇히다니. 내가 왜.”
“그야….”
율은 차마 그의 죄에 대해 말하지 못하였다. 따지고 보면 결과가 이렇게 된 데에는 율의 영향이 컸다. 율이 도와 달라 사정하지 않았다면 이락은 병조 판서를 도와 크게 한자리를 차지했을지도 모르지.
“궁에서 심 낭자를 만났다. 네 걱정을 하며 안부를 물었어.”
율은 다소 들뜬 표정을 했다.
“직접 만나셨습니까?”
“그래. 진심으로 고맙다 전해 달래. 네 말대로 심성이 고와 보이더군.”
“그리고 또요…?”
“왕을 만나 사실대로 말했다. 주고받은 밀서를 전했고, 병조 판서는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
“이락 님은 괜찮으십니까…?”
이락은 턱을 치키며 거들먹거렸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그자의 아비, 또 아비였던 자들이 내게 빚을 졌다고.”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온천도 받으셨다 했지요.”
“실은 면제권도 받았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세 번은 용서해 주라며 왕이 직접 친필로 작성하여 후대에 남겼지.”
율은 속으로 감탄했다. 괜한 걱정을 했구나. 이락 님은 역시… 대단한 분이야.
“다행입니다! 앞으로 죄를 지어도 두 번은 용서받으실 수 있겠네요!”
“아니. 이번이 세 번째였어.”
“…….”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앞에 두 번은 무슨 죄를 지으셨을까, 잠시 생각했습니다….”
“묻지 마라. 네 기분만 상할 터이니.”
율은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졌다.
“왜요. 왕의 여인을 탐하시기라도 했습니까?”
이락은 움찔했고, 율은 경악하여 할 말을 잃었다.
“넌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순간이 있어. 지금처럼.”
“세상에! 큰일 나실 분입니다. 어떻게 왕의 여인을 취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것도 두 번이나?”
“지난 일이다. 앞으론 그러지 않아.”
“누가 압니까. 육지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수백 년을 그리 사셨는데, 바뀌기 쉽지 않지요. 아,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도 압니다.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이지요?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이제 남은 기회도 없는데, 정말 목이 댕강 떨어지면 어쩌려고요….”
이락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 비꼬면서 잔소리하니 네가 내 부인이 된 것 같구나.”
율이 질색하며 돌아서자 이락이 뒤를 쫓으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말해 봐라. 혹시 내가 왕의 여인과 그렇고 그랬다 하여 투기라도 하는 것이야? 그땐 나도 방황하던 시기라 어쩔 수 없었다. 이름도 기억나질 않아. 하지만 너는 다르다. 진심인 걸 알고 있지? 뭐라고 대답을 좀 하거라. 답답해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