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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95화 (95/102)
  • 95화

    의식을 차린 율은 눈꺼풀 안에서 눈동자만 움직였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살아 있는 건가. 정신을 놓기 전 이락이 찾아왔고, 그의 품에 안겨 보았던 살풍경이 잊히질 않는다. 거대한 화마가 창고를 집어삼키고 사방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다행히 뼈가 부러지진 않았네요. 전에도 느꼈지만, 보기보단 꽤 강골입니다.”

    “약은.”

    “오늘 중으로 보낼 테니, 달여서 먹이시면 됩니다. 저는 내일 아침 다시 오겠습니다.”

    의원이 사라지고 나서도 이락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느라 몇 번이고 어금니를 물었다. 도성 안에 얻어 둔 집이 엉망이 되었고 다락에 숨겨 둔 방율의 등껍질이 없어졌기에 무언가 사달이 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때마침 소월이 찾아왔다.

    [병판이 초상화 하나를 가지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한데, 그이가 이락 님 댁에 머무는 선비님과 매우 흡사합니다. 흔한 얼굴은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하여 서둘러 왔는데, 별일 없는 게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자가 어떻게 방율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을까. 책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글을 쓴 이가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라가 아닐까 추측하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 방율이 궁으로 잡혀 갔을 때 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분명 병판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왜 거기까지 염두에 두지 못하였을까. 뒤늦게 자책하며 방율이 오고 가는 길목으로 향하였다. 강가에 서서 방율이 돌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가 마르는 듯하였고, 처음으로 경대를 깨 버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였다.

    “너 말이다. 내게서 도망치려던 것이야?”

    이락의 질문에 율은 몸을 움찔 떨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잔뜩 화가 난 이락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마음을 달래려 애써 미소를 지었으나 맘처럼 쉽질 않았다.

    “표정을 보니 맞군.”

    “…….”

    “이유나 들어 보자.”

    “…….”

    “용왕이 깨어나기라도 한 건가.”

    율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알고 있었구나. 기진의 말대로 처음부터 이락의 계획일까.

    “깨어날 걸… 알고 계셨습니까?”

    말을 할 때마다 볼 안쪽이 칼로 찌르는 듯 아프다. 율이 인상을 쓰자 이락이 유심히 보더니 근처에서 약통을 집어 온다.

    “입을 벌려 봐.”

    “…….”

    “벌려라, 얼른.”

    마지못해 입을 벌리자 볼 안쪽을 확인하더니, 쯧, 혀를 찬다. 그러고 나선 약을 발랐다. 그의 손가락이 점막을 문지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입 안엔 쓴맛만 남았다.

    “이락 님….”

    “…….”

    “말씀해 주십시오…. 알고 계셨던 겁니까?”

    이락은 약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반신반의했다. 수백 년 전 비슷한 증상을 가진 이를 본 적이 있어. 달포를 넘게 굶겨 몸의 나쁜 기운을 빼내고 나니 생기를 찾더구나. 그게 용왕에게 먹힐 줄은 몰랐다.”

    “아….”

    “기진이 곤란해졌겠군.”

    율은 침묵했다. 기진이 곤란하게 된 것도 사실이거니와 이락을 죽이라 명하였다는 것을 어찌 털어놓겠는가. 그러다 한쪽에 놓인 봇짐을 발견하였다. 자신이 메고 온 것인데, 입구가 벌어져 있고 구명환을 담았던 작은 통이 텅 비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이락이 어깨를 붙들어 도로 눕힌다.

    “아직 무리하여 움직이면 안 된다.”

    “이락 님! 저… 저기…! 봇짐에 든 약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너희가 구명환이라 부르는 그거 말이냐.”

    “예….”

    “내가 먹었다.”

    “예?”

    순간 사고가 멈췄다.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끔뻑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악. 온몸의 근육과 뼈가 비명을 질렀으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농… 농이 지나치십니다!”

    “농이라니. 내가 그리 한가해 보여?”

    “아니죠…? 저를 또 놀리시는 거죠…?”

    “네가 바다로 도망칠까 봐 내가 다 먹어 치웠다.”

    율은 경악하며 이락의 팔을 붙들고 냅다 등을 후려쳤다. 뱉으십시오! 얼른 뱉으십시오! 그걸 드시면 어쩝니까! 미치셨습니까! 그걸 드시면 안 됩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얼른 뱉으라고 애원하는데 이락의 미간이 슬그머니 좁혀진다.

    율은 서글피 울면서 이락의 입에 기어이 손가락을 넣었다.

    “차라리 토하십시오! 지금이라고 게워 내면 괜찮을 겁니다!”

    강제로 입을 벌리려 하자 이락이 율의 손을 붙들어 멈추고 눈물로 엉망이 된 뺨을 닦아 준다.

    “손가락을 그리 넣고 있으니 자꾸 다른 생각이 들잖아.”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흑, 그걸 드시면… 흐윽… 드시면….”

    “독약이라도 섞었어?”

    율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울면서 어서 뱉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락이 불멸의 존재라지만 기진이 준비한 독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율이 계속하여 뱉으라고 하소연하니 이락이 그대로 일어나 문을 양쪽으로 벌컥 열어젖힌다.

    왕구와 왕태가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돌아본다.

    “그자를 데려와.”

    이어서 왕구와 왕태가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누군가를 질질 끌고 온다. 피투성이가 된 이였는데 두 다리가 망가졌는지 제대로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신음만 흘리었다.

    “얼굴을 확인해라.”

    왕구가 사내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강제로 고개를 들게 하자 지켜보던 율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의복이 낯이 익다 하였는데 기진의 호위 무사인 ‘휘’라는 자였다. 충격을 받은 채 넋이 나가 있으니 이락이 율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병판의 조무래기들을 급습하는 현장에 저자가 있었다. 검술이 뛰어나 처음엔 병판의 호위 무산가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육지에 사는 수인이 아니었어.”

    율은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단 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겁박해도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넌 짐작할 수 있겠지.”

    설마… 기진 마마가… 내게 미행을 붙인 것인가. 어째서…? 머릿속에서 결론이 나자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이락이 소매 안에서 종이에 감싼 것을 두 개 꺼낸다. 기진이 준 구명환이었다. 푸른색은 방율의 것이었고, 붉은색은 이락의 것인데…. 그가 약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기진이 나를 죽이라 하였나?”

    율은 대답하지 않았고 이락은 재차 물었다.

    “말해. 네 뜻대로 해 줄 테니.”

    율이 놀라 고개를 들자 이락이 독이 든 붉은 색을 귀신같이 집어냈다.

    “원하면 이것을 먹어 주마.”

    율은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그것은 싫습니다!

    물끄러미 보던 이락이 다른 제안을 한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나와 함께 용궁으로 가서 용왕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거다.”

    율은 양 주먹을 꼭 쥔 채 눈물만 뚝 뚝 흘렸다.

    “선택해라. 기진을 살릴지 나를 살릴지. 네 선택에 따라 나도 결정을 달리할 테니.”

    율이 힘겹게 몸을 움직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걸 본 이락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기진 마마를… 부디 살려 주십시오…. 불쌍하게 여기시어…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런. 그자를 연모하는 거냐.”

    율이 당황하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는… 저는… 연모하는 분이 따로….”

    말을 하려다 말았더니 이락의 눈이 가늘어진다.

    “누군데.”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버티자 이락이 약을 입에 넣으려 했다.

    율은 다급히 그의 팔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이락 님입니다! 이락 님! 제가 연모하는 건… 이… 이락 님입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이락의 얼굴에 흡족함이 묻어났다.

    “진심이야?”

    “예….”

    “그런데도 기진을 두둔하겠다?”

    율은 훌쩍이며 대답했다.

    “이락 님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진 마마가 잘못되는 것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 그분이 죄를 지은 것은 알고 있으나, 한 번만 아량을 베풀어 살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키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알다시피 나는 속도 좁고 뒤끝도 있어 아량을 베풀 줄 몰라. 당한 건 반드시 배로 갚아 주지. 그런데 네가 이렇게까지 하니 마음이 약해지는구나.”

    율은 혹여나 하는 눈빛으로 이락을 쳐다봤다.

    “시키는 건 뭐든 한다 하였지?”

    이락이 눈빛을 번뜩였기에 율은 잠시 고민했다.

    “고민하는 거 보니 진심이 아니군.”

    자칫하면 또 약을 먹겠다 할 분위기다. 율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뭐든 할 겁니다….”

    마침내 이락이 웃었다.

    “좋아. 그럼 나도 살고 네 왕자도 살 수 있는 방도를 알려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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