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방울전-94화 (94/102)
  • 94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율은 구명환의 약효가 다하기 전 집을 나섰다. 떠나기 전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오래도록 눈에 담고 이락이 준 산삼을 그녀의 머리맡에 올려 뒀다. 그러고는 육지에서 사 온 예쁜 꽃신을 선이의 방 앞에 가지런히 놔두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는 장문의 글을 적어 남겼다.

    문밖에서 한참 둘러보던 율은 마음을 굳히고 지름길을 가로질러 도성 입구에 도착하였다. 문지기들이 알아보고 길을 터 주었으나 선뜻 걸음이 옮겨지질 않는다. 뒤를 한번 돌아본 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이내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도성 밖으로 나왔다. 크게 한숨을 쉬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벌써 떠나는 게냐.”

    흠칫 놀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기진이 홀로 서 있었다.

    “왕자마마….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너를 배웅하려 기다렸다.”

    기진의 애틋한 시선이 율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자신의 목숨이 율에게 달려 있다는 그의 말을 온전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한데, 등껍질은 어딜 간 것이야. 올 때부터 보이질 않더구나.”

    “육지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래, 아바마마께서 하사하신 소중한 것이니 잃어버리면 안 되지.”

    “예…. 알고 있습니다.”

    기진이 가까이 다가와 율의 갓을 매만져 주려 했다. 율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기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고, 율은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율아.”

    “예….”

    “나는 너를 믿는다.”

    믿는다는 말에 율은 어떤 확답도 내놓지 못하였다. 인사를 한 뒤 곧장 육지를 향하여 헤엄쳐 나아갔고, 기진은 그런 율을 바라보며 슬프게 웃었다. 율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자 기진의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휘야.”

    “예, 마마.”

    “저 아이를 따라가라…. 가서,”

    기진은 말을 멈췄다.

    잠시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단단해지며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내 명을 거역하거든, 바로 목숨을 거둬라.”

    “분부 받들겠습니다.”

    사내가 율을 쫓아 사라지고, 홀로 남은 기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율아. 부디,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기를 바라마. 나는 너를 해치고 싶지 않다. 너는 내 혈육과도 같은 아이가 아니냐. 그러니 제발 내 바람을 들어다오. 이락이 아닌 나를 택하거라. 그것이 네가 살 길이다.

    ***

    뭍으로 올라온 율은 기진맥진하여 대자로 뻗었다. 껍질이 없으니 변하지도 못하고, 구명환을 먹었다고는 하나, 헤엄치는 것이 전처럼 쉽지는 않았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와중에도 해가 넘어가며 산이 붉게 물드는 게 눈에 들어온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야겠구나….”

    겨우 일어나 언덕을 기어 올라가니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진다. 혹시 이락이 강으로 마중을 나올까 싶어 일부러 엉뚱한 곳으로 피해 왔는데, 마을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났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걷고 또 걷다 보니 날이 어둑어둑해졌고 다행히 저 멀리 마을의 불빛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율은 산과 마을의 경계에서 멈췄다. 돌탑 주변으로 금줄이 처진 것을 발견하고 왕구가 가르쳐 준 대로 탑 위에 돌을 하나 주워 올리고 소원을 빌었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를 지나 목적지로 향하면서도 주위를 계속하여 살폈다. 대문 앞에 당도하자 율은 담벼락 너머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끼이이, 안으로 들어서자 무엇 때문인지 화단의 꽃들이 엉망진창으로 꺾여 있다. 대체 누가 꽃을 저리 망쳐 놓은 거지.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가하게 꽃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거늘. 율은 건넛방으로 가서 병풍을 걷고 다락의 문을 열었다. 어어? 있어야 할 등껍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놀라서 다락 안쪽으로 머리를 디밀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당황하여 밖으로 나와 이번엔 안방을 뒤졌다. 내가 착각하는 건가. 방이 많다고 해도 등껍질을 숨긴 곳을 헷갈릴 리가 없는데. 이곳저곳을 모조리 뒤져도 등껍질은커녕 비슷한 것도 없으니 애가 타들어 갔다.

    율은 지친 얼굴로 마루에 걸터앉았다. 등껍질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대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린다. 설마 이락인가? 긴장하여 쳐다보는데 아무도 들어오질 않는다.

    바람이 불었나…. 율은 안도하며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다시 닫으려고 손잡이를 잡는 순간 웬 사내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놀라서 도망칠 새도 없이 뒤에서 누군가 율을 옭아매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읍, 읍! 몸부림을 치자 손과 발을 결박하더니 순식간에 자루에 넣고 어깨에 둘러멘다. 살려 달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입에 문 재갈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어딘가에 내던져지고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자루 안에서 율은 호흡이 차츰 가빠졌다. 두려움에 눈물이 흐르고 어떻게든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얼마나 흘렀을까. 도착한 곳에서 몸이 또 들려 이동한다. 끼이이-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고 자루 밖으로 불빛이 어룽졌다.

    “확실한가.”

    “예. 초상화와 같은 얼굴이 맞습니다.”

    “꺼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내들이 율을 자루에서 끄집어낸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율은 훌쩍이며 몸을 떨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창고처럼 보이는데…. 흐린 불빛 너머로 거만하게 서 있는 상대의 정체가 드러나자 온몸에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우린 구면이지. 기방에서 본 적이 있지 않은가.”

    병조 판서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그의 눈은 살기로 번뜩였다. 그의 부하가 율의 입에 물린 재갈을 벗겨 냈고 병조 판서는 율의 초상화를 펼쳤다.

    “전에 바다에서 온 자라가 중전을 만나고 갔다는 소문이 있었지. 설마 하였는데, 그 자라가 도성 안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내가 아는 놈 집에 떡하니.”

    율은 덜덜 떨면서도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솔직히 말하면 목숨은 살려 주지. 이락이 시키던가. 책을 쓴 대가로 무얼 주겠다던가. 돈? 명예? 아니, 애초에 자네가 쓴 게 맞긴 해? 이락 그자는 예전에도 책을 써서 큰돈을 번 적이 있었지. 그자가 쓴 것은 아니고?”

    율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병조 판서가 낯빛이 바뀌어 칼을 빼 든다. 칼끝이 율의 목 아래로 바싹 다가왔다. 핏물이 실처럼 흘러내렸고, 율은 두려움에 눈물만 흘리었다.

    “말해라. 누가 시켰는지.”

    “…….”

    “이락이 그놈이냐?”

    “아닙니다….”

    “그럼?”

    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락 님은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제가 본 대로 들은 대로 적은 것입니다…. 심 낭자가 딱하여 저 혼자 벌인 짓입니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믿든 말든 그건 대감의 몫입니다…. 이락 님은 상관없으니… 벌을 내리려거든 저한테만 내리십시오….”

    하하, 병판이 주름진 입술을 한껏 벌려 웃는다.

    “네놈들이 밤낮으로 붙어 비역질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리 편을 드는 걸 보니 사실인가 보구나.”

    율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병판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율을 협박했다.

    “지금이라도 말하면 너는 살려 주마!”

    “…….”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꿋꿋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병조 판서가 분노하여 발로 율을 걷어찬다. 이 비천한 수인 놈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시치미를 뗄 작정이구나.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나를 기만해! 몸뚱이가 바닥에 나뒹굴어도 그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율은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다.

    어서 빌어라! 이락이 그놈이 시켰다고 말해! 살려 준다는데도 왜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씩씩거리던 병조 판서는 피투성이가 된 율을 내려다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지독한 놈. 좋다, 그리 원하니 내 벌을 내려 주지. 새카맣게 타 버린 네놈 몸뚱이를 끌어안고도 이락이 그 짓을 할지 궁금하구나.”

    병조 판서가 섬뜩하게 웃었고, 율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어떻게든 붙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당장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죽는 것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금산에 먼저 갈걸. 가서 마지막으로 이락의 얼굴이라도 볼걸. 기다리고 있을 텐데…. 짧은 인사라도 남기고 올걸….

    후회라니,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의식이 멀어지며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잠시 후 매캐한 냄새가 코끝으로 흘러들었다. 간신히 눈을 뜨니 시뻘건 불이 피어올라 빠르게 옮겨붙고 있었다.

    율은 눈물을 흘리며 타오르는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던 찰나 조용하던 밖이 소란스럽더니 갑자기 문짝이 쾅 떨어져 나간다. 이어서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나를 죽이러 온 건가…. 율은 있는 힘을 다해 눈동자를 움직였다.

    “아….”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든 채 이락이 서 있었다. 화가 나신 겁니까. 어찌 그리 무서운 얼굴로 서서 계십니까. 그에게서 도망칠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보니 반갑고 눈물부터 쏟아진다. 율은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그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터트렸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