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율은 질린 표정으로 이락을 쳐다봤다. 아니, 진지하고 슬픈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면 저렇게 물 흐르듯 상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지…. 이제는 그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잠시나마 이락에게 연민을 느끼고, 뭐든 해 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자신이 등신 같았다. 차라리 손가락을 뽑지…. 라고 작게 중얼거리자 이락의 미간이 좁혀진다.
“뭐라 하였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연거푸 술을 들이켜자 취기가 한껏 올라왔다. 푸흐, 하고 숨을 내쉬니 이락이 상에 턱을 괴고는 물끄러미 쳐다본다.
“갈까, 이제?”
그의 눈빛에 욕망이 번들거리는 것을 확인하고 율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충분히 더 마실 수 있습니다!”
“눈도 풀렸고, 혀도 꼬부라졌다.”
“아아니요!”
“맞아.”
서로 우기는 와중에 주막 안으로 여인 하나가 들어온다. 댕기 머리를 땋고서는 옆에 광주리를 안고 있었고, 그 안에는 호미가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율은 그녀를 보며 갸웃했다. 어디서 봤더라…? 씩씩하게 들어온 그녀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율은 뒤늦게 그녀를 알아보고 입이 벌어졌다. 어어?
“이락 님.”
“응?”
“저기 보이십니까? 아까 말씀드렸지요. 어린 처자가 밭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고요.”
“저 애가 그 애냐? 생각보다 더 어리구나.”
여인을 지켜보던 이락이 주인을 불러 물었다.
“저 아이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봐라.”
주인이 능글맞게 웃는다.
“왜요? 관심이 있으십니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락 님과는 나이 차가,”
스읏. 이락이 노려보니 주인이 얼른 입을 다물고 아는 대로 고한다. 근방에 사는 콩쥐라는 아이인데 남의 농사일을 대신 해 주고 그걸로 돈을 번다고 하였다.
“듣자 하니 혼자 힘으로 감당키 어려워 지나가는 어리숙한 남정네한테 거짓말을 하고 울면서 부탁을 한답니다. 그러면 열 명 중 여덟은 넘어온다나. 오늘도 일을 금세 끝내고 온 거 보니 어디서 호구 하나를 물었나 봅니다.”
이락은 비웃으며 율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그 호구가 여기 있다.
율은 분한 표정으로 콩쥐를 째려보다 주인에게 재차 물었다.
“혹, 집안 사정도 아십니까? 새어머니가 있다거나, 구박을 받는다거나?”
“어떻게 아십니까. 어릴 적 아버지가 병으로 죽고 새어머니, 새언니하고 살고 있습죠.”
율은 이락에게 반격했다. 그것 보십시오. 딱한 사정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주인이 말을 이어간다.
“새어머니가 자기 딸도 아닌데 애틋하게 키웠죠. 동네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런데 몇 해 전 풍을 맞아 쓰러졌어요. 새언니 또한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편해 밥벌이도 못 하고 있고요. 그러니 저 어린 것이 지금은 가장 노릇을 하고 있습죠. 물론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 식구 입에 풀칠하기 힘든 세상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때마침 다른 곳에서 주인을 부른다. 주인이 사라지고 난 뒤 율은 콩쥐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할 줄 알았는데 뻔뻔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아는 척을 한다. 기가 막히면서도 그 사정이 딱하여 나무랄 수가 없었다.
“분하냐. 가서 한 대 때려 줄까?”
뒀다간 정말 쥐어박을 기세라 율은 그를 말렸다.
“두십시오.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사정도 딱하고….”
“사정이 딱하다고 하여 남을 이용하면 안 되지.”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요….”
“왜. 너를 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여?”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고생깨나 하지 않았던가. 바다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을 하다 보니 저절로 술이 당긴다. 하지만 술병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더 시켰다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관두고 일어서는데, 아니나 달라 몸이 앞으로 휘청한다. 이락이 잡지 않았다면 상에 얼굴을 처박을 뻔했다. 간신히 추스르고 평상에 앉아 신을 신는 사이 이락이 주인에게 가서 돈을 내며 종이 한 장을 건네준다.
돈을 내려 황급히 쫓아갔으나 주인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이락에게 붙들려 끌려 나왔다.
“가자.”
“분명 제가 돈을 내겠다 하였는데….”
“됐다. 배꼽까지 맞춘 사이에 네 돈 내 돈이 어디 있어.”
배꼽을 맞춘 게 무슨 뜻이지? 물어볼 새도 없이 엉겁결에 주막 밖으로 끌려 나오다 보니 주인이 이락에게 받은 종이를 콩쥐에게 건네고 있다. 이어서 콩쥐가 사립문 밖으로 뛰쳐나와 선비님! 하고 크게 부른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여러 번 인사하고 안으로 사라졌다.
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락을 쳐다봤다.
“저 아이에게 뭘… 주신 겁니까?”
“일할 곳을 마련해 줬다.”
율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설마 기방이요?”
이락은 비뚤어진 율의 갓을 제대로 고정하고 느슨하게 풀어진 갓끈을 예쁘게 매듭지었다.
“상단에서 쓸 만한 여자아이를 하나 찾더구나. 배짱도 좋고, 꾀도 많으니 일단 가 보라 했어. 나머지는 거기 행수가 알아서 할 것이다.”
“나쁜 곳에… 파시려고 하는 건 아니죠?”
“나를 뭐로 보고.”
“전에 저도 한번 팔아먹으셨지 않습니까….”
아, 그랬지. 이락이 너무도 태연하게 반응하여 율은 할 말을 잃었다. 걷다 보니 술기운 때문인지 다리가 자꾸만 꼬였고, 쉬었다 가자고 말을 하려는데 이락이 선뜻 등을 내어 준다. 업힐래? 지나가던 이들이 하나둘 힐긋거렸고 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걷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이리 걸어서 언제 도착을 해.”
“마음이 왜 급하십니까…?”
“내 말은 귓등으로 들은 거냐. 주막에서 뭐라 하였어. 네가 스스로 엉덩이를 벌려 주면 내 기분이,”
율은 황급히 손을 뻗어 이락의 입을 틀어막았다. 주위의 시선들이 하나둘 날아온다. 저거 이락 아닌가. 금산의 토끼잖아. 쳐다보지 마. 눈을 마주쳤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어째서 저러고 있는 거지. 저 선비는 또 누구고? 혹시 인질로 잡힌 것인가.
율이 홱 돌아서서 도망치듯 앞서가는데 이락이 느긋하게 그 뒤를 쫓는다.
“이제야 갈 마음이 생긴 모양이구나.”
“한마디도 하지 마십시오! 창피합니다.”
그러다 다리가 꼬여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앗. 손바닥을 보니 흙에 쓸려 빨갛다. 울상을 하고 땅을 짚고 일어서는데 이락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다가 그대로 어깨에 둘러멘다. 율이 기겁하고 몸부림을 치는 순간 찰싹, 커다란 손바닥이 엉덩이를 내리쳤다. 지켜보던 이들의 입이 쩍 벌어졌고 율은 창피함에 갓을 내려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너야말로 걷지도 못하면서 왜 고집을 부려.”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엉덩이를 때리면 어쩝니까.”
“네가 마른 것에 비해 엉덩이는 탱글탱글하여, 꽤 때릴 맛이 난다. 너도 알지?”
“…….”
“근데 이걸 앞으로도 너하고 나만 알았으면 좋겠다. 말해 두지만 부탁은 아니야. 경고지.”
아, 제발 그 입 좀 다무십시오. 율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시체처럼 어깨 위에서 축 늘어졌다. 그래, 차라리 죽은 척을 하자. 이락이라면 대놓고 시체를 들고 가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말이다.
집으로 가는 동안 급격하게 잠이 쏟아졌고 깜빡 졸고 깨어났을 때는 벌써 집 마당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이락은 율을 마루에 내려놓고 신을 벗겨 주었다. 잠이 덜 깬 율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기다린 귀를 아무 생각 없이 손으로 아래서부터 위로 슥 훑었다.
이락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어 율을 쳐다봤다. 동시에 율은 마루에 대자로 뻗었다. 눈앞에서 서까래가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 이락이 몸 위로 기어 올라온다. 어느새 서까래는 사라지고 이락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율의 옆구리를 은근히 더듬으며 하체를 비벼 왔다.
“이락 님.”
“응.”
“졸려요….”
“…….”
“자고 싶어요…. 눈도 안 떠지고… 졸리고….”
웅얼웅얼하더니 눈을 감고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쥐방울.”
“…….”
“자?”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이락은 방율의 입술과 하얀 목덜미, 그리고 옷고름을 보며 갈등하다 결국 포기하고 옆에 나란히 눕는 것을 택하였다. 그런데 잠든 줄 알았던 방율이 또다시 웅얼거린다.
“이락 님… 귀… 귀가… 부드럽습니다….”
이락은 피식 웃었다. 저렇게 좋아하니 귀를 잘라 줘야 하나. 이번엔 모로 누워 잠든 방율의 얼굴을 감상했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귀가… 귀여워 죽겠어요… 헤헤….”
이락은 덩달아 웃었다.
“네가 더 귀엽다.”
“이락 님….”
“응….”
“…모합니다….”
이락은 웃음을 거두고 상체를 일으켰다. 방금 뭐라고 하였어? 라고 물으니 방율이 입술을 오물오물한다. 이락은 답답하여 방율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 봐. 뭐라고 했냐니까.”
“전….”
“그래, 말하거라.”
“전 좀 더 주세요… 김치전이… 너무 맛있습니다….”
“이런, 씨.”
곧 잠잠해지며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리고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락은 팔짱을 낀 채 방율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뭐였을까. 연모합니다? 정황상 그것밖엔 없는데…. 설마 내가 아니라 기진을 연모한다고 한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진짜 목을 잘라 버릴 테다.
그러다 허탈하게 웃고는 다시 방율의 곁에 누워 잠든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