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주막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이락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꼭 이리 시끄러운 데서 술을 마셔야 해?”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기방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왜.”
“그야….”
가면 아리따운 여인들이 이락 님만 쳐다보지 않습니까. 그것이 싫습니다. 화가 납니다. 이락 님이 여인들에게 말을 걸어 주는 것도 이제는 신경이 쓰입니다. 율은 차마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짓씹었다.
“아무튼, 여기서 드십시오. 제가 사겠습니다.”
“됐다.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저도 염치가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내게 해 주십시오….”
“마음대로 해.”
이락의 승낙이 떨어지자 율은 신나서 주인장을 불렀다. 옆자리에 음식을 가져다주던 주인은 부리나케 달려왔다.
“모처럼 두 분이 함께 오셨네요. 선비님, 안 본 사이에 옷차림이 근사해지셨습니다. 인물이 훤하니 뭘 입혀 놔도 보기가 좋습니다.”
율은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옷이 날개라더니, 요즘은 가는 곳마다 옷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를 않는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없는 소릴 한 것도 아닌데요. 오늘은 뭘 드시고 싶으십니까?”
“일단 탁주를 한 병 주시고, 전에 먹었던 부침개 있지요? 지금 됩니까?”
“되고말고요. 입맛에 맞으셨나 봅니다.”
“예. 고마운 분께 선물로 드렸는데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이야. 누군지 몰라도 맛을 아는 분이네. 제가 또 이 동네서 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부치죠. 안 그렇습니까, 이락 님?”
이락의 표정을 보던 주인이 흠칫한다.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며 시끄러우니 술상이나 내오라고 톡 쏘아붙이는 바람에 주인은 무안해져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이락은 상에 손가락을 탁, 탁 두드리며 율을 빤히 쳐다봤다.
“고마운 분이, 무령이야?”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졌지 않습니까….”
이락이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때마침 주인이 술과 잔을 가져왔다. 율은 두 개의 사발에 술을 가득 따른 뒤 이락에게 하나 건네줬다. 잔을 들어 부딪치자마자 술을 단숨에 비우더니 크흐, 하고 오만상을 찌푸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 이락은 조금 전 성질을 내려던 것도 잊고 소리 없이 웃었다.
“맛있어?”
“예…. 근데 이락 님은 안 드십니까?”
“나는 너처럼 술꾼이 아니라, 천천히 먹을 거야.”
술꾼이란 말에 율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 옆자리에 있던 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이곳까지 넘어온다.
“자네들 그 소문 들었나? 병조 판서가 중전을 음해하려 한단 이야기.”
“쉿. 조용히 하게. 함부로 떠들다가 끌려가는 수가 있어.”
“입 다문다고 될 일인가. 나는 책으로 직접 보았네.”
“어떻던가.”
“읽으면서 감동했네. 특히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빠지는 그 장면에서는, 하아, 내가 마누라 죽고 나서 십 년 만에 눈물이란 걸 흘려 봤다니까. 누가 지었는지 모르나, 글은 참으로 잘 썼더군.”
“나도 그랬어. 한번 읽으면 멈출 수가 없어서, 정신을 차려 보니 아침이었지.”
“아까워라. 내가 글말 깨우쳤어도 한번 읽어 보는 건데.”
듣고 있던 율은 기쁜 내색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안쪽으로 바싹 말아 물었다. 그래도 참기 힘들었는지 콧구멍이 씰룩인다. 그걸 본 이락이 헛웃었다.
“뭐냐, 그 표정은?”
율은 이락의 곁으로 자리를 옮긴 뒤 두 손을 나팔처럼 모으고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들이… 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도 귀가 있다.”
“잘 썼다고 칭찬하는 것도 들으셨습니까…?”
“암. 들었지.”
율은 들뜬 마음을 추스르고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어서 주인이 큼직한 김치전을 내왔는데,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워 침이 저절로 고였다. 율은 부침개를 젓가락으로 찢어 이락의 앞쪽으로 놓아 줬다.
“드셔 보십시오. 엄청 맛있습니다.”
이락이 한 입 먹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구나. 율은 기분이 좋아져 탁주를 한 사발 더 들이켰고 이락은 잔을 채워 주면서도 잔소리를 했다.
“너무 마시지 마라. 취하면 버리고 갈 거다.”
율은 취기가 올라 해맑게 웃었다.
“거짓말 마십시오. 그래 놓고 매번 챙겨 가시지 않았습니까.”
“누가 알아. 이번엔 진짜 버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이락은 젓가락으로 전을 집어 율에게 디밀었다.
“아, 해라.”
율이 당황하여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달라 주막 주인이 놀라서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다. 율은 황급히 이락을 말렸다.
“제, 제가 먹겠습니다.”
“부끄러워?”
“예….”
“재미있구나. 나하고 별짓을 다 했으면서 고작 전 하나 먹여 주는 것에 부끄럽다니.”
율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쉿. 그만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술을 마시려는데 벌써 빈 병이다. 율은 손을 들어 주인을 불렀다. 여기 한 병 더 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냉큼 술을 더 가져온다. 바로 술을 채우자 이락이 기가 찬 표정으로 쳐다봤다.
“대낮부터 무슨 낮술이냐고 투덜거리더니, 아주 작정했구나. 외모는 아니지만, 주량은 네 아비를 닮은 게 확실하다.”
율은 더는 웃지 않았다.
“저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뭔데.”
율은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속상해서 그럽니다….”
“무엇이?”
“술주정처럼 들릴까 봐 말 안 하려고 하였는데, 아까 저한테 그러셨잖습니까. 이번엔 진짜 버릴지도 모른다고….”
“그 말이 속상하였어?”
“실은….”
술도 먹었겠다, 율은 내친김에 마음을 털어놨다.
“저번에 이락 님이 갑자기 집에 가라고 했을 때도…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너무도 돌아가고 싶었던 용궁인데… 막상 가라고 하니… 절벽 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락은 말없이 율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술을 조금씩 비웠다.
“물에서 숨을 쉴 수 없어 두렵기도 하였는데, 한편으로는… 이락 님을 더 볼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이락의 눈빛이 짙어졌고 율은 또 술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는 알딸딸해지는 정신을 추스르려 고개를 흔들고 작게 심호흡을 하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제 감정에 대해서요….”
“…….”
“처음엔 이락 님이 싫었는데, 갈수록 마음이 바뀌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신경이 쓰이고… 곁에 오면 긴장되고… 심장도 멋대로 뛰고…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이 나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남들이 그걸 무엇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율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으나, 그 단어를 입으로 꺼내진 못하였다. 옆에선 아직도 병조 판서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모략이네 반역이네 하며, 그가 곧 처형당할 거라는 말까지 나오자 이락은 잔에 고인 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수백 년 전, 그러니까 내가 인간이었을 때 말이다.”
율은 취한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게도 남부러울 것 없는 가족이 있었다. 아프지만 인자하신 어머니. 책을 좋아하던 대쪽 같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닮아 고지식하지만, 심성 착한 큰형님. 하는 짓이 귀여워 매일 내게 놀림을 받던 누이동생까지.”
이락과 피를 나눈 사람들이라….
율은 그의 가족을 떠올리려 했으나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러다 하루는 집에 난리가 났다. 처음엔 도둑이 든 줄 알았지. 하지만 아니었다. 아버지가 반역죄를 뒤집어썼고, 병사들이 들이닥쳤어.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주도한 이가 내 숙부였다. 어릴 적 나에게 칼싸움을 가르치던 이가, 내 아버지와 형님의 목을 치러 왔더구나.”
율은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이락은 설명을 계속하였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여동생과 어머니를 구하려 한 일, 그러나 지키지 못하였고, 자신의 눈앞에서 그들의 머리가 으깨져 죽어 간 일. 듣기만 해도 참담하여 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다면 이락은 그 끔찍한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왔단 말인가….
“이후로 기억을 잃고, 저승에 가게 됐다. 처음엔 고생을 무척 했지. 내게 자리를 물려주셨던 전 염라는 엄한 분이었거든. 하지만 내겐 아버지 같은 분이기도 해. 내 강한 성정을 억지로 꺾으려 들지 않고 다스리는 법을 알려 주셨지.”
이락은 저승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잃었던 기억이 돌아와 있더구나.”
“…….”
“당시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뭐였는 줄 알아?”
“숙부를… 찾아가셨습니까?”
“그래. 며칠을 그 집 지붕 위에서 지켜봤다. 이미 수백 년이 흘렀으니 복수가 다 무슨 소용이겠냐 싶어서 관두려고 했다. 하나, 그자는 변하지 않았더구나. 내게 한 짓을 그 집 하인한테 똑같이 하는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혔지.”
“…죽이셨습니까?”
이락은 슬프게 웃는다.
“소중한 것을 눈앞에서 빼앗고 싶었다. 그리하여 난, 놈의 숨통을 붙여 놓은 채 놈이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죽이러 갔다. 아이는 불타는 방에서 벌벌 떨면서도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더구나. 지금의 너처럼.”
율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이 졸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사발을 든 손끝은 미세하게 떨려 왔다.
“죽이고 싶었지만, 하늘의 훼방으로 죽이지 못했다. 벌을 받아 인간 세상으로 쫓겨났으면서도 오랜 시간 그 애를 찾아다녔다. 죽여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어. 집착이란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그래서요…?”
“시간이 흐르니 내려놓게 되더구나. 아니, 내가 살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하다니 재미있지 않으냐. 이 모든 게 하늘의 뜻이라면 난 도무지 그 영감탱이의 의도를 모르겠다.”
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락은 의외로 담담하였으나 속이 어떤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다 듣고 나니 어때. 너를 죽이려 할까, 두렵진 않아?”
율은 먹먹해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락이 불쌍하다. 그의 삶이 처연하고 안쓰러워서 당장에라도 안아 주고 싶다. 그렇지만 내게 자격이 있을까. 전생을 기억하는 이상 내게서 위안을 얻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은 용기를 내었다.
“저는 그이가 아닙니다…. 기억도 하지 못합니다….”
“안다.”
“이락 님의 고통을 전부 헤아릴 순 없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기필코 제게 원한을 갚겠다 하시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락이 섬뜩하게 물었다.
“당장 네 목을 치겠다 하면? 그래도 내줄 테냐?”
율은 황급히 양손으로 목을 붙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좀…. 다른 건 없습니까. 듣고 있던 이락은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율은 민망해 손을 내렸고 이락은 두 개의 빈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뭐든 할 것처럼 굴더니, 왜 말이 바뀌었어?”
“목은 좀…. 저더러 죽으란 얘기지 않습니까.”
“그럼 어디 네가 정해 봐라.”
율은 고민했다. 기어코 신체 일부를 잘라 내겠다면….
“머… 머리카락? 아니면 손톱?”
“하. 눈치만 없는 줄 알았더니, 뻔뻔스럽기까지.”
율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좋아. 네가 망설이고 있으니 내가 정하지. 대신 반드시 내주어야 한다.”
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발을 드는데 손이 덜덜 떨린다. 그가 무엇을 요구할까. 제발 팔다리는 아니었으면. 혹시 혀를 뽑는 거 아닐까. 아니면 눈알? 손가락이나 발가락 정도면 어찌 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면 설마… 마음을 달라는 건 아니겠지? 율은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졌다. 마음이라면 충분히 줄 수가,
“엉덩이를 줘.”
율은 그대로 풉, 하고 술을 뿜었다.
어이없이 쳐다보는데 이락이 느긋하게 자세를 뒤로 기울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다.
“네가 먼저 엉덩이를 벌려 주면, 내 기분이 풀릴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