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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87화 (87/102)
  • 87화

    대낮부터 찾아온 소월은 거의 죽상을 하고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언제부터 여기 머물고 계신 겁니까?”

    “며칠 안 됐다.”

    “소첩한테 미리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그랬으면 금산까지 다녀오는 헛고생은 하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됐고. 연통도 없이 찾아온 이유나 말하거라.”

    소월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식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무얼.”

    “지금 이것 때문에 야단이 났습니다.”

    그녀는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더니 골이 아픈지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락은 책을 들어 앞장을 펼쳤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한 장씩 넘기자 소월이 하소연을 해 온다.

    “도성 안에 이것이 쫙 퍼졌습니다. 병판이 어제 영월관에 찾아왔는데, 어휴, 말도 마십시오. 늙은 양반이 어찌나 기운이 좋은지, 상을 뒤엎고 난리가 났지 뭡니까.”

    이락은 여전히 책장만 넘겼다.

    “제 말 듣고 계신 겁니까?”

    “듣고 있어.”

    “궁에서 나인들이 돌려 보다가 윗전까지 전해진 모양입니다. 왕께서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 병판은 책을 쓴 이를 색출하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지필묵 파는 상점부터 책방 주인들까지 모두 데려다가 낱낱이 조사를 하는 모양인데, 신기하게도 아는 이가 하나도 없답니다.”

    “노인네 똥줄이 타들어 가겠군.”

    “책을 전부 수거하라고 명령하였는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이락은 책을 탁 덮고 바닥에 내려놨다.

    “그래서. 나한테 찾아온 연유가 뭐냐. 이걸 쓴 자를 잡아 달라 온 건 아닐 테고?”

    “겸사겸사 왔습니다. 오라버니라면 아실까 해서요. 거기다 이화 상단에서 더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연락이 왔답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아니다 싶어 발을 빼려는 거겠지요. 그러니 병판이 더 미치지 않겠습니까.”

    “흠….”

    “오라버니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왜. 없다고 하면 너도 발을 빼려고?”

    소월이 새침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락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이렇게 빨리 퍼져 나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거리는 책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고, 글을 모르는 이들 또한 소문을 통하여 알아 갔다.

    [모함이라며? 병조 판서가 자기 딸을 중전에 앉히려고 계략을 꾸몄다던데. 세상에. 천벌을 받을 놈들. 그러고 보니 놀이패들도 요즘은 안 보이네. 대놓고 중전마마를 험담하더니 말이야. 설마 그들도 병조 판서의 사주를 받았던 것인가. 자네, 책을 보았나? 옥황상제께서 직접 중전을 살려 냈다 하였지. 혹시, 우리도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예끼, 이 사람아. 우리가 언제 모함을 했나. 나쁜 것들한테 속아서 그리했던 거지.]

    영특하게도 방율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적는 대신 책에 옥황상제를 몇 번이나 언급하며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줬다.

    “내 방법은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겠다.”

    “뭐를요?”

    “병판을 멀리하는 게 앞으로 네 신상에 좋다는 거. 그래야 목숨도 오래 붙어 있을 거라는 거.”

    소월은 붉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할 말이 끝났으면 그만 가 봐라. 나도 할 일이 있으니.”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쓰개치마를 챙겼다.

    “근데 왜 이곳에 집은 구하신 겁니까? 평생 금산 밖으로 나와 살지 않을 거라 하셨으면서요.”

    “알 것 없다.”

    “선비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곱상하게 생기신 선비님 말입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방율…? 맞지요?”

    “너는 참, 그 애한테 관심이 많아.”

    방율 이야기에 어둡던 소월의 낯빛에 화색이 돈다.

    “딱 봐도 동정처럼 보이는데 참으로 임자가 있습니까? 제게 거짓말을 하신 거지요? 보아하니 부유한 댁 선비님은 아닌 거 같은데, 혹 출셋길에 오를 수 있게 뒷바라지를 해 줄 여인이 필요하진 않답니까?”

    이락이 인상을 썼다.

    “소월아.”

    “예?”

    “나가.”

    “어머. 왜 갑자기 짜증을 내고 그러십니까. 안 그래도 갈 참이었습니다. 아무튼, 당분간 저는 영월관에서 몸 사리고 있을 테니, 오라버니도 조심하십시오.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이락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다. 수세에 몰리면 병조 판서는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모의에 가담했던 이들을 남김없이 처단할 것이다. 그중에는 밀서를 주고받았던 저도 포함이겠지. 그러고도 남을 만큼 성정이 잔혹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락은 소월을 바라봤다.

    “너나 조심하거라. 아니면 당분간 머물 곳을 알려 줄 테니 그리로 가 있든가.”

    소월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그래.”

    소월은 싱긋 웃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가 누구냐며, 이 험한 곳에서 여태까지 살아남은 소월이라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을 한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사라졌고, 혼자 남은 이락은 책을 더 보려다 관두고 밖으로 나왔다.

    집을 둘러보는데 썰렁하다. 동네 구경을 하러 간 방율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역시, 따라갈 걸 그랬나. 뒤늦게 걱정이 된다. 마루에 앉은 이락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난 왜 방율을 잡아 두고 있는 거지. 정말 연모인가.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문이 끼이이, 열리면서 방율이 들어온다. 그런데 입고 나간 옷이 온통 흙투성이다. 어디서 누구하고 싸움이라도 한 건가.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오자마자 우물로 가 손부터 닦는다.

    “꼴이 왜 그래?”

    율이 입을 다물고 있자 이락은 쫓아가 옷에 묻은 흙을 무심하게 툭툭, 털어 줬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거 보니 흙에 파묻히기라도 한 건가.

    “말을 하거라. 무엇을 하다 왔는지.”

    율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불쌍한 아가씨를… 돕다가 왔습니다.”

    이락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니 올렸다.

    “불쌍한 아가씨?”

    “예…. 걷다 보니 넓은 밭에 웬 어린 아가씨가 혼자서 엉엉 울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유를 물었더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새어머니, 새언니와 살고 있는데, 구박이 심하여 날마다 궂은일을 시키고 트집을 잡는답니다. 며칠 전엔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더니, 오늘은 엄청나게 넓은 밭을 호미 한 자루 쥐여 주며 혼자 일구라고 하였답니다.”

    이락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얼마 전 아침에 오기로 한 왕구가 밤이 되어 흙투성이로 나타나 방율과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부하 중에 왕구 말고도 비슷한 경험을 한 이가 여럿이다.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그래서?”

    “땅바닥에 앉아 엉엉 울고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남의 집 밭을 갈아 주다 늦었다? 이거구나.”

    “예… 그렇지요….”

    “네가 소야? 그걸 왜 해.”

    “도움을 청하는데 어찌 모른 척합니까.”

    “하나만 묻자. 그 여인도 일했느냐?”

    “아니요. 힘들어하기에… 저 혼자….”

    이락은 쯧쯧 혀를 찼다.

    “호구가 따로 없다.”

    율은 서운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처지가 딱하여 도와준 것입니다….”

    “처음 보는 그 처자는 딱하고, 집에서 혼자 처량하게 기다리는 나는 안 딱하디?”

    “기다리셨습니까…?”

    “…….”

    침묵이 길어졌다. 이락은 됐다며 홱 돌아서다 율의 손에 들린 봉투를 발견하였다. 뭐냐. 그건. 하고 물으니 율이 봉투를 열어 보인다. 떡이다.

    “아가씨가 고맙다며 이것을 주었습니다….”

    “시중에 파는 것은 아니구나.”

    “집에서 직접 찌었다고 합니다.”

    율이 하나 꺼내려고 하자 이락이 홱 빼앗아서는 옆으로 치운다.

    “먹지 마라.”

    “어, 어째서요?”

    “아까 소월이 다녀갔다. 그 애가 병조 판서의 사람인 거는 너도 알지?”

    “예….”

    이락은 설명을 시작하였다. 당분간은 혼자 있을 때 함부로 문을 열어 주지 말며, 혼자 나다니는 일도 삼가고, 사정이 딱하다고 하여 쫓아가거나 도와주지 말라고 했더니 율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진다. 자신이 제대로 사고를 쳤구나, 깨달은 얼굴이었다.

    “책이… 생각보다 많이 퍼졌나 봅니다.”

    “그래.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 알았으면 돈을 받고 넘기는 건데.”

    “아쉬우세요…?”

    “응. 많이.”

    율이 살짝 웃었다.

    “그럼 다음엔 이락 님이 글을 쓰십시오….”

    이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써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긴 하다.”

    “어떤 내용입니까?”

    “사람들은 원래 금기시된 관계에 환장하지. 예를 들면, 피가 섞인 혈육끼리 사랑을 나눈다거나, 원수인 두 가문의 자식들이 첫눈에 빠져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만난다거나, 아니면….”

    이락은 말을 멈췄고, 율은 그를 쳐다봤다. 문득 그의 집에서 본 책이 떠올랐다. 물 건너온 책이었는데 원수 가문인 두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졌다가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는 그런…. 결말이 어떻게 됐더라….

    그러다 궁금하여 물었다.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이락이 잠시 뜸을 들이다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생에 악연이었던 자들이 현생에 만나 인연을 맺는 이야기다. 꽤 흥미진진하지 않겠어?”

    아…. 율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며칠 동안 그 일에 관해서는 둘 다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다. 고민하던 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락 님….”

    “응.”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거라.”

    “이락 님과 저는… 어쩌다 그렇게 된 것입니까?”

    “…….”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락은 침묵하였고 율은 긴장하여 두 손을 마주 잡고 꼼지락댔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이락 님께 고통일 수 있다는 걸 압니다…. 말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제가 돌아가기 전 조금이나마 마음을 풀어 드릴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여 여쭤봤습니다….”

    이락은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리 모질게 대했는데도 너는 어째서…. 수백 년을 산 나보다 고작 스무 해를 산 네가 더 어른이구나. 함께 있다 보면 마음이 정리되고, 그러고 나면 쉽게 보내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판단한 듯싶다.

    이락이 빤히 보고만 있자 율은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안 하셔도 됩니다…. 기분을 상하게 해 드리려고 한 건 아닌데,”

    순간 이락이 손목을 잡아끈다. 율이 놀라서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맨정신으로 할 이야긴 아니니, 술이나 한잔 마시러 가자.”

    “대낮부터요?”

    “그래. 원래 속내를 털어놓는 데는 낮술만 한 것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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