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색이… 너무 화려한 것 같습니다….”
율의 걱정에 왕구는 격하게 감탄을 했다.
“무슨 소리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안 그렇습니까, 큰형님?”
마루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이락은 연분홍색 도포 위에 보라색 답호를 입은 방율을 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뭐, 나쁘진 않아.”
“그래도… 색이….”
매번 푸른색의 의복만 입다가 지나치게 화사한 색을 입으니 부담스러웠다. 경대에 비춰 봤으면 좋겠는데…. 율은 이락을 쳐다보며 망설였다. 경대를 꺼내 달라고 하면 싫어하려나.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 이락은 전과 다름없이 율을 대하면서도 묘하게 거리를 두는 태도였다. 율은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속상하였다.
“왜 나를 그렇게 쳐다봐?”
“경대를… 봐도 되겠습니까?”
이락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율을 위아래로 훑었다.
“말했잖아. 잘 어울린다고.”
“그래도 직접….”
“경대는 없다. 사라졌어.”
율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쩌다가요?”
“실수로 떨어트렸거든.”
율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이락은 그 이유를 알았다. 거울을 통해 가족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희망이 사라졌으니 당연하겠지…. 역시 좀 참을 걸 그랬나. 문득 궁금해졌다. 질투심에 눈이 뒤집혀 경대를 박살 냈다는 걸 알면 방율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런데 듣고 있던 왕구가 불쑥 껴든다.
“제가 하나 사 올게요! 시장에 볼일이 있는데 잘됐습니다.”
율이 아니라고, 없어도 된다고 사양했으나 왕구는 누가 말리기라도 할까 봐 쏜살같이 집을 나섰다. 미안한 표정으로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지켜보던 이락이 한마디 거든다.
“둬라. 그놈은 거울이 아니라 잿밥에 관심이 있어 자청해서 간 것이니.”
“잿밥이요?”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가씨 중에 마음에 드는 이가 생겼거든.”
아아. 그래서…. 율은 슬그머니 웃었다. 왕구 형님이 좋아하는 아가씨라니. 어떤 분일지 궁금해진다. 오면 물어봐야지…. 왕구가 떠나니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율은 가만히 앉아 먼 산만 쳐다봤고, 이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 다 약속이라도 한 듯 전생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언급을 피했다.
그러는 와중에 바람이 불고 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하였다. 안개 속에서 누군가 홀로 걸어 나왔는데, 율은 보지 않고도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아니나 달라 무령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나타나더니 율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 선비님. 어째서 아직도 이곳에 계신 겁니까?”
율은 술에 취해 무령에게 막말한 것이 떠올라 차마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가 미끄러지듯 율에게 다가오는데 이락이 먼저 앞을 가로막는다.
“왜 왔어?”
무령은 부채를 아래로 내리고 이락에게 정수리를 디밀며 쏘아붙였다.
“보이냐? 네놈이 그날 내 머리채를 잡는 바람에 가운데가 훤해졌다.”
치워. 네놈 머리 사정까지 내가 알아야 해? 이락은 무령의 머리를 손끝으로 밀었다. 무령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노려봤고, 율은 둘이 또 붙어서 싸울까 봐 재빨리 가운데로 파고들어 양손으로 둘을 떼어 냈다.
“두, 두 분 다 그만하십시오….”
“예, 선비님이 말리면 들어야죠. 저번처럼 좆같다는 욕을 듣고 싶진 않으니까요.”
율은 그 일이 떠올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제라도 사과를 하려 하는데 무령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책이었는데, 겉면에는 심청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율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니 무령이 슥 거두고는 슬쩍 웃는다.
“생각보다 빨리 나왔지요?”
“예! 정말 빠릅니다!”
“기쁘십니까?”
“당연히 기쁩니다!”
“그럼 하나만 묻겠습니다. 이락이 좋습니까, 아니면 제가 좋습니까?”
“그야, 이….”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율은 당황하여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이락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고, 무령은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율은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랐다.
“이… 이런 질문을 왜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운합니다. 책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목판에 새기고 찍어 내는 동안 수많은 구미호들이 갈려 나갔지요. 오죽하면 제게 항의하는 이까지 생겼겠습니까.”
율은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데 이락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 책을 낚아채 간다.
“생색 그만 내. 값은 내가 치를 테니.”
무령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돈이 차고 넘치니 네놈이 내면 되겠구나. 내 정수리 값까지 받아 낼 테니 그런 줄 알아.”
대꾸도 하지 않고 책을 넘겨 보던 이락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율은 궁금하여 그의 곁으로 가서 확인하다 입을 쩍 벌렸다. 맨 앞 장에 방율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이름도 떡하니 적혀 있었다. 거기다 밑에 <용궁 출신. 치명적인 귀여움. 울컥하면 욕쟁이가 된다.> 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율은 아연실색하였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원래 지은이 이름이 들어가질 않습니까. 제가 특별히 선비님 얼굴까지 그려서 넣어 드렸습니다.”
율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모든 책에 이것을 넣으신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제가 분명 아무것도 넣지 말아 달라 부탁을 드렸는데….”
“그랬나요? 취해서 깜빡 잊었나 봅니다.”
무령이 뻔뻔하게 대꾸하였고, 율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이락을 쳐다봤다. 이락 님 이 일을 어찌합니까. 지은이가 저인 걸 들켜서는 안 되는데…. 그런데 이락이 책을 마루에 툭 던지며 코웃음을 친다.
“걱정하지 마라. 네게 장난을 치는 거니.”
이락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무령은 키득거리고 짓궂게 웃고 있었다. 아아, 나를 또 속인 것인가. 놀림 받은 것이 억울하여 무령을 째려보는데 이락이 곁으로 와서 한마디 한다.
“저 새끼, 죽여 버리고 싶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봐라. 그래도 저놈보단 내가 나잇값을 하지 않아?”
기가 찼으나 내색할 순 없었다. 율이 보기엔 둘 다 비슷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질문 자체가 유치하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걸까. 율은 어떤 말을 하여도 이락의 마음이 상할 것을 알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쓴 글이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이 신기하여 마루로 냉큼 가서 한 장씩 넘겨 봤다. 빠진 내용이 있나 꼼꼼히 살피는 동안 이락과 무령은 집 밖으로 나가 대화를 나눴다. 둘은 붙어 있기만 하면 싸우는데 멀리서 보면 제법 친한 사이처럼 느껴졌다.
“빠진 것이 있어?”
고개를 드니 어느새 이락이 앞에 와 있었다.
“무령 님은요?”
“갔어.”
“아직 보는 중입니다….”
율은 책을 손끝으로 훑었다. 무령이 꽤 좋은 종이를 사용했구나, 알 수 있었다. 신경을 써 준 것이 고마웠고 부디 이것으로 위기에 빠진 심 낭자를 도울 길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수하들을 시켜 도성 안에 책을 모두 풀었다는구나. 호국에서만 사용하는 종이와 먹이니 추적이 쉽지 않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오늘 할 일이 없다면 책방에 들러 직접 확인하는 것이 어떻겠어?”
“그…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건 또 뭐야.”
“그럼 이락 님….”
“응.”
“내려간 김에 다른 거처를 알아봐도 될까요…?”
“그러든가.”
선뜻 허락을 해 주었기에 율은 좋으면서도 우습게도 서운한 마음이 함께 들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씩씩하게 웃고는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이락이 사 준 갓을 쓰고 수정으로 된 갓끈을 달았다. 화려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였는데, 이락이 몹시 흡족한 표정이라 더는 토를 달지 못했다.
***
“여기 어떻습니까? 어느 양반 나리가 애첩에게 주려고 미리 사 둔 집인데, 갑자기 비명횡사했지 뭡니까. 거기 마나님께서 집은 마음에 쏙 드는데 죽은 남편이 떠올라서 싫다고, 아깝지만 가격을 낮춰서라도 빨리 처분해 달라 하셨습니다. 벌써 눈독 들이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이락 님이라 특별히 먼저 보여 드리는 겁니다.”
율은 눈앞에 있는 집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 아닌가. 혼자 머물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빈방도 여러 개였다. 이락이 흐음, 하고 고민을 하고 있길래 율이 얼른 나서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는 이리 크고 비싼 집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중개인이 이 집을 꼭 사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했다.
“에이, 선비님. 요즘 시세를 모르시네. 도성 안에서 이 가격에 이 정도 집을 구하는 것이 어디 쉬운 줄 아십니까. 근방에 유명한 학당은 다 모여 있어서 아이 키우는 분들한테는 안성맞춤인 데다, 풍수적으로도 금산의 기운을 받는 자리가 여깁니다. 혹시 압니까. 나중에 선비님의 아이가 궁에 들어가 큰일을 할지도요.”
율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갈 날이 보름도 안 남았는데, 혼자 이런 곳에서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떠들어도 중개인에겐 말이 통하지 않아 나중엔 이락을 붙들고 하소연했다.
“이락 님. 저는 주막이나 여각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고민하던 이락이 계약을 진행하겠다고 하자 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반대로 중개인은 신이 나서 잠시 기다리라며 급히 자리를 비웠다. 이락은 당황해하는 율을 설득했다.
“저자의 말대로 조건이 나쁘지 않아. 볕이 잘 들고 위치도 좋아서 사 두면 분명 가격이 오를 것이다. 당분간은 네가 머물고, 이후에는 내가 머물러도 돼. 아니면 돈을 받고 빌려 줘도 되겠지. 방이 여러 개니 여각처럼 이용할 수도 되고.”
아…. 율은 자기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있겠네요….”
이락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쯧. 이렇게 집값이 오를 줄 알았으면 예전에 책을 판 돈으로 옥장판이 아니라 집을 잔뜩 사는 건데.”
뒤늦게 후회하는 이락을 보며 율은 터지는 웃음을 참았다. 옥장판은 평생 이락을 쫓아다니며 괴롭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중개인이 돌아와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율은 화단 앞에 앉아 각양각색의 꽃을 구경하였다. 양반 나리가 애첩을 무척 아끼었나 보다. 이렇게 예쁘게 관리를 해 두다니.
때마침 어디선가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와 주위를 맴돈다. 넋을 놓고 보다가 손을 뻗으니 그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신기하여 환하게 웃다가 이락에게 보여 주려고 뒤를 돌아봤는데, 이락도 저를 빤히 보고 있다.
아…. 율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아 고개를 홱 돌렸다.
나비는 날아가고, 이어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온다.
“쥐방울. 가자.”
율은 혹여라도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 몸을 웅크린 채 땅만 쳐다봤다.
“어딜요…?”
“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야지.”
“그,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차피 수저하고 밥그릇 하나만 있으면 되는걸요….”
“왜 하나야?”
“그야… 당분간 저 혼자,”
“나는 굶어?”
율은 말을 멈추고 돌아봤다. 예…?
그러다 뒤늦게 깨닫고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설마, 이락 님도 같이 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