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왕구가 여희를 지게에 지고 도착하였을 때쯤 방율은 잠이 든 후였다. 한참을 사랑방에 머물던 여희는 밖으로 나오며 작게 한숨을 흘리었다. 그녀는 마루에서 힘겹게 내려와 평상에 앉아 있는 이락에게 다가갔다.
“상태가 어떠하냐.”
여희가 뒤를 힐긋 돌아보더니 사립문 쪽으로 향한다.
“저하고 좀 걸으시지요.”
“괜찮겠어? 몸도 불편한데.”
“아무리 늙었어도 이 정도는 걷습니다.”
이락은 그녀와 집 밖으로 나섰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반대편 산등성이가 붉은색으로 물드는 중이다. 잠시 그것에 눈길을 주고 있는데 여희가 소매에서 부적을 하나 꺼내 건넨다.
“전에 음기를 눌러 놨더니 그것이 원인이 된 모양입니다. 이것을 태워 먹이십시오. 먹는 즉시 몸이 회복되어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락은 손에 쥔 부적을 물끄러미 봤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었구나. 이걸 먹이면 더는 방율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나는 진심으로 방율이 떠나길 바라는 걸까. 솔직해지자. 돌아왔을 때 내심 기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어젯밤에도….
여희가 손으로 부적을 덮어 이락의 사고를 멈춘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하였다.
“지난번에는 무언가 훼방을 놓아 그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이락 님과 상성이 맞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
“이미 알고 계시지요?”
“그래.”
“전생에 악연이라고 하여 현생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락 님과 저 아이는 다릅니다. 함께 있으면 크게 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저 아이가 의도치 않아도 결과가 그리 정해져 있습니다. 제발 보내십시오. 이번엔 이년의 부탁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간절한 청에 이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리하도록 하지.”
선뜻 대답하였는데도 여희는 근심을 내려놓지 못하였고, 이락은 그녀를 다독여 안심시켰다. 곧이어 왕구를 불러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라 명하였는데, 지게에 오르기 전까지도 그녀는 몇 번이고 이락에게 꼭 돌려보내라며 신신당부를 하였다.
여희가 떠나고 난 뒤 이락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궁이 앞에 앉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던 그는 부적을 불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것을 태우려는 순간 문이 덜컥 열리면서 발소리가 난다.
방율이 언제 깨어났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나온다. 이락은 부적을 접어 손에 숨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우물로 간 방율이 대야에 물을 잔뜩 받길래 처음엔 씻으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얼굴을 처박는다.
그러더니 잠시 후 고개를 번쩍 들고 헉, 헉 숨을 몰아쉰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길래 그리로 가서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놀라서 돌아보는 방율의 눈에 물인지 눈물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가득 고였다.
이락은 쯧 혀를 차고는 소매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 준 뒤 한 발 물러났다.
“만두를 먹으니, 힘이 남아도는 모양이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구나.”
“죄송합니다….”
“네가 자는 동안 무녀가 다녀갔다. 전에 봤지? 여희라고.”
“예….”
“그 아이가 말하길, 음기가 눌려 그런 증상이 있는 것이라 하더라. 그래서,”
율의 눈빛에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읽고 이락은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옅은 갈색 눈동자와 곧은 콧대, 그리고 밤새 앓느라 트고 갈라진 입술을 차례대로 훑어 내려갔다.
율은 마음이 조급해져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요…?”
이락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 돌아온다고 염려치 말래.”
“시간이라면 얼마나…?”
“…….”
“이락 님…?”
“보름.”
예? 율은 할 말을 잃었다. 보름이면 원래 머물기로 한 달포를 채우고도 남는 시간이 아닌가. 이락과 얼굴을 마주 보고 지내는 게 불편해진 상황에서 이곳에 보름을 더 머문다는 건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분이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빨리 돌아갈 수 있는 방도가 있다거나, 아 맞다! 무녀라 하였지요. 그럼 부적을 쓰면 효험이 있지 않겠습니까….”
“부적?”
“예. 부적이요….”
“…….”
“이락 님?”
이락은 평소와 달리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대답이 한 박자씩 느렸다.
“글쎄다. 그런 이야기는 없던데.”
아…. 율은 절망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서둘러 다른 거처를 알아봐야 하는 건 아닐까. 열도 내리고 걷는 것도 무리가 없으니 오늘 당장에라도 마을에 내려가 머물며 지낼 곳을 찾아볼까. 고민하다가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아 평상으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때마침 대야에 받아 둔 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래도 다행이다. 돌아갈 수 있다니…. 영영 가족을 못 보게 될까 봐 무섭고 두려웠다. 안도하는 동시에 눈물이 차오른다. 고개를 떨구자 이락이 맞은편에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또 울어?”
“예….”
“어째서.”
“기뻐서요…. 가족들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까 봐 그것이 죽을 만큼 두려웠습니다…. 그러면 영영 이곳에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락은 손에 쥔 부적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율이 눈물을 훔치고는 고개를 든다.
“이락 님께는 송구합니다…. 몸도 나아진 것 같으니 내일 일찍 마을로 거처를 옮기겠습니다. 불편하셔도 그때까지만 참아 주십시오….”
이락은 침묵했다. 분명 몸이 나으면 옮기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끝없이 갈등이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부적을 태워 먹이고 돌려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어젯밤 사경을 헤매는 방율을 보며 원수고 나발이고 숨만 붙어 있어 달라고 바랬던 건 무슨 마음일까. 욕정이 아니었나. 정말 이 아이를 연모하기라도 하는 걸까. 미련을 떨다 여희의 말대로 된다면, 나는 방율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이락 님…!”
평상에 앉아 있던 방율이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더니 이락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귀… 귀가…!”
“응?”
“방금… 이락 님의 귀가 잠깐 사라졌었습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소리다. 이락은 손으로 머리를 더듬었다. 뽀송뽀송한 털을 가진 기다란 귀가 만져진다.
“멀쩡히 붙어 있질 않느냐.”
율은 다소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진짭니다…. 순식간에 사라졌었습니다….”
이락이 어이없이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이것이 떼었다 붙였다 요술이라도 부리는 줄 알아?”
“믿어 주십시오. 헛것을 본 게 아닙니다….”
흠. 진지한 표정을 보니 장난을 치는 건 아닌 듯한데. 이락은 재차 귀를 만져 확인하였다. 천제가 벌을 내리어 지상으로 추방할 때 이 망할 귀를 달아 놓는 바람에 얼마나 꼴이 우스워졌는지 모른다. 칼로 몇 번 도려내려 시도까지 해 봤으나,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전혀 먹히질 않았다.
방율은 여전히 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빛을 보니 신기한 것도 있지만 한번 만져 보고 싶어 죽겠는 표정이다. 이락은 내키지 않았으나 어제 죽을 고비도 넘긴 놈한테 박하게 구는 건 아닌 것 같아 인심을 베푼다 생각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한번 만져 보든가.”
“아… 아닙니다. 어찌 감히.”
“얼른.”
“그래도….”
“모가지 부러지겠다.”
그 말에 율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락의 귀를 만졌다. 보들보들한 털을 손끝으로 문지르자 마음이 안정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락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하다. 하, 빌어먹을. 욕을 하며 숨소리가 거칠어지길래 율은 손을 떼고 슬그머니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너무 대놓고 만졌지요…?”
“아니다. 갑자기 짜증이 나서 그런다.”
“왜요?”
“있다, 그런 게.”
아아. 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하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동네에 여든이 넘는 노인분이 계시는데 갈수록 잔소리도 늘고 짜증도 변덕도 심해져 며느리가 무척 고생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락 님은 그분보다 연세가 훨씬 많으니 감정의 기복이 더더욱 심하실 겁니다.”
이락은 이를 갈며 방율을 째려봤다.
이건 위로를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성질을 돋우겠다는 건지….
“왜… 그렇게 보십니까?”
“너는 다 좋은데 가끔 지나치게 눈치가 없어. 그게 얼마나 사람 짜증 나게 하는지 모르지?”
“앞에도 말하였지만… 이락 님이 짜증이 많아진 것은 제 탓이 아니라….”
“닥쳐.”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