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열이 떨어지질 않으니, 이대로 뒀다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의원의 말에 이락의 표정이 굳었다. 아침에 떠난 방율은 해가 질 때쯤 돌아왔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왕구의 말에 의하면 방율이 물속에서 헤엄을 칠 수 없더라고, 숨을 쉬지 못하였다고,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탈진할 정도로 울었단다.
다시 데려오긴 하였는데, 영문을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여우의 구슬을 거둬 가서일까. 아니면 여희가 써 준 부적을 먹였기 때문일까. 정확한 답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의원뿐이었다.
“우선 열이 떨어질 수 있도록 천에 미지근한 물을 적셔 몸을 수시로 닦아 주십시오. 탈수 증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물도 잊지 말고 먹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약은 처방해 드릴 테지만,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맥조차 제대로 잡히질 않습니다.”
이락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의원은 아침에 오겠다며 떠났고, 밖으로 나오자 왕구와 왕태가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다 말고 뛰어나왔다.
“의원이 뭐랍니까.”
“원인을 모른다고 했다. 내일 아침에 오겠다고, 하니 네가 데리러 가라.”
의원은 나이가 많아 걸음걸이가 느렸다. 기다리다 보면 늦어질 것 같아 이락은 왕구에게 아침 일찍 의원을 데려오라고 시켰다. 그러고 나서 대야에 찬물과 솥에서 끓는 물을 섞고 무명천을 챙기는데 지켜보던 왕태가 나선다.
“형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직접 수발을 드는 것은 보기 좋지 않습니다.”
상관없으니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살펴. 이락은 지시를 내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고 천을 물에 적시는 동안에도 방율은 눈을 뜰 생각을 하지 못한다. 연신 숨을 가쁘게 몰아쉬길래 옆에 있던 물그릇과 수저를 들고 곁으로 다가갔다.
물을 한 수저 떠 입에 넣었으나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그대로 흘러 버린다. 천으로 입가를 닦아 준 뒤 반복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이락은 애가 타들어 가 물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방율의 턱을 쥐어 강제로 입을 벌렸다. 그러자 닫혀 있던 눈꺼풀 안에서 눈동자가 움직인다.
정신이 드는 건가, 하였는데 잠시 반응을 하였을 뿐 눈은 뜨지 못한다. 이후에는 젖은 천으로 몸을 닦아 주었다. 처음에는 얼굴과 옷 밖으로 드러난 부위를 닦았는데, 그래도 열이 쉽게 떨어지질 않아 나중엔 입고 있는 의복을 벗기고 다리속곳 하나만 남겼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는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하였고, 젖꼭지는 연분홍빛을 띠었다. 혀로 핥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이락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빌어먹을. 애가 아파서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욕정이 생기려 하다니. 그는 자책하며 겨드랑이부터 시작하여 등과 배, 허벅지 안쪽까지 구석구석 닦았다.
몇 번을 반복한 뒤 이마를 짚자 열이 살짝 내려간 듯하다. 손을 아래로 옮겨 이번엔 뺨에 손등을 댔다. 희고 탱글탱글한 볼은 갓 찌어 낸 만두처럼 따끈따끈했다. 그러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꺼풀이 올라간다. 이락은 급히 상태를 확인하였다.
“정신이 드느냐? 물을 줄까?”
그러나 방율의 눈동자는 이락을 보는 게 아니라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빛에 초조함이 생겨났다.
“쥐방울.”
소리에도 반응이 없다. 이락은 서둘러 물그릇을 찾았다. 수저로 물을 뜨는데 방율이 소리를 낸다.
“…합니다….”
“뭐?”
“연모… 합니다….”
이락이 멈칫했다. 방 안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고, 방율의 연갈색 눈동자는 눈꺼풀 안으로 스르르 자취를 감췄다. 잠꼬대처럼 춥다고 말하며 몸을 웅크리기에 고민하다 얇은 이불을 가져와 덮어 주니 숨소리가 차츰 안정을 찾아 간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한 식경이 지나니 또다시 열이 들끓었고, 이번엔 아무리 몸을 닦아도 열이 잡히질 않았다. 거기다 물 또한 아예 삼키지 못하는 지경에 다다르자 이락은 애가 타들어 갔다.
“방율. 율아….”
부르는 소리에도 반응이 없이 숨이 점점 가늘어진다. 이락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중엔 원수고 나발이고 과거는 집어치우고 방율이 제발 무사히 살아 주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동안 밖에선 어느새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다행히 열이 잡힌 듯합니다.”
이락은 지친 얼굴로 한 손에 젖은 천을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의원은 진맥을 보았고 어제보단 경과가 나쁘지 않다는 말로 이락을 안심시켰다.
“당분간은 마음 편히 쉬게 해 주십시오.”
둘은 밖으로 나왔고, 이락은 목소리를 낮춰 의원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물에서 숨을 쉬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어?”
“바다 수인은 음의 기운이 강합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육지에 머무는 동안 기운이 바뀌면서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추론이지요.”
기운이 바뀌었다…? 이락이 생각에 잠겼고 의원은 내일 아침 오겠다며 일이 생기거든 바로 연통을 넣어 달라 말하고 집을 나섰다. 한시름 덜어 낸 이락은 방으로 들어오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방율과 마주쳤다. 방율은 하루 새 수척해진 얼굴로 눈을 뜨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락과 마주치자 불편한지 시선을 피하고는 이불을 꼭 말아 쥔다.
“정신이 들었구나.”
“제가 왜… 이곳에 누워 있습니까…?”
“밤새 열이 펄펄 끓었다.”
율의 시선이 대야와 젖은 천에 가서 닿는다. 그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는데 그 와중에도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앉아 있거라.”
율은 말을 듣지 않았다. 고집을 부려 일어나려 하기에 이락은 팔을 붙들어 강제로 앉혔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방율이 시선을 피한다. 그 태도에 이락은 감정이 상했다.
“어째서 말을 듣지 않아?”
“이곳에… 머무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방을 비워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아, 이락은 어제 방율이 소월과 마주친 일을 뒤늦게 떠올렸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는데, 설마 그것 때문인가. 이락은 살짝 억울하기도 하여, 조곤조곤 설명했다.
“내 굳이 변명 같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어제 네가 본 것은 오해다. 그 아이는 잠시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옷을 갈아입은 것뿐이야. 혹시나 하여 말해 두지만 네가 떠나기 전 내가 기방에 며칠 머물렀을 때도 난 여인을 곁에 두지 않았다. 맹세하는데, 너하고 만나고 나서는 다른 이를 안은 적은 결단코 없어. 하, 내가 왜 구질구질하게 이런 설명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예….”
“예에? 그게 끝이야?”
“예….”
이락이 조금 분한 투로 따졌다.
“너 설마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 말대로 방탕한 놈이라?”
“그게 아닙니다…. 머리가 띵하여…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라서….”
발끈한 게 머쓱하여 이락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에도 율이 한 번 더 일어날 준비를 한다.
“정신을 차렸으니… 얼른 다른 거처를 알아보겠습니다….”
“다른 거처라니? 네가 머물 곳이 여기 말고 더 있기라도 해?”
“찾아보면 있지 않겠습니까….”
이락은 방율이 왜 고집을 부리는지 알고 있었다.
돌아가라고 모질게 내쫓은 장본인이 저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가더라도 병은 다 낫고 가라. 괜히 객사해서 기분 찜찜하게 만들지 말고.”
율은 대답하지 않았고 이락은 불현듯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연모… 합니다….]
누구였을까. 기진인가. 아무래도 기진이겠지. 그 망할 왕자 놈이 뭐가 좋다고. 음흉한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저리 사람을 볼 줄 몰라서야 앞으로 고생길이 안 봐도 훤하다.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율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이락 님….”
“응.”
“제가… 왜 물에서 숨을 쉴 수 없게 됐는지 아십니까…?”
질문하면서도 간신히 울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방율은 물에서 나고 자랐으니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상상 이상으로 클 것이다. 왕구를 통하여 여희를 데려오라 하였으니 직접 보면 뭔가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알 만한 이를 불렀다. 그러니 너는 잘 먹고 잘 자면서 기다려. 이 방에 다른 주인은 없으니까, 괜한 상상으로 사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예….”
풀이 잔뜩 죽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 한편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불편하다. 그런데 그때 율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이락은 기가 차면서도 웃음이 났다.
“배고파?”
“아닙니다….”
“아니긴. 배 속에서 천둥이 치는데. 내 가서 죽을 쒀 오마.”
일어나는데 율이 이락의 바짓가랑이를 살포시 붙든다.
“그….”
이락은 뿌리치지 않고 율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할 말이 더 남았어?”
머뭇거리던 율은 바지를 슬그머니 놓아 버린다. 밤새 간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락은 가려다가 말고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손으로 율의 이마를 짚으니 흠칫 몸을 굳힌다. 그러거나 말거나 뺨도 만지고 목덜미도 더듬자 금세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다.
“다행히 열은 내렸어. 죽이 싫으면 다른 걸 말해 봐라. 마을에서 사다 줄 테니.”
“아닙니다….”
“만두는 어떠냐.”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만두는 먹고 싶은가 보다. 이락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해가 쨍하니 눈이 시리다. 그는 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피가 마르는 것 같더니 이제야 마음이 한결 놓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