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툭, 툭,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는가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락은 정자 난간에 기대앉아 장죽을 문 채 마지막 방율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이락 님, 제가….]
내게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는데, 뭐였을까…. 온천으로 오는 내내 그것이 궁금하였다.
제가 사실은 이락 님을 연모합니다?
이락은 허공에 연기를 뿜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리 질색하며 도망 다녔는데 연모라니….
그대로 바닥에 드러눕자 서까래에 꽂힌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온천에 올 때마다 방율이 읽던 것이었다. 일어나 책을 꺼내다 중간에 삐죽 튀어나온 걸 발견했다. 펼쳐 보니 납작하게 눌린 아카시아꽃이다.
언제 이걸 여기다 뒀을까.
아니, 왜 뒀을까.
혹, 왕자에게 가져다주려고 일부러 말린 것인가.
“흥….”
이락은 그것을 버릴까 하다 관두고 책에 꽂아 제자리에 돌려놨다. 그러고 나서는 눈을 감았다. 잊자. 욕정이었을 뿐이다. 거기다 악연이지 않은가. 방율에게는 전생이지만 내게는 과거다. 곁에 둔다면 볼 때마다 떠오를 텐데,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는 사이 바람이 불고 빗줄기가 점점 거세진다. 쉴 새 없이 비를 퍼붓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잡념이 많아졌다. 방율은 잘 도착했을까. 바람이 많이 부는데 파도가 심하진 않을까. 이 길치가 또 엉뚱한 곳에서 헤매는 건 아닐까.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무색할 정도로 머릿속은 온통 방율이다.
“빌어먹을.”
이락은 정자 아래로 내려왔다. 순식간에 옷이 젖는다. 그래, 이 모든 감정은 부질없는 것이다. 헛된 것이다. 차라리 비를 맞으며 걷자. 걷다 보면 이것들도 씻기어 사라지겠지.
***
강가에 도착하니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왕구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왕태 또한 서운한 내색까진 아니어도 착잡한 표정이었다. 때마침 쿠루룽 쾅 하면서 어둡던 하늘에서 번개가 치더니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비가 오려나 봅니다….”
“어서 가라. 바람도 불고, 날씨가 심상치가 않다.”
율은 미소를 띤 채 양손을 배꼽에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형님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를 챙겨 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건강히 지내시고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하게 사십시오.”
왕구가 코를 훌쩍이며 율을 꽉 안아 준다. 컥. 숨이 막혔으나 마음을 알기에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잘 가라, 방울아. 너도 좋은 색시 만나 아들딸 골고루 낳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 뭍으로 올라오거든 우리를 꼭 찾아와.”
그러고 싶다. 살면서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은 더 그들을 만나러 오고 싶다. 왕구가 기어이 눈물을 훔쳤고, 율도 눈물이 그렁하여 강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 몸이 반쯤 잠기었을 때 뒤를 돌아 이락이 머무는 방향을 애틋하게 바라봤다.
“이락 님도… 잘 지내세요….”
율은 슬프게 웃었고 잠수하여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팔을 저어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함이 감지된다. 어째선지 숨이 차고,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몸이 무겁다.
어어… 왜 이러지?
더는 물속에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수면으로 푸후,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하아, 하아,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물속으로 잠수했으나 이번에도 숨이 턱 막힌다. 율은 당황하여 도로 올라와 육지와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했다.
왕구 또한 무언가 이상하다 느꼈는지 가다가 돌아서서는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 여러 번 시도하여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육지에서 누군가 제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더는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온 이락은 젖은 옷을 갈아입고서 사랑방으로 건너갔다. 손님이 사라진 방은 평소보다 더 썰렁했고 책상에는 곱게 접힌 종이가 한 장 남겨져 있었다.
[신세만 지다 갑니다. 덕분에 많은 걸 배우고 얻었습니다. 돌아가서도 이락 님의 안녕을 기원할 것입니다. 기억은 없지만, 만약 전생에 제가 이락 님께 지은 죄가 있다면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여생은 편히 보내십시오.]
끝에 쥐방울이라고 적힌 글자가 눈에 띈다. 이락은 끝내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속에서 요동침을 느끼고 이를 꽉 물었다. 천천히 방을 둘러보는데 방율이 머물던 흔적들이 전부 사라졌음에도 아직 체취가 남은 듯하다.
이락은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잘 가고 있나 직접 봐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이건 미련이 아니다. 그저 궁금한 것을 해결하기 위함일 뿐이지.
이락은 작은방으로 건너가 경대를 꺼냈다. 그런데 막상 보려니 내키질 않는다. 그는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겼다. 이걸 본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래, 관두자…. 단념하고 일어서는데 마음이 바뀐다. 계속 신경 쓰이는 것보다야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낫지 않을까?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대가 말을 걸어온다.
[그냥 봐라. 답답해 죽겠네.]
하, 이락은 인상을 썼다. 감히 마물 주제에, 어딜 함부로 나서.
“불에 태우기 전에, 입 닥치고 있어.”
그러자 경대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고민하고 있으니 말해 주마. 방율은 용궁에 도착하여 기진 왕자를 만나고 있다. 만나서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술 한 잔 주고받는 중이지. 미래도 알려 줄까? 오늘 밤 방율이 기진과 첫날밤을 보낼 거다. 왜 그런 줄 알아? 기진도 사실은 방율을 마음에 들어 했거든. 말만 해라. 같이 교접하는 장면도 보여 줄 테니. 너하고 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행복할걸? 너는 무식하게 집어넣기만 할 줄 아는 상스러운 놈이잖아. 그러니까,]
이락은 결국 참지 못하고 경대를 집어 벽에 던져 버렸다. 와장창. 박살이 나는 소리와 함께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고 시커먼 형체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끼야하- 드디어 네놈한테서 해방이구나! 잘 있어라!
그것은 허공을 돌다가 밖으로 사라졌고 이락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깨진 거울을 노려봤다. 빌어먹을. 저것이 일부러 나를 도발하였구나. 어리석게도 얕은수에 넘어가다니. 아니, 어쩌면 저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기진 역시 방율을 다른 이보다 많이 아끼지 않았던가.
눈빛에 살기를 띠던 그때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계셔요? 오라버니.]
이락은 심호흡하여 진정을 찾은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소월이 하인과 무사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비는 잦아들었으나 그녀의 치맛단은 한눈에 보기에도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소월은 마당에 고인 물웅덩이를 피하며 사뿐사뿐 다가왔다.
“세상에 무슨 비가 이리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인 일이냐.”
“우리가 꼭 일이 있어야 보는 사입니까.”
“돌아가. 오늘은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다.”
소월이 싱긋 웃었다.
“서운합니다. 이리 비를 맞고 왔는데, 잠깐 쉬게는 해 주셔야죠. 저들도 많이 지쳤습니다.”
이락의 눈에 무사와 비에 홀딱 젖은 하인이 들어온다. 더 말해 봤자, 소월이 조를 것 같아 이락은 피곤한 듯 손짓을 하였다.
“오늘 너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다. 나는 잘 테니 알아서들 쉬다 가.”
“원래 저는 안중에도 없으셨으면서 그러세요.”
소월은 급히 이락의 옷자락을 잡더니 품에서 병조 판서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꺼내어 은밀히 전했다. 그러더니 비단 꽃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온다.
“사랑방에서 옷을 말려도 되겠지요?”
이락은 사랑방을 쳐다봤다. 어차피 이젠 쥐방울도 없지 않은가…. 그러라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가 젖은 버선을 벗는다. 이락은 서신을 들고 방으로 갔다. 문을 닫고 종이를 펴자 병조 판서의 글이 적혀 있다. 왕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측근을 통하여 상세히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이야기다.
방율이 곁에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우리가 앞서 책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채근했겠지.
이락은 지친 얼굴로 벽에 기대어 눈을 꾹 감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밖에서 왕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누군데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온 게요?]
[소월 아씨와 함께 왔습니다. 지금은 안에 계십니다.]
[아아, 소월이가 왔구나. 방울아. 우선 너는 방에 눕자. 더는 안 되겠다.]
순간 이락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잘못 들었나.
혹여나 하는 마음에 밖으로 나오는데 왕구가 이락을 보자마자 호들갑을 떤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이락의 눈 밑이 일그러졌다. 그 뒤에 바다로 돌아갔어야 할 방율이 서 있다. 셋 다 물에 홀딱 젖었는데 유독 방율은 얼굴이 하얘져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영문을 따질 새도 없이 발이 먼저 마루 아래로 내려갔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신을 막 신으려던 그때 사랑방 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월이 속곳 차림으로 얼굴을 삐죽 내민다. 피부가 훤히 비치는 속곳만 입은 그녀는 가체를 벗고 땋은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고선 입엔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어머, 전에 뵙던 선비님이네요?”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율은 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고, 이락은 평소답지 않게 당황하여 방율과 소월을 번갈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