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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82화 (82/102)

82화

“나잇값? 저한테 나잇값이라고 하신 겁니까, 선비님?”

무령이 충격받은 얼굴로 묻자 율은 그대로 털썩 보료 위에 쓰러져 잠들어 버린다. 무령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이락을 쳐다봤다.

“들었냐, 이놈아. 너 때문이다. 순수한 선비를 질 나쁜 네놈이 물들여 놨구나. 설마 이런 식으로 심신을 망쳐 원수를 갚을 계획은 아니겠지?”

“너 개냐?”

“뭐?”

“자꾸 개소리하길래 물어봤다.”

무령은 발끈하였고, 이락은 잠들어 있는 방율을 깨우려 어깨를 흔들었다. 그런데 얼마나 취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만 싸워요…. 여우하고 토끼는… 사이좋게 지내야지…. 연세도 드실 만큼 드신 분들이…. 웅얼웅얼 잠꼬대를 보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진다.

무령 역시 싸운 것도 잊고 곁으로 와 구경하였다.

“아까워라. 네놈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가 꿀꺽 먹어 버렸을 텐데.”

슥, 아랫입술을 핥는 그의 얼굴에서 진심으로 욕정이 느껴져 이락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쩍였다. 더는 꼴 보기 싫어 방율을 안고 나가려는데 무령이 앞을 가로막는다.

“데려가서 어쩔 셈이야?”

“상관하지 마라. 알아서 뭐 하게.”

“바다로 돌려보내겠지?”

이락은 차갑게 따졌다.

“애초에 넌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지? 나를 속이니 재미있더냐?”

“실은, 네가 더 늦게 알기를 바랐다. 그래야 많이 아팠을 텐데. 아쉽구나.”

“…….”

“하지만 안심하지 마라. 이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으니.”

“무슨 뜻이야.”

“모든 이야기엔 반전이 있잖아. 혹시 알아? 다음엔 선비님이 너를 죽이러 올지.”

얄밉게 구는 무령을 노려보다 이락은 상 위에 있는 김치전을 발견하고 이를 까득 물었다. 그러자 무령이 턱을 치키며 으스댔다.

“아, 이것은 선비님이 내게 특별히 준,”

와장창. 이락이 그대로 발길질하여 상을 엎고는 방율을 데리고 나가 버린다. 드르륵, 쾅, 문짝을 어찌나 세게 닫는지 귀청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다. 하, 무령은 바닥에 떨어진 김치전과 그가 사라진 자리를 번갈아 노려봤다.

“저 미친놈, 저거.”

아무 생각 없이 손으로 머리를 훑었는데 평소와 달리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진다. 으으, 열 받아. 무령은 가까스로 분노를 다스린 뒤 자리에 앉아 입에서 구슬을 꺼냈다. 그것을 뚫어지게 보며 그는 속 시원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망할 놈. 육욕이네 몸정이네 떠들더니, 꼴좋다.”

***

아아…. 앓는 소리를 내던 율은 몸을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통과한 햇살이 방 안쪽까지 들어온다. 날이 밝은 것인가….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고, 속은 좋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어제 있었던 일을 하나씩 되짚었다. 구미호에게 책을 만들어 달라 부탁했고, 술을 한잔하자고 해서 따라갔었지. 그러다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이락이 나타난 것까진 기억하는데….

[정말 좆같아서 더는 못 봐 주겠습니다! 둘 다 나잇값 좀 하십시오!]

마지막 기억에서 율은 얼굴이 희게 질려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내가 정신이 나갔었구나. 따지고 보면 조상님 같은 분들 아닌가. 거기다 좆같다는 둥, 나잇값을 하라는 둥 막말을 하다니….

놀란 것도 잠시 율은 방을 둘러봤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 이락이 데리고 왔나. 문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으나, 나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락에겐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한숨을 내쉬던 율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문갑 옆에 늘 세워 두었던 등껍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도 들춰 보고 구석도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율은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소리를 듣고 왕구와 왕태가 돌아본다. 그러나 저만치 떨어져 있던 이락은 슥 한번 쳐다볼 뿐 더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율은 그의 행동에 또다시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왕구가 다가오며 인자하게 웃었다.

“방울아. 일어났냐? 속은 괜찮고?”

“형님… 제 등껍질 못 보셨습니까? 방에 있었는데 사라졌습니다….”

그 말에 왕구가 왕태를 본다. 왕태도 전혀 모르는 표정이다. 이락이 돌아서며 그제야 눈길을 준다. 육지에 와 있는 동안 그의 많은 면을 봤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어떤 감정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율은 눈치를 보며 얼버무렸다.

“분명 방에 두었는데….”

“없어졌어?”

“예….”

왕구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상하다. 그게 어디 갔지. 그러다 그는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왕태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왕태도 짐작 가는 게 있었는지 작게 욕을 내뱉는다. 왕태가 즉시 이락에게 보고하였다.

“어제 모여서 술을 먹었는데, 그때 집어 갔나 봅니다.”

“누가.”

“백선이가 잔뜩 취해서 방울이 방에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가서 찾아와.”

왕구와 왕태가 부리나케 집을 나섰고, 율은 이락의 기분을 살피며 마당으로 내려왔다. 자세히 보니 자신의 짐이 마루에 놓여 있었고, 육지에서 쓰던 물건들도 보자기에 담겨 있다. 율은 그것을 확인하고서는 조심스럽게 이락에게 다가갔다.

“이락 님….”

율은 긴장되어 손끝을 마주 잡았다.

“어제는 제가,”

“사과할 것 없으니 짐이나 챙겨라. 어두워지면 가는 길도 힘들다.”

“가다니요…? 어딜…?”

이락이 그제야 율과 시선을 맞춘다. 율은 전생에서 본 섬뜩한 장면과 구미호에게 들은 이야기가 동시에 떠올라 흠칫, 한 발 물러섰다. 그러고 나서는 멋쩍어 엉뚱한 소리를 해 댔다.

“등껍질이 사라져 놀랐습니다…. 전처럼 왕구 형님이 솥으로 쓰신 줄 알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 뭡니까.”

“쥐방울.”

“예?”

“달포를 채울 필요가 없어졌다.”

정말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율은 어떻게든 해명을 하려 노력했다.

“혹, 그것 때문입니까? 무령 님한테 들은 바로는… 전생에 이락 님하고 저하고…. 아니, 이락 님이 저를…. 그러니까… 오래전에 저를… 죽였다고….”

“죽이지 않았다.”

“…….”

“죽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였지.”

이락의 눈동자엔 여러 감정이 섞여 드러났다. 다른 건 몰라도 죽이고 싶었다는 말만큼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먹먹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율은 전생에 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이락은 다른 듯했다. 더 묻는 것은 그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땅만 쳐다봤다.

“나를 원망하고 싶으면 해.”

원망하라는 말에 율은 슬프게 웃었다.

“기억도 없는데… 어찌 원망하겠습니까….”

“그래.”

“이락 님도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

“모두 기억하고 계시니… 저를 볼 때마다 힘드실 겁니다….”

이락은 대답하지 않았고 율은 눈시울이 붉어져 얼른 돌아섰다.

그러고 나서 왕구가 싸다 만 짐을 챙기며 억지로 웃었다.

“가족들이 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돌아가게 되어 기쁩니다…. 참, 무령 님께 책 만드는 것을 부탁드렸는데 확인하지 못하여 아쉽습니다….”

일부러 너스레를 떠니 이락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받아 준다.

“나흘 뒤 용궁에서 물건을 가지고 오면 한 권 챙겨서 보내도록 하마.”

“마지막까지 신경을 써 주셔 감사합니다…. 아, 이 옷과 장신구들은 두고 가도 됩니까? 제겐 너무 과분합니다. 무겁기도 하고요….”

“그것도 물건이 오는 날 함께 보내도록 하지. 네게 전해 달라 하겠다.”

더는 마다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율은 봇짐 안에서 천에 둘둘 싸인 것을 발견하였다. 여러 번의 경험으로 그게 산삼이란 것을 알았고, 놀라서 돌아보자 어느덧 이락이 성큼 다가와 있다. 그는 산삼을 봇짐 안에 넣고 남은 짐을 챙긴 뒤 꼼꼼하게 매듭을 지었다.

“상단에서도 어렵게 구한 것이니, 네 어미에게 먹여라.”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 그리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라 생각하지 말고 내가 너에게 진 빚을 갚았다 치자.”

빚을 갚았을 뿐이라고 말하니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율은 눈물을 참으려 후, 하고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얼마나 돌아가고 싶었던 고향인가. 손꼽아 달포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막상 반도 채우지 못하고 떠난다고 하니 절벽 아래로 강제로 떠밀리는 기분이다.

때마침 저 멀리서 왕구와 왕태가 뛰어오고 있었다. 머리에 등껍질을 이고 오는데도 율은 전혀 기쁘지 않아 몹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진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저들이 등껍질을 찾지 못하길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대로 가면 다신 볼 수 없을 텐데… 그래도 괜찮을까? 정녕 지금까지 마지못해 그에게 끌려다녔던 것인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신의 감정을 깨닫게 되자 율은 급히 이락을 불렀다.

“이… 이락 님, 제가….”

이락은 갓을 들어 율에게 건네었다.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으니 기어코 손에 쥐여 준다.

“나는 일이 있어 너를 배웅하지 못한다. 왕구와 왕태에게 데려다주라 일렀으니 그리 알아.”

“…….”

어째선지 이락의 눈동자가 붉은빛에 가까워졌다.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잘 가라, 방율.”

다정한 목소리에 갓을 쥔 율의 손끝이 떨렸다. 처음으로 불러 준 이름이다. 겨우 이름을 불러 줬는데, 이리 헤어지다니….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답답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그 사이 왕구와 왕태가 가까워졌고, 이락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사립문 밖으로 나섰다.

“이, 이락 님….”

쫓아가려 걸음을 내딛는데 왕구가 먼저 달려와서는 등껍질을 흔들며 웃는다.

“이것 봐라, 방울아. 내가 찾아왔다. 백선이 그놈이 술에 취해 집어 갔다지 뭐냐. 등이 굽어서 평소에 고생하였는데 여기 누웠더니 허리가 쫙 펴지는 게 그리 시원할 수가 없다 하더라. 나쁜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니 네가 이해해라, 응?”

멀어지는 이락의 뒷모습을 보며 율은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급히 손으로 닦자 앞에서 왕구가 안절부절못한다.

“속상해서 그러냐? 봐라, 이번엔 흔적도 없이 깨끗하다.”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면, 왜? 형님이 뭐 서운한 말이라도 해?”

“제가… 흑, 아무래도… 으….”

“울지 말고 말해 봐라.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데.”

“흐윽….”

“방울아….”

제가 이락 님을 연모하나 봅니다….

그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율은 끝내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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