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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81화 (81/102)
  • 81화

    “누가 다녀가?”

    “그 곱상하게 생긴 선비님 말입니다.”

    “언제?”

    “두 시진 정도 됐습니다.”

    이락은 인상을 쓴 채 얼굴을 문질렀다. 집에서 나와 기방에 머문 지 닷새째다. 방율을 피할 생각만 하였지, 이곳까지 찾아올 거라는 예상은 못 했다.

    “그 아이가 뭐라고 하더냐.”

    “하던 일을 다 마쳤으니 시간이 날 때 와서 봐 달라고 하시던걸요. 근데 뭘 마쳤다는 얘깁니까?”

    “그리곤?”

    “갔습니다.”

    “어디로 갔는진 모르고?”

    “음… 집에 돌아가지 않았겠습니까.”

    이락이 심란한 표정으로 있으니 여인이 이락의 팔에 매달린다. 어찌 그러십니까아. 무슨 일이 있길래 이곳에서 머물며 술만 드시는지요? 저한테도 말씀을 해 주시어요. 궁금합니다아. 가랑이 사이로 손이 슥 들어오자 이락이 그것을 잡아서는 거둔다.

    그만 나가라고 말하니 여인이 입을 삐죽 내밀고 자리에서 일어나 홱 사라진다. 이락은 옆에 있던 냉수를 한 사발 들이켜고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억울해? 복수하고 싶으냐? 그럼 다시 태어나 나를 찾아와라. 언제든 기다릴 테니.]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 아닌가. 여희는 어째서 방율의 전생을 보질 못하였을까. 여우의 구슬 때문이었나. 무령이 미리 알고 진실을 감추려 구슬을 넣어 둔 걸까.

    [어리석긴. 아직도 모르겠니? 그 위험한 존재가 너다.]

    이락은 두 눈을 감았다. 이승으로 추방되고 한참 동안 숙부의 아들을 찾아다녔다. 찾아내서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다짐뿐이었다. 그리하면 원한이 풀릴 줄 알았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것이 헛된 짓임을 깨달았다.

    스스로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살기 위해 가까스로 잊었고, 이제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방율을 통해 그날의 기억을 되짚는 순간 완전히 잊은 게 아님을 알게 됐다. 아직도 제 가슴에 맺힌 원한이 꿈틀거리고 있으니 더는 방율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왜 지금 나타났을까. 어째서….

    이락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게 내리려던 벌이 이겁니까?

    이락은 답을 하지 않는 하늘을 원망스럽게 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두 시진이라면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래, 이렇게 피하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일단 방율을 만나 매듭을 짓자. 달포도 필요 없다. 당장 바다로 돌려보내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서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게 영월관에서 나와 주막을 지나치는데 주인이 아는 척을 하며 방율이 술을 마시고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이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은 저물어 사방이 어두운데 이것이 혼자 제대로 가긴 했을까. 걱정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는데, 막상 집에 도착하고 나니 방율이 보이질 않는다.

    대신 방에는 그에게 선물한 비단옷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책상을 보니 글을 쓰던 흔적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주위를 살피던 와중에 문득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설마… 이 바보가 또….

    이락은 작은 방으로 건너가 경대를 꺼내었다.

    뚜껑을 여니 잔뜩 화가 나 있는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방율이 어디로 갔느냐.”

    거울은 반응이 없었고, 이락은 서슴없이 부엌으로 향하였다. 땔감으로 쓸 작정이었는데 거울이 잠시만! 하더니 그제야 말을 듣는다. 거울 속에서 방율이 잔뜩 풀어져 헤헤, 눈웃음을 친다. 이어서 무령이 나오자 이락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하, 기가 차서 노려보는데 마침 왕구와 왕태가 돌아왔다. 그들은 부엌에 있는 이락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기색을 하고 쪼르르 달려왔다.

    “큰형님. 이게 며칠만입니까. 기방에서 아예 사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떤 기생이 형님 마음을 훔친 것입니까. 저희한테만 슬쩍 말해 보십시오.”

    왕구가 와서 질척거렸으나 이락은 그를 쫓지 않고 방율이 묵고 방을 응시했다.

    “왕구야.”

    “예?”

    “쥐방울은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난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왕구가 놀란다. 내일이요? 달포간은 여기에 머문다 하지 않았습니까. 방울이한테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걱정스럽게 묻는 그를 지나치며 이락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두 번 다신 돌아오지 않을 테니, 짐을 모두 챙겨 놔.”

    ***

    “그래서요?”

    무령이 궁금해하며 물었고, 율은 술에 취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전생에 관한 것을 이야기했다. 처음엔 토끼였다가 그다음엔 도토리였다고 말해 주니 배를 잡고 웃었다.

    “재미있네요. 토끼와 도토리라니. 선비님과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지막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왜요?”

    “이락 님이 강제로 깨웠거든요….”

    이락 이야기를 하며 율은 표정이 심각해졌다. 눈물이 핑 돌길래 얼른 술을 마시어 마음을 삭였다.

    “이락이 왜 그랬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무령이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웃는다.

    “저는 알 것 같은데….”

    알 것 같다는 말에 율은 귀가 솔깃했다. 하긴, 무령은 앉아서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이 있었지. 궁금하여 그에게 몸을 더 기울였다.

    “무엇인데요?”

    “찔리는 게 있으니 그런 게 아닐까요?”

    다소 엉뚱한 대답에 율은 고개를 갸웃했다.

    “찔리다뇨?”

    무령은 말을 하지 않고 손끝으로 상을 톡, 톡,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율은 무령의 손이 참으로 하얗고 곱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락의 손도 험하게 사는 것치곤 길고 곧았다. 자꾸만 이락을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하여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데 무령이 마침내 입을 연다.

    “가령, 전생에 이락이 그놈이 선비님 집안을 몰살했다거나,”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율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그럴 리가요….”

    무령은 침묵했고, 율은 전생에서 들은 그 섬뜩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다시 태어나 나를 찾아와라. 언제든 기다릴 테니.]

    아….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이락과 꽤 흡사하지 않은가. 어찌하여 지금 깨달은 것일까. 도무지 믿기지 않아 무령을 쳐다보니 그는 턱을 괴고 아주 흥미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어쩌실 겁니까? 이락에게 복수라도 하실 겁니까?”

    “복수요…?”

    “하실 거면 제가 화끈하게 도와드리지요.”

    벌써 신이 난 얼굴이라 율은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이락인가. 내가 억지를 부려서가 아니라, 자신과 관련이 있어서 화를 냈던 걸까. 사실이라면 왜 나의 목을 베려 했을까. 어째서 다음 생까지 운운하며 나를 몰아붙였을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분노하게 한 것일까….

    “제가 본 게 정녕… 이락 님입니까…?”

    “예, 이락입니다.”

    율은 제 목을 양손으로 슬그머니 쥐었다.

    “어쩐지…. 이락 님을 볼 때마다 목이 좀 서늘하다 느꼈습니다.”

    그러자 무령이 한술 더 뜬다.

    “그것 보십시오. 전생의 연이란 게 그리 무섭습니다.”

    “하지만… 전생은 그저 전생이지 않습니까….”

    무령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 생각하십니까?”

    “예…. 무령 님의 논리라면 제가 도토리였을 때 저를 먹은 다람쥐도 찾아내서 복수하고, 토끼였을 때 잡아간 사냥꾼도 찾아내서 복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복수만 하면 세상은 남아나질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저는 방율입니다…. 도토리나, 토끼가 아니라요. 현생을 열심히 살아야지, 기억하지도 못하는 옛일에 집착하여 무엇하겠습니까….”

    “쯧쯧.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쉽지 않다뇨…?”

    무령은 술잔을 입에 댄 채 슬쩍 웃는다. 이걸 말을 해 줄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다. 율은 궁금하여 자리를 옆으로 더 옮겼다.

    “혹시… 제가 모르는 것이 더 있습니까?”

    무령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이리 가까이 오라며 손짓을 한다. 율은 아무 의심 없이 몸을 기울였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궁금하여 죽겠는데, 무령이 순식간에 옷깃을 잡아채고는 입술을 집어삼킨다. 놀라서 밀쳐내려 하자 배 속에서 무언가 꿈틀하더니 쑤욱 위로 올라온다.

    “읍!”

    놀라서 몸부림을 치는데 난데없이 무령이 악!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간다. 율은 입이 쩍 벌어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락이 무령의 머리채를 잡고 그대로 내동댕이친다.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이 무령이 뜯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더듬으며 이락을 노려봤다.

    “이 미친놈이! 감히 내 머리채를 잡아?”

    이락은 손아귀에 남아 있는 무령의 머리카락을 후, 불고는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한마디만 더 떠들어라. 네놈 머리를 전부 뽑아서 평생 가체를 쓰게 만들어 줄 테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에서 시퍼런 불꽃을 만들어 낸다.

    “네가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내가 그동안 오냐오냐하니 만만했던 모양이지? 그래, 오늘 여기서 누가 죽나 한번 결판을 내 보자.”

    여차하면 둘 중 하나는 죽어 나갈 기세라 율은 비틀거리고 일어나 둘 사이에 껴들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진정하십시오! 양쪽을 말리는데 동시에 두 사람이 율의 팔을 하나씩 붙든다.

    “쥐방울. 넌 이리 와.”

    “선비님. 이리 오십시오.”

    율은 난감하여 둘을 번갈아 봤다. 여태 먹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다. 놀라고 당황하여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으니 양쪽에서 이젠 잡아당긴다.

    “너 내 말을 무시한 것이냐. 분명 무령과는 엮이지 말라 했지.”

    “선비님. 진실을 아셨으니, 이락이 놈 말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에 이락의 안색이 확 굳어진다.

    “방금 뭐라 하였어?”

    “내가 선비님께 말했다. 그래야 후환을 피하지. 네 놈이 알게 된 마당에 선비님을 가만두겠어? 그때처럼 죽이지 않으리란 법이 없잖아?”

    이락의 눈빛에 분노가 들어찼고, 무령은 경박스럽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 봐라. 여전히 선비님을 죽이고 싶지?”

    “그 입 닥쳐!”

    “너나 입조심해. 아직은 전부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요, 선비님?”

    “닥치라고 했다, 이 여우 새끼야.”

    둘이 또 싸움을 시작했고 중간에 낀 율은 안절부절못하였다. 애원하고 사정하여도 전혀 나아지질 않고 결국 벽에 걸려 있던 칼까지 빼 든다. 어떻게든 중재에 나섰으나 힘에 부쳤고 나중엔 떠밀려서 보료 위로 발라당 나뒹굴었다.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지고 눈물이 쏟아진다.

    율은 술병을 집어 벌컥벌컥 마신 다음 고함을 빽! 질렀다.

    “그만! 제발! 쫌! 그만!”

    평소와 달리 바락바락 악을 써 대니 무령도 이락도 칼을 든 채 흠칫하여 율을 쳐다본다.

    씩씩거리던 율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기어코 한마디를 더 뱉었다.

    “정말 좆같아서 더는 못 봐 주겠습니다! 둘 다 나잇값 좀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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