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한쪽에 잔뜩 쌓인 새 옷들을 보며 율은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락이 포목점에서 고른 비단으로 지은 옷들이 도착하였는데, 양이 얼마나 많은지 방 한쪽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정작 옷을 사 준 이는 자취를 감춘 지 닷새가 넘어가고 있었다. 왕구나 왕태를 붙들고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기방에 머무신다는 거 보니 간만에 마음에 차는 기생이라도 생기셨나 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영문 모를 서운함이 몰려왔다. 이화 상단에 다녀온 후 직후부터 이락은 이상해졌다. 시선을 피하고, 장난도 치지 않았으며, 질문에는 단답으로 대답했다. 이유가 뭘까.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전생 체험을 한다고 우겨서 화가 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고집부리지 말걸…. 그게 뭐라고…. 보고 나니 별것도 없던데….
용감한 무사나 박식한 선비가 아니라 실망만 하였을 뿐이다.
다만 의문인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당시 말을 건네오던 남자의 얼굴은 흐릿하나 존재감은 지금도 소름이 끼칠 만큼 압도적이었다. 거기다 목소리는 왜 귀에 익었을까. 율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일단 하던 일을 마저 하기로 결론을 냈다.
심 낭자에 관한 이야기는 예상보다 빨리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락이 사라져 마음이 쓰였으나 반대로 글 쓸 시간은 넘쳐났다. 그런데 완성된 글을 누구에게 보여 주지? 책을 만들려면 도움이 필요한데…. 역시 떠오르는 건 이락뿐이었다.
율은 다리를 모으고 앉아 오랫동안 고민하다 글을 적은 종이를 둘둘 말아 화구통에 넣고 집을 나섰다. 마을에 혼자 가는 건 처음이라 긴장하였는데, 다행히 길을 헤매지 않고 어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율은 기억을 더듬어 시장통을 지나 영월관을 찾아갔다. 낮이라 그런지, 아니면 오늘은 귀한 손님이 없는 건지 전과 달리 출입이 자유롭다. 안으로 들어가니 여인들이 시선을 보내며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율은 갓을 고쳐 쓰고는 그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기생 하나가 눈웃음을 치며 가까이 왔다.
“이리 곱게 생긴 선비님께서 대낮부터 어인 일이십니까.”
율은 멋쩍게 웃었다.
“이락 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이곳에 계시다 들어서요….”
아아, 그녀가 실망한 듯하더니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저기, 끝 방에 머무십니다. 며칠째 두문불출하고 계시다던데?
“어째서요…?”
“이유는 모르지요. 행수 어르신께서 근처에 얼씬하지 말라 하시니 그런가 보다 하고 있습니다.”
율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서둘러 그가 있다는 거처에 도착하니 툇돌에 이락의 신이 놓여 있다. 하지만 이락의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고운 꽃신 한 쌍이 단짝처럼 나란히 있는 걸 보고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왕구와 왕태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서운한 감정이었는데, 이제 그것을 넘어 서러움이 복받친다. 할 말을 잃고 서 있으니 문이 열리면서 어여쁜 여인이 나온다. 그녀는 일전에 시장에서 이락에게 아는 체를 해 왔던 여인이다. 말투가 귀여웠던….
“어머, 선비니임. 여긴 어쩐 일입니까. 오라버니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아.”
율은 화구통의 줄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열린 문틈으로 이락을 부르려 했으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곧바로 문이 닫혔고 여인은 신을 신고 아래로 내려왔다.
“오라버니께선 취해서 잠드셨습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더니 아침부터 술을 드시고 있지 뭡니까. 대체 왜 저러시는지 선비님은 이유를 아시는지요?”
율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글쎄요….”
“혹시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게 남기세요. 깨어나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였는데, 이 여인은 상관이 없는 걸까…. 나는 아무나 중의 하나인 걸까…. 율은 괜히 눈이 시큰거려 꽉 막히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하던 일을 마쳤으니, 한번 들러서 확인해 주셨으면 한다고, 그리 전해 주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눈앞이 흐려진다. 괜히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까 걱정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영월관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가 없었다. 서운해할 자격이 있나. 이락이 짓궂은 장난을 칠 때마다 질색한 것도 저고,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것도 저 아니었나.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자. 용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예 기생집에서 눌러살라지. 그럼 나야 편하고 좋지. 스스로 위안하며 걷는데 누군가 선비님, 하고 아는 체를 한다. 돌아보니 주막 주인이다. 주막 주인이 손을 흔들기에 율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뜸하시더니 나타나셨네. 그때 얼굴이 엉망이라 걱정했습니다. 다 나으신 거죠?”
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때마침 주막도 한가하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인에게 국밥을 한 그릇 내어 달라 주문하였다. 주인이 잠시만 기다리라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술과 안주부터 내온다.
“이것은 시킨 적이 없는데….”
“공짜로 드리는 겁니다. 어떤 손님이 시켜 놓고는, 바쁜 일이 있다고 그냥 가 버렸지 뭡니까.”
망설이던 율은 잔에 술을 따랐다. 속이 답답하니 안주는 들어가질 않고 술은 끊임없이 들어간다. 한 병을 모두 비우고 나니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랐다. 더 있다가는 집에 가지도 못하고 주막에서 쓰러져 잘 것 같아 비틀거리면서 짐을 챙겨 일어났다. 품에서 엽전을 꺼내 계산하려는데 주인이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종이에 무언가를 싸서 나온다.
“전입니다. 손도 대질 않았으니 가져가서 드십시오. 제가 또, 전 하나는 기가 막히게 부치지 않습니까.”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들를게요…. 인사를 하고 나서 주막 밖으로 나오니 인파가 많아졌다. 혹여 걸음걸이가 흐트러질까, 신경이 쓰여 급히 시장을 빠져나와 금산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해가 저물어 주위가 어둑어둑해졌으나 취중이라 그런지 전혀 두렵질 않았다.
술은 이런 거구나…. 나 같은 겁쟁이도 용감하게 만드는구나….
[그러다 네 아비처럼 술에 잡아먹혀 천지 분간 못 하게 될 거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기어코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속 시원히 말이라도 해 주지. 답답하고 억울한 감정을 느끼다가 나중엔 화가 났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훌쩍이며 걷던 율은 자신이 집이 아닌 연못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이곳은 무령과 만나는 곳이 아닌가. 하필이면 이곳에 오다니…. 망연자실하며 눈물을 훔치다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락 없이 책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지 않을까….
한참을 갈등하던 율은 화구통의 줄을 꽉 움켜쥐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무령 님! 무령 님! 무, 으악!”
율은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세 번 부르지도 않았는데, 무령이 뒤에서 얼굴을 불쑥 들이민 것이다. 놀라서 심장을 부여잡고 헉헉거리는데 무령이 쭈그려 앉으며 싱글싱글 웃는다.
“선비님. 술을 많이 드셨나 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실은 아까부터 선비님을 따라오고 있었지요.”
“저를요…?”
“웬 바보 같은 선비 하나가 취해서 비틀거리길래… 간이나 빼 먹을 요량으로 쫓아왔더니, 하필 선비님이었네요.”
섬뜩한 농담에도 율은 겁을 먹는 게 아니라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걸 본 무령의 미간이 좁혀졌다. 왜 그러십니까? 라고 묻자마자 기어이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무령 님이 보시기에도, 흑, 제가 바보 같습니까?”
“농담입니다. 왜 울고 그래, 당황스럽게.”
“압니다, 저도. 흑, 제가 가끔 쓸데없는 거로 고집을 부려… 사람을 질리게 한다는 것을요….”
“이락이 선비님께 그리 말합니까?”
“흐윽, 싫다는 걸… 제가 억지로 졸라서… 그것 때문에 화가 나셨습니다….”
“쯧쯧, 저런. 걔가 그리 속이 좁다니까요.”
참았던 눈물을 쏟아 내는 율을 보며 무령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러다 등에 메고 있는 화구통을 발견하고 눈빛을 반짝였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입니까. 저한테 부탁할 거라도?”
율은 우느라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한데….”
“한데?”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아서….”
“어려운 부탁인가 봅니다?”
“예….”
“대가로 뭘 주실 건데요?”
율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허리춤에서 작은 주머니를 풀었다. 그것을 건네자 구미호가 보지도 않고 피식 웃는다. 진주네요? 다소 아쉽다는 말투였기에 율은 망설이다가 품에서 종이에 감싼 것을 꺼내었다.
“이거라도….”
무령이 종이 뭉치를 받아 펼치더니 푸하하, 웃음을 터트린다. 김치전이네요?
“이락이 놈과 살더니 꽤 뻔뻔해지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무령은 율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좋습니다. 이걸로 퉁칩시다. 대신, 오늘 밤은 나하고 한잔합시다. 그래도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