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무령이 자취를 감추자마자 이락이 풀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는 연못 앞에 털썩 앉더니 장죽을 꺼내 불을 붙였다. 그것이 담배가 아님을 알고 산신령은 이락을 못마땅하게 응시하였다.
“그리 피워 대다간 나중에 정신이 온전치 못할 거다. 하긴, 지금도 뭐 온전해 보이진 않는다만.”
“신경 꺼.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그런 거니.”
“아침부터 왜. 무슨 일이 있었어?”
“궁금해?”
“딱히 궁금하진 않다.”
“아니, 영감 말고,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쥐새끼 말이야. 이런, 실언했네. 여우 새낀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령이 모습을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천제께서 너를 토끼가 아니라 개로 만들어야 했나 보다. 냄새를 이리 잘 맡아서야. 그런데 이락아. 너 그새 약속을 잊은 거냐. 나를 보게 되면 납작 엎드려 인사를 하라 일렀거늘. 너는 여우하고의 약속은 안중에도 없구나.”
“어쩌죠, 형님. 아우의 기분이 좆같아서 인사를 할 마음이 전혀 생기질 않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네놈이 그러면 그렇지. 화나지만 마음 넓은 내가 용서하마. 네 처지가 하도 딱해야 말이지.”
구미호가 묘한 얼굴로 웃었고, 그것은 이락의 심기를 건드렸다. 분명 여우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그게 뭘까…. 처음에는 단지 골려 주려 방율에게 구슬을 넣은 게 아닐까 추측하였는데,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럼, 형님. 이참에 쥐방울 몸속에 구슬을 빼 주시겠습니까. 이 아우가 간곡하게 부탁을 드리지요.”
“몇 번이나 말하냐. 그걸 빼면 선비가 위험하다.”
“내가 있는데 왜.”
그 말에 여우가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긴. 아직도 모르겠니?”
“무엇을.”
“그 위험한 존재가 너다.”
능글거리던 이락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고 무령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주위를 맴돌았다. 스스스, 그의 옷이 바닥에 끌리며 내는 소리가 뱀이 기어가는 것과 흡사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해. 내가 쥐방울을 해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건….”
무령은 말을 멈추고 부채를 사락 접는다. 산신령 역시 궁금한 눈치다. 무령이 뒷짐을 지고 물러났고 이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를 붙들어 더 캐물으려 하는데 무령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알고 싶으면 제대로 형님 대접을 해라. 이 못돼 먹은 토끼 놈아. 하하하.]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웃음소리만 남았고, 이락은 고개를 홱 돌려 산신령을 노려봤다. 그는 시치미를 뚝 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니 묻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이락이 연기를 허공에 후, 하고 내뿜으며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온다.
“영감은 알고 있지? 구슬을 빼는 방법.”
“모른다.”
“알면서.”
“몰라.”
“당장 마을에 내려가 이 연못에 똥을 던지면 그게 금덩이가 된다고 소문을 쫙 퍼트려 볼까?”
“이 망할 놈이!”
“여생을 똥물에서 한번 살아 볼래?”
가뜩이나 주름진 산신령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고 이락은 진지하게 부탁하였다.
“그러니 알려 줘. 여우의 구슬을 빼낼 방법을 말이야.”
“아까 듣지 못하였냐. 그걸 없애면 자라가 위험하다 하지 않았어.”
“괜한 걱정이야. 내 곁에 있는 한 위험하게 두지 않아.”
산신령이 묘한 시선으로 이락을 본다.
“혹, 그 애한테 연정이라도 품은 것이야?”
이락이 뻔뻔하게 대꾸하였다.
“연정은 모르겠고 육욕을 채우는 데는 쓸 만하더군.”
“몹쓸 놈. 저보다 까마득하게 어린애를 잡아먹다니.”
“말이 길어지네. 안 되겠다. 마을에 내려가서 여기저기 소문을 퍼트리는 수밖에.”
이락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고 하자 산신령이 혀를 쯧, 찬다.
“여우가 넣은 구슬은 여우만 뺄 수 있다.”
이락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건… 무령이 아니라도 구미호라면 뺄 수 있단 뜻이지?”
산신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주워들은 거라 확실치 않아. 있다 하여도 장담하지 못한다. 무령처럼 신력이 높은 구미호가 흔하지 않다는 건 너도 알 것이 아니냐.”
곰곰이 생각하던 이락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생긴다.
“흔하진 않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그는 다 태운 담뱃재를 바닥에 털었고 그걸 본 산신령은 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이놈! 너 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냐. 그리 함부로 재를 털다가 혹여 산이라도 태우면 어쩌려고 그래.”
“야단법석은. 밟아서 끄려고 했어.”
재를 끄고 나서도 안심이 되질 않았는지 산신령은 연못 물을 끼얹었다. 그 사이 이락은 사라졌고 혼자 남은 산신령은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겼다. 이락 저놈이 정말 소문을 퍼트리진 않겠지. 한참 도끼 들고 오는 놈들 때문에 고생하였는데, 자칫하면 이젠 똥까지 뒤집어쓰게 생기지 않았나. 가만… 혹시, 그때 도끼 소문도 저놈 짓이 아닐까….
의심이 깊어져 가는 가운데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차츰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
집 근처 숲을 돌아다니던 율은 빨갛게 익기 시작한 열매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것이 무엇이지? 먹는 건가. 그러나 함부로 손댔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다. 일전에도 이락에게 독버섯을 먹여 저도 모르게 죽일 뻔하지 않았던가. 물론 죽지는 않았지만….
도감에선 분명 버섯을 먹으면 성 기능이 떨어진다고 하였는데, 이락에겐 효과가 아예 없는 걸까. 어차피 죽지 않으니 이참에 몰래 달여서 먹여 볼까….
그러다 율은 자신의 뺨을 살짝 쳤다. 정신 차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그런 것을 막 먹일 생각을 하다니…. 심란한 표정으로 걷는데 때마침 쉬이익-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던 율은 겁에 질려 후다닥 물러났다. 바로 코앞 나뭇가지에 머리가 세모난 뱀 한 마리가 매달려 저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위협적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 나는 그쪽을 해칠 생각은 없소…. 그저 길을 지나가려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오….”
최대한 뱀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 멀찍이 돌아서 가는데 뒤쪽이 소란스럽더니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던 찰나 풀숲에서 어떤 남자가 튀어나왔고, 미처 피하지 못하고 율과 부딪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남자는 품에 여인의 옷을 안고 있었는데 하늘하늘한 천으로 만든 것이 보통 여인의 옷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남자와 옷을 번갈아 보는 사이 멀리서 여인의 고함이 들려왔다.
[거기 서라! 잡히면 죽여 버릴 테다. 당장 옷을 가져오지 못해!]
아…! 이자가 여인의 옷을 훔친 것인가. 남자가 일어나 도망치려 했고, 율은 급히 남자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놀란 남자가 돌아보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뭔데 껴들어? 저리 썩 꺼지지 못해! 한 대 얻어터지고 싶냐?”
남자가 율의 상투를 잡고 강제로 떼어 내려 힘을 썼다. 머리카락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율은 남자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옷을 놓고 가십시오! 남의 옷을 도둑질하면 어쩌잔 겁니까!”
남자가 힘으로 율을 제압하여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것도 모자라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발로 한번 걷어찬다.
“남이사! 옷을 훔치든 말든! 그럼 네가 대신 내 색시를 구해 줄 테냐!”
율은 얻어맞은 배가 아픈 줄도 모르고 남자의 다리를 붙들었다.
“색시를 구하려면 여인의 마음을 얻어야지, 옷을 훔친다고 될 일입니까!”
“말이 쉽지. 누가 나 같은 무지렁이한테 시집을 오겠어! 도둑질이 아니면 내가 저리 예쁜 색시를 어찌 얻는단 말이야. 그러니 놔! 맞아 죽고 싶지 않으면 놓으란, 억!”
남자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더니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는다. 율은 고개를 들다가 눈앞에 나타난 이락을 보고 눈이 커졌다. 이락은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는 당장에라도 부러트릴 것처럼 살기를 번뜩이고 있었다.
“이… 이락 님!”
때마침 멀리서 들리던 고함이 가까워지더니 숲을 헤치고 여인들 여럿이 등장한다. 모두 하나같이 화려한 날개옷을 입었는데, 그중 하나만 천으로 가슴과 하반신을 가렸다. 그녀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표정이 무시무시했고, 한 손에는 커다란 돌까지 들고 있었다.
그런데 씩씩거리던 여인들의 표정이 이락을 발견하고는 싹 변하였다. 그들은 당황한 듯 서로 눈을 맞추며 소곤거렸다. 이락이다…. 금산에 산다더니 진짜였어. 어쩌지. 천제께서 마주치지 말라 말씀하셨는데…. 이락이 남자가 들고 있던 옷을 빼앗아 여인들을 향해 던졌다.
“가져가라.”
여인 하나가 옷을 주워 들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황급히 풀숲으로 사라졌고 이락은 남자의 목을 더 힘주어 잡았다. 컥, 컥. 남자의 흰자가 붉게 변하고 입에선 거품이 생겨나길래 율은 기겁하여 이락의 팔을 잡았다.
“죽, 죽습니다! 그만하십시오….”
“잘됐다. 기분도 안 좋은데 죽어 버리라지.”
“왜 이러십니까! 놓으십시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율은 울컥하여 이락의 등을 찰싹 때렸다. 놓으시라고요, 쫌! 이락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없이 봤고, 율도 당황하여 자신의 손을 보았다. 세상에. 내가 누굴 때린 거야. 드디어 미쳤구나….
그래도 이락이 다른 이를 해치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진심으로 죽이실 작정입니까? 용기를 내어 물으니 이락이 흥! 하고 손을 놓아 버린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남자는 비틀거리며 도망쳤고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율은 안도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이락 님 등을 때린 것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뒀다간 저자를 죽일 듯하여,”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이락은 율의 손목을 쥐더니 그대로 앞장섰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하고 급히 갈 곳이 있다.”
“어딜요…?”
이락이 걸음을 멈추고 율을 돌아봤다.
화가 난 줄 알았는데,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한 듯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구슬을 없앨 방법을 찾았어.”
율은 놀라서 되물었다.
“제 배 속에 있는 무령 님의 구슬이요?”
“그래.”
“그것을 없애면… 제가 귀신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내가 양기를 꽉꽉 채워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듣자마자 율은 질색하며 물었다.
“꼭… 빼야 합니까?”
“어.”
“왜요?”
그 물음에 이락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론을 냈다.
“내가 싫다. 너를 그놈과 공유하는 기분이라 찝찝하고 짜증 나. 그러니 기필코 뺄 것이다. 배를 갈라서라도 뺄 테니 그리 알아.”
율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었으나 이락은 너무나 단호하였다. 그러면서 뒤늦게 율의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정돈해 주고 한쪽 무릎을 꿇어 흙이 묻은 옷과 신발을 손으로 털어 준다. 조금 전까지 배를 가른다는 말이 무색하게 행동은 또 다정하여, 마음이 심란해진다.
그는 일어나 다시 손을 붙들었고, 율도 더는 거절하지 못하였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