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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76화 (76/102)

76화

밖이 시끄럽다. 두런두런 말소리에 율은 감고 있던 눈을 간신히 떴다. 온몸이 아파서 신음이 저절로 나온다. 엉덩이가 화끈거려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있다가 가슴이 따끔거려 저고리를 풀어 상반신을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마치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피부가 울긋불긋하였고, 가슴에는 잇자국도 여러 개 있었다. 조심히 그 부위를 만지는데 어젯밤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율은 심란한 표정으로 저고리를 여미고 옷을 마저 챙겨 입었다.

방 밖으로 나오니 왕구와 왕태가 마당에서 대화 중이다.

“형님들 일어나셨습니까…?”

인사를 하자마자 왕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방울아. 괜찮냐? 네가 도통 깨어나질 않아서, 어디 아픈가 걱정했다.”

“아닙니다. 피곤하여 늦잠을 잤습니다….”

“어제 내기를 해서 큰형님한테 맞았다더니 설마 심하게 때리신 거냐? 뭐로 때리셨길래 이리 맥이 없어?”

양물로 때렸다고 솔직하게 말을 할 수가 없어 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더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기 싫어 쓴웃음을 짓는데 마루에 못 보던 것들이 잔뜩 놓여 있다. 갓부터 노리개, 갓 줄, 부채 등등…. 낯이 익어서 빤히 쳐다보니 왕구가 어깨를 툭 친다.

“형님께서 너한테 사 주신 것들이라며.”

아, 만물상점에서 산 물건이 도착하였구나. 율은 미안한 마음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였다. 왕구와 왕태는 이락과 식구나 다름없는데 불쑥 나타난 객이 이런 대접을 받으니 서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할 만큼 왕구는 자신이 받은 것처럼 신이 났다.

“큰형님이 널 정말 아끼시나 보다. 여인들한테도 장신구는 사 주질 않으시는데.”

그때 잠자코 있던 왕태가 껴들었다.

“그러니까 이상하단 말이지. 왜 쥐방울한테만 이런 걸 사 주셨을까.”

호들갑 떠는 왕구와는 달리 왕태는 다소 묘한 표정으로 물건들과 율을 번갈아 쳐다봤다. 율은 마음이 뜨끔해졌다.

“혹시 형님이 너한테….”

왕태는 말을 멈췄고, 율은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단순한 왕구에 비하면 왕태는 눈치가 빠르고 영민하지 않은가. 왕태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약점을 잡히신 건가? 그래?”

“…….”

답이 없으니 왕태는 율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친한 척을 하였다.

“그런 게 있다면 우리도 알려 줘라. 형님 약점이 뭔지.”

다행이다…. 모르는구나. 율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이락 님이 약점 같은 걸 신경 쓸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듣고 있던 왕태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형님한테 약점이 있을 리 없지. 게다가 아무리 큰 약점이 있다고 해도 다 극복해 낼 만큼 대단한 분이긴 하다.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왕태는 이락이 얼마나 대단한 위인인지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벌써 몇 번이나 들었던 터라 율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군요. 대단합니다. 세상에…. 맙소사…. 그러는 와중에 왕구가 갓을 하나 들더니 머리에 써 본다. 쓴다기보다 머리통이 워낙 커서 살짝 얹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그걸 본 율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락을 찬양하던 왕태 또한 웃음이 빵 터져 핀잔을 주었다.

“이놈아. 네 대가리에 맞추려면 그것보다 두 배는 커야겠다.”

그러면서 왕태는 왕구가 들고 있던 갓을 빼앗아 율에게 다가왔다.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있으니 율의 머리에 갓을 살포시 씌워 주고는 끈을 매 준다. 그러고 나서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사 주셨는지 이제 알겠다. 이리 잘 어울리니 나라도 사 주고 싶었을 거야. 봐라. 얼굴이 희고 이목구비가 반듯해서 대충 걸쳤는데도 근사하다.”

지켜보던 왕구도 같이 끄덕였다.

“형님 말이 맞소. 저기 아랫동네에 이몽룡이라는 도령이 인물값을 한다고 소문이 났던데, 내가 볼 때는 그 도령보다 방울이가 훨씬 잘생기고 예쁘오.”

왕구 역시 맞장구를 치며 율을 치켜세웠다. 이어지는 칭찬에 율은 몸 둘 바를 몰라 민망해졌다. 어색하여 갓을 벗으려고 하는데 이번엔 왕구가 나서서 갓 줄을 골라 준다.

“방울아. 그러지 말고 이것도 해 봐라.”

“그거 말고, 이건 어때? 왕구보단 내 안목이 조금 더 높다.”

이것도 해 봐라, 저것도 해 봐라, 요구하던 둘은 갑자기 번쩍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마주 봤다.

“참, 형님! 아까 덕이네 집에 간다고 하지 않았소?”

“아, 내 정신 봐라. 깜빡하고 있었다.”

둘은 구경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볼일이 있으니 아침은 혼자 먹으라는 말에 율은 저도 모르게 이락의 방문을 응시하였다. 툇돌에 아무것도 없다.

“형님은 외출하셨어.”

“어딜… 가셨습니까.”

“모르겠다. 아침부터 표정이 영 그래서 말도 못 붙였다.”

율은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몇 번의 교미가 더 있었으나 이락은 처음과 달리 다소 난폭하게 율을 대했다. 무엇이 그를 화나게 한 걸까. 하기 싫다고 해서? 자꾸 빼라고 닦달해서?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왕구와 왕태가 집을 나섰고 혼자 남은 율은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서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지. 날짜를 계산하던 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달포 중에 반이 지나갔구나…. 남은 반은 어찌 버텨야 하는 걸까….

그러다 율은 작은 방에 있는 경대를 떠올리고 고민에 빠졌다. 이락이 없는 틈을 타 부모님 모습을 한번 볼까…. 사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없었으니… 그래도 되지 않을까? 갈등을 거듭하던 율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작은 방으로 건너갔다.

선반에서 경대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뚜껑을 열자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이락에게 시달린 탓인지 눈 밑이 퀭하고, 맥이 없어 보인다. 왕구가 왜 아프냐고 물었는지 이해가 됐다. 율은 자신의 뺨을 문지르다가 목을 확인하였다.

“다행히 보이는 곳엔 자국을 남기지 않았구나….”

율은 거울에게 부탁했다. 가족을 보여 주시오…. 거울이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율의 얼굴이 사라지고 가족들 모습이 하나둘씩 등장한다. 어머니는 여전히 누워 있었으나 혈색이 많이 좋아졌고, 아버지는 어인 일로 정신이 말짱하여 집 안에 무너진 담을 고치고 있었다. 그걸 본 율은 가슴이 먹먹해져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곧이어 선이가 나왔는데 어떤 도령과 함께 대화 중이다. 볼이 붉게 달아올라 환하게 웃는 선이를 보고 율은 눈을 가늘게 늘였다. 저 도령은 누구길래 선이와 대화를 나누는 걸까. 아는 인물인가, 하여 가까이 확인하였는데, 처음 보는 자다.

그래, 나이가 찼으니 도령도 만나고 할 수 있지. 오라버니처럼 스물이 되도록 혼자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그런데 믿을 만한 녀석인가. 걱정하던 그때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 거울은 왜 이락을 비췄을까. 이락의 말대로 거울이 장난을 친 걸까. 갈등하던 율은 밖으로 나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거울에게 돌아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이…이락…님이 좋아하는 이를 보여 주시오….”

거울은 반응하지 않았고 율은 한 번 더 부탁했다. 이락 님이 좋아하는 이를 보여 주시오…. 묵묵부답이다. 율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이락이 다른 이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상상이 가질 않는다. 경대를 덮어 제자리에 올려 둔 뒤 방을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등신들. 쌍으로 놀고 있네.]

흠칫 놀라서 돌아보는데 아무도 없다.

“나한테… 한 말이오?”

돌아오는 답이 없다. 잘못 들었나.

율은 고개를 갸웃하고 나서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끼이익, 문이 닫혔고 마루에 앉아 있는데 집이 오늘따라 더 조용하게 느껴진다. 곰곰이 생각하던 율은 신을 신고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집을 나섰다.

***

무령은 배를 잡고 웃었고 산신령은 그런 무령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나타나 며칠 전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내용인즉슨 자라와 했던 약속을 이락이 대신 지키겠다 나서는 바람에 이락에게 깍듯하게 형님 대접을 받게 생겼다는 것이다.

“천하의 염라가 여우한테 형님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네가 그 꼴을 봐야 했네. 어찌나 고소하던지 천년 묵은 체증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야.”

“그리 싸우다 정들겠어.”

“흥. 정은 무슨. 그놈이 하는 짓이 괘씸해 골려 주려 하는 것이지. 이락이 그놈 말이야. 처음엔 저승으로 돌아가려 그 아이를 이용하려는 건가 했는데, 생각보다 깊이 빠졌더군. 마음 같아선 나한테 했던 것처럼 선비를 유혹하여 되갚아 주고 싶은데, 참고 있는 중이네.”

“참다니. 왜?”

“어차피 둘은 이어질 수 없거든.”

“무슨 소린가.”

“전에 말했지. 인연이 될지 악연이 될지 알 수 없다고. 그런데 그 아이를 보고 확실히 알았네.”

“자네, 뭐를 봤군.”

“미리 알려 주면 재미없지 않겠나.”

또다시 깔깔 웃는 무령을 보며 산신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철드는 거하고 오래 사는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나 보다. 하긴, 이해도 됐다. 일이백 년 살면 모르지만 오백 년, 천년을 넘게 사는 것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즐겁지만은 않으니까.

대부분은 자신의 본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세월을 보내지만, 금기시된 즐거움을 찾다가 파멸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무령이 하는 짓은 철부지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때마침 숲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군가 궁금하여 쳐다보는데 무령이 먼저 알아채고는 피식 웃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락이 나타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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