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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74화 (74/102)

74화

불도 없이 어두운 산길을 걷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율은 넘어지지 않으려 이락의 옷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니 왕구와 왕태 그리고 몇몇 수하들이 음식과 술을 나눠 마시며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큰형님 오셨습니까. 어? 쥐방울도 있네? 방울아. 이리 와라. 와서 한잔해.”

저마다 오라고 난리다. 율은 가서 한 잔만 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술을 먹고 실수한 것이 여러 번이니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따로 할 일이 있지 않은가. 미안한 얼굴로 거절한 뒤 일단 마루로 올라가는데 뒤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상단에서 보낸 물건은?”

“방에 두었습니다. 가서 확인하십시오.”

왕태와 이락이 방으로 사라졌고, 율 역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마을에서 산 것들을 봇짐에서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뒀다. 벼루와 먹, 연적, 종이, 붓 등을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급격하게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어…?”

붓 손잡이에 이름을 새겨 준다길래 분명 방율이라 말했거늘, 주인이 방울이라고 새긴 게 아닌가. 세상에, 내가 율이라고 몇 번을 말하였는데…. 육지에서 귀가 먼 것은 이락뿐만이 아닌가 보다. 시무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율은 문갑에서 실패를 찾았고, 거기에 꽂혀 있던 바늘을 뽑아 가져왔다.

바늘 끝으로 나무를 긁어 ‘울’이라는 글자를 ‘율’로 만든 후에야 비로소 흡족해진다. 그러고 나서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연적에 물을 담아 와 벼루에 붓고 먹을 갈기 시작하였다. 먹을 갈며 율은 생각했다. 첫 문장을 뭐라고 쓰면 좋을까…. 그러다 불현듯 이락의 조언이 떠올랐다.

[있는 그대로 다 쓸 필요 없다. 음식엔 소금이 들어가야 맛이 나지. 글도 마찬가지야. 일기를 쓰는 게 아니라면 적당히 양념을 쳐야 한다.]

양념이라…. 율은 심청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되짚었다. 사실 어릴 적 그녀의 집은 상당히 유복한 편에 속하였다고 한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긴 하였으나 유모도 있었고, 먹고살 만한 집안이었다고. 그러나 아버지 심학규의 눈이 멀게 되면서부터 가세가 기울었고, 거느리던 식솔들도 떠나며 심청이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야 했단다.

율은 그것을 살짝 각색하기로 마음먹었다. 심청은 어린 시절 어미를 잃었으며 눈이 멀었던 그녀의 아버지 심 봉사는 먹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하여 어린 심청을 안고 엄동설한에 젖동냥하러 다녔다고….

글은 쓰지도 않았는데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아른거린다. 악역도 등장하면 좋을 것 같아 심 봉사에게 못된 여인 하나를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음…. 연꽃은 어쩌지? 율은 연꽃이 어쩌다 바다 위에 둥둥 뜨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른다.

누군가 보내 줬다고 할까…? 그래, 사람들은 옥황상제를 최고라 여기니, 직접 연꽃을 내려 심 낭자를 보호하였다고 적자. 그러면 책을 읽는 이들은 심 낭자가 옥황상제의 선택을 받은 여인이라 느끼게 될 것이다. 천제께서는 연꽃을 지상으로 보내며 아마도 이리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누구든 심 낭자를 해하려 하거든 용서치 않을 것이며, 사후에 저승에서 가장 무섭다는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쓰지도 않은 글을 상상하며 율은 혼자서 흐흐, 하고 웃다가 문득 겁이 나서 슬쩍 위를 올려다봤다. 혹시 이걸 옥황상제께서 다 지켜보고 계신 건 아니겠지. 아아, 그럼 안 되는데. 나중에 나를 지옥에 보내는 건 아닐까. 율은 양손을 공손히 조아리고, 죄송하다고 여러 번 용서를 구했다.

“좋아, 이제 시작해 볼까.”

율은 본격적으로 붓을 들어 먹물을 묻힌 다음 종이 위에 천천히 글자를 써 나갔다. 소과에 합격하기 전, 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 남의 책을 필사하고 세책방에 넘기는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잠시 그 시절이 떠올랐다.

열심히 종이에 글자를 적고 있는 와중에도 밖에선 왁자지껄 웃고 떠든다. 간간이 이락의 목소리도 섞였다. 무엇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귀가 쫑긋쫑긋하였다.

이락은 정말 염라였을까…. 궁금하긴 하나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도 무서운데 염라대왕이라고 하면 더 무서울 것 같다. 글자가 늘어 갈수록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우려했던 것보다 빠른 속도에 율은 자신이 글을 쓰는 데 재주가 있다는 이락의 말이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막히는 구간이 생기고 팔도 아프고 눈도 가물가물해졌다. 율은 붓을 한쪽에 내려놓고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고 툭툭 두드렸다. 손목도 돌리고 손가락도 접었다 폈다 반복하고 나서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글 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구나…. 이때면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인데…. 율은 지친 얼굴로 쓰다 만 글을 바라봤다. 내일 마저 할까…. 갈등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가 하루라도 빨리 이것을 완성해야 심 낭자를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는가.

잠시만. 아주 잠시만 눈을 붙이자…. 그렇게 눈을 감고 있으니 의식이 차츰 흐려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몽사몽 정신을 차려 보니 이락이 앞에 앉아 있다. 율은 놀라서 눈을 비비고 자세를 바로 하였다. 그는 율이 쓴 글을 읽는 중이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율은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에 그것을 돌려 달라 손을 뻗었다. 주십시오. 제대로 쓰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락이 웃는다.

“제법이다. 초반부터 흥미로워. 아주 적절하게 잘 썼다.”

칭찬에 율은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처음이라 그런지 힘이 듭니다…. 그 뒤부터는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내가 대신 써 줄까?”

뜻밖의 제안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진심이세요? 도와주지 않겠다면서요?”

“혹시 알아? 네가 아양이라도 떨면서 부탁하면 약간은 힘을 보태 줄지.”

아양이란 말에 율은 질색했다. 이락이 그럼 관두라며 손짓을 하였고, 율은 적다 만 글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이 속도라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락의 도움을 받는다면 시기를 앞당길 수 있겠지.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던 율은 장에서 봤던 어여쁜 기생을 떠올렸고, 그녀의 말투도 기억해 냈다.

머뭇거리던 율은 정말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락을 쳐다봤다.

“아잉… 이락 니임… 제발 써 주시어용….”

“…….”

이락이 미간을 슥 구긴다.

아, 망했다.

율은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얼굴은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변하였다.

“못 들은 걸로 하십시오….”

“들은 걸 어찌 못 들었다 해.”

“마음이 조급하여 실언했습니다….”

“표정이 가관이었다.”

“압니다….”

“그래도 내 눈엔 예쁘다.”

기가 차서 쳐다보니 이락이 책상을 옆으로 슥 치우고 율에게 성큼 다가온다. 한 마리 짐승처럼 기어서 오는 그를 보고 덜컥 겁이 나 물러나 앉았다. 손으로 뒤를 더듬으니 벽에 가로막혀 도망갈 곳도 없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아까 내가 빌었던 소원을 기억하지?”

“안 납니다.”

“들어주면 좋겠는데.”

싫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입술이 먼저 다가온다. 피할 틈도 없이 이락이 뒤통수를 감싸더니 그대로 당겨 입을 맞춘다. 거침없이 입술을 빨면서 손은 아래로 내려가 옷고름을 풀었다.

이락을 떠밀어야 할지 아니면 옷고름부터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저고리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락의 얼굴이 가슴으로 내려간다. 율은 기겁하고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락이 눈을 들어 쳐다보길래 조용히 밖을 가리켰다.

“하지 마십시오…. 다들 듣겠습니다….”

“너만 잘 참으면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니로 젖꼭지를 긁는다. 섬뜩한 감각에 율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었다. 놀라서 황급히 밖을 살피는데 여전히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그는 집요하게 가슴을 빨아댔다.

배꼽 아래로 열이 몰리자 율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다리를 움츠렸다. 그러자 이락이 입고 있던 저고리를 거침없이 벗어 옆으로 홱 던진다. 단단한 근육들이 성이 난 듯 꿈틀거렸고, 눈동자는 어느새 붉은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이락 님…. 저는 하기 싫, 으엇.”

이락이 다리를 강제로 벌리고 양물을 살짝 깨무는 바람에 율은 입을 틀어막았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양물과 이락의 혀가 맞닿고 뜨거운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율은 어떻게든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한 손으론 입을 막고 나머지 손으로는 제발 하지 말라 저항하는데, 이락은 무슨 꿍꿍인지 율을 보며 짓궂게 웃더니 가랑이 사이에 손을 가져다 댄다. 곧바로 뚜둑, 하고 천이 찢기는 소리가 났고 율의 얼굴에선 핏기가 싹 사라졌다.

설마 속곳을 잡아 뜯은 것인가. 더 알아볼 새도 없이 이락이 엎드렸고, 이번엔 혀가 직접 닿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회음부를 건드리자 율은 까무러칠 듯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만하십시오!”

버럭 소리를 지르자마자 떠들썩하던 밖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진다. 이게 뭔 소리야. 방금 그거 방울이 목소리 아니야? 이락 형님이 들어가지 않았어? 둘이 싸우는 건가. 율은 얼굴이 붉어졌고, 이락은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조용.

이어서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천을 하나 쥐여 주더니 능글맞게 웃었다.

“그거라도 물어. 이제부터 제대로 핥아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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