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방울전-73화 (73/102)
  • 73화

    “지필묵을 사러 온 것이 아닙니까….”

    무령이 약속을 파기한 다음 날 이락은 율을 데리고 마을로 내려갔다. 글을 쓰기 위한 지필묵을 사기 위해서라고 하였으나 막상 마을에 오니 만물상점에 들러 이것저것 사치품을 고르기 바빴다. 율의 투덜거림에도 이락은 아랑곳하지 않고 갓끈 몇 개를 가져와 율의 얼굴 아래 대보았다.

    “이것도 괜찮고, 이것도 나쁘지 않아. 이건 너하고 딱이구나.”

    “이락 니임.”

    그만하라며 말리는데 능글맞은 만물상 주인이 기가 막히게 끼어든다.

    “선비님 얼굴이 희고 고와 뭘 갖다 대도 다 어울리시네. 이건 어떻습니까?”

    주인이 다른 걸 골라 주자 이락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다.

    “다른 것도 내와. 갓하고 노리개도 보여 주고.”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주인은 마치 왕구가 박에서 금을 건졌을 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부리나케 움직였다. 율은 이락의 소매 끝을 붙들고 애원하였다.

    “정신 차리십시오…. 버신 돈을 모두 저한테 쓰실 작정입니까….”

    “네 첫날밤을 내가 가져갔으니, 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어.”

    그 말을 듣자마자 율은 입을 벌리며 경악하였고, 주위를 살피었다.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남들이 들으면 오해합니다.”

    “오해라니. 남녀가 몸을 섞어야만 첫날밤이냐. 너하고 내가 음과 양의 기운을 주고받았으니, 그것도 따지고 보면….”

    율은 뒤에서 다가오는 주인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이락의 입을 틀어막고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주인이 가지고 온 물건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뭐 하십니까, 두 분?”

    율은 손을 떼고 멋쩍게 웃었다.

    “이락 님의 얼굴에 뭐가 묻어서….”

    주인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번갈아 봤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참으로 보면 볼수록 오묘한 조합입니다.”

    “오묘하다뇨…?”

    “외모로 보나 행동거지로 보나, 어디 닮은 구석이 있길 합니까. 한 분은 누가 봐도 백면서생이고 한 분은 이 근방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악명이 자자한,”

    주인이 말을 하다 말고 이락의 눈치를 살피고는 입을 찰싹 때린다.

    “악명이 아니고 유명, 말이 헛나왔네. 이래서 나이 들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니까. 아, 근데 선비님. 투호 놀이는 어떠셨나? 재미있으셨습니까? 이락 님과 둘 중 누가 이겼는지 궁금하네요.”

    투호 놀이란 말에 율은 목부터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입만 달싹거렸다.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 하니 이락이 주인을 슥 돌아본다.

    “그것을 권한 게 너냐?”

    다소 음산한 목소리에 주인이 흠칫한다. 앞의 말실수도 그렇고 자신이 이락을 화나게 한 건 아닐까 긴장하는 눈치다. 그런데 이락이 주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잘했다. 기특해.”

    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율을 봤고, 율은 수치스러워 고개를 돌려 외면하였다. 몇 개의 물건을 더 고른 뒤 이락은 그것들을 전부 금산으로 보내 달라 요청하였다. 그러고 가게를 나서는데 주인이 뒤쫓아 나오며 은근슬쩍 떠본다. 뜻밖의 횡재에 입이 벌어지면서도 문득 이락이 돈을 제대로 낼까, 걱정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물건값은….”

    이락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진다. 탁. 붙잡은 주인의 눈이 커지더니 그걸 이빨로 깨물어 몇 번이고 확인한다. 그러고는 얼굴이 환해져 물건을 잘 보내겠노라고,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들르라며 여러 번 허리를 숙인다.

    이곳에 와 상점 주인이 저리 친절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상점과 멀어지자 이번엔 만두 가게가 눈에 띈다. 어제 먹지 못한 만두를 생각하니 침이 꼴깍 넘어간다. 염치가 없어 차마 먹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락이 냉큼 만두를 사서 가져오더니 봉투를 내밀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입에 침이나 닦고 거짓말해.”

    율은 민망하여 수줍게 웃고는 만두를 하나 꺼내 이락에게 건넸다. 역시나 이락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율은 만두 하나를 쥐고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그때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오라버니이.”

    목소리는 간드러졌고 눈이 휘게 웃는 모습은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기생인가. 율은 만두를 품에 안고 슬그머니 거리를 두었다. 그러자 여인이 이락의 팔을 흔들며 아양을 떤다.

    “아잉. 어째서 통 오시질 않습니까. 저번에도 술만 드시고 가셨다면서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아.”

    이락이 율을 힐긋 보더니 여인의 팔을 떼어 내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간다. 무어라 얘기했는지 몰라도 여인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홱 방향을 틀어 가 버린다. 곧이어 이락이 돌아와 큼, 하고 헛기침을 하였다.

    “신경 쓸 거 없다. 그냥 친한 아이다.”

    율은 만두를 한입 베어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락 님…. 근데 이 만두는 저번하고 맛이 살짝 다릅니다. 주인이 바뀐 것일까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에 이락은 은근슬쩍 빈정이 상하였다.

    “너는 내가 저 여인과 함께 있는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느냐?”

    “음… 여인의 말투가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락이 이를 갈며 노려봤고, 율은 눈치를 보며 만두를 오물오물 씹었다. 원하는 대답이 이것이 아닌가. 그가 왜 성질을 내려 하는지 대충 이해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자신이 시기 질투를 한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어차피 약속한 날짜가 되면 하나는 남겨질 테고 하나는 떠날 텐데…. 어젯밤엔 그 생각을 하느라 잠을 좀 설쳤었다.

    율은 분위기를 바꾸고자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살짝 높이었다.

    “저것 보십시오, 이락 님. 어제 그 전생 체험이란 것을 아직도 하나 봅니다.”

    그런데 이락이 들은 척도 않고 지필묵 가게로 향한다. 지필묵 가게에서도 이락은 옷을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것을 내오라고 하였고, 붓에다가 이름을 새겨 준다는 말에 율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생긴 것 같아 살짝 설레었다.

    필요한 것들을 사고 저녁을 먹고 돌아가려는데 이락이 금산과는 반대편으로 저를 이끈다. 얼결에 따라간 곳에는 마을을 관통하는 작은 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천을 따라 양옆으로 오색등이 매달려 있었다. 등도 등이지만 그것이 물에 비치어 내는 색깔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넋을 놓고 감탄하는 동안 이락이 곁으로 다가왔다.

    “실은 어제 장 구경을 마치고 널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다.”

    율은 환하게 웃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러다 천 아래 사람들을 발견하고 궁금증이 생겼다. 그들은 종이로 배 모양을 만들어 물을 따라 흘려보내고 있었다.

    “저들은 무얼 하는 중입니까.”

    “배에 소원을 적어 띄우는 것이지.”

    “아….”

    “한번 해 볼 테냐.”

    이락의 권유에도 율은 침묵하였다. 때마침 종이를 접던 이들이 남은 자투리를 천에다 버린다. 지켜보던 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키지 않아?”

    “그것이 아니라… 몇 년 전부터 바다에 오물이 많아져 문제가 된다고 상소가 올라왔는데, 이곳에 오니… 대충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듣고 있던 이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저리 흘러서 바다까지 간다면 너희가 사는 곳에도 분명 영향을 미치겠구나. 율은 그가 공감하여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이번엔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낸다.

    “내가 만약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저걸 법으로 금지하마.”

    “높은 자리요…?”

    “병판이 그랬거든. 만약 중전을 갈아 치우는 데 성공하면, 내게 자리를 크게 내주겠다고 말이다.”

    표정을 보니 농담은 아닌 듯하다.

    속상하여 한숨을 쉬자 이락이 율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열심히 한번 써 봐라. 혹시 알아? 네가 쓴 글이 유명해지면, 심 낭자의 안위도 보존이 될지.”

    도발인지 응원인지 모르겠지만, 율은 꼭 그러리라 다짐하였다.

    시간도 늦었고, 그만 자리를 떠나려는데 이락이 팔을 붙들었다.

    “기왕 온 거 배는 띄우지 않아도 되니, 소원은 빌고 가.”

    율은 잠시 고민하다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감았다.

    첫 번째, 가족이 무탈하게 해 달라 기도했고,

    두 번째, 무사히 용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제가 떠나도 이락 님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소원을 다 빌고 나서 눈을 뜨니 이락이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다.

    “다 빌었어?”

    “예… 이락 님도 비십시오.”

    “됐다.”

    “그러지 말고 하십시오. 혹시 압니까…. 소원이 이루어질지요….”

    이락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간다. 그래? 그러더니 그는 눈을 감지도 않고 손을 모으고 율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율은 다소 긴장하여 입술을 적셨다. 왜… 절 보십니까?

    설마 나와 관련된 소원을 비는 걸까?

    내가 여기 남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율이 걱정하는 사이 이락은 뻔뻔하게 웃으며 소원을 말하였다.

    “오늘 밤 방율이 제 밑에서 다리를 벌리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아주 간절히, 정말 간절히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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