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쥐방울.]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율은 당황하여 고개를 들고 눈물을 벅벅 닦아 냈다.
[들어간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락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조용하길래 잠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는지 옷도 그대로다. 일어날까, 아니면 버틸까. 고민하는 동안 이락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더니 얼굴을 빤히 응시한다. 코앞에서 본 그의 눈동자 색은 볼수록 참으로 오묘했다. 감정에 따라 붉은색이 짙어지고 옅어지는 것이 도깨비가 요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아직도 내게 화가 났어?”
“…….”
“내 병판에게 받은 게 있으니 널 직접 도울 순 없다. 대신 길은 알려 주마.”
길? 더 물을 것도 없이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앞에 던진다. [저승전] 이라고 적힌 책을 보고 의아함이 생겨났다. 이게 뭐지. 왜 이 책을 나에게…?
“전에 말하였지. 그것에 기록된 저승의 모습들이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죄를 짓는 자들도 사라졌다고.”
“…….”
“내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
“왜 그리 멀뚱멀뚱 쳐다봐? 이해를 못 한 것이냐?”
“예….”
“저런. 얼굴만 곱게 생기면 다냐.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도사처럼 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니까 저더러, 이락 님처럼 글을 써서 책을 만들란 말씀입니까?”
“그래.”
“하, 하오나, 저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소설이라 하는 것은 다른 이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데, 저는… 할 줄 모릅니다….”
“아니. 넌 제법 한다.”
“뭘요…?”
“남의 마음 후리는 거.”
율은 당황하여 어버버했다. 제, 제가 언제 다른 이의 마음을 후렸다 하십니까.
“거기다 글도 꽤 쓰는 편이지.”
뜻밖의 칭찬에 율은 어리둥절하였다.
“이락 님이… 어찌 아십니까?”
이락은 이불을 쌓아 올려 둔 곳을 눈짓으로 가리켰고, 율은 사색이 됐다. 후다닥 달려가 이불 사이를 들추니 평소에 기록하던 일기가 있다. 율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 이것을 보셨습니까?”
이락은 부정하지 않았고 율은 울 것처럼 변하였다.
“왜 남의 것을 함부로 보십니까. 설마 전부 다 읽으신 겁니까?”
“아니. 전에 잠깐 본 게 다다. 마지막 장에 내 이름 말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서 내내 그것이 궁금하였어. 말이 나온 김에 한번 물어보자. 뒤에 뭐라고 쓰려다 만 것이야?”
“…….”
“내가 맞춰 볼까?”
“아니요….”
“왜. 네 속내를 들킬까 두려워?”
“…….”
대답하지 않으니 이리 오라고 손가락을 까닥인다. 율은 사색이 되어 일기를 품에 안고 방구석으로 도망갔다. 그러다 이락이 제게 손댈 수 없음을 깨닫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경계 태세를 늦추었다. 이락 역시 쳐다만 볼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는다. 율은 바닥에 있는 ‘저승전’을 보다가 일기를 문갑에 집어넣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런데 이락의 시선이 이번엔 바닥에 놓여 있는 당과 주머니에 가 닿는다.
“하나… 드릴까요?”
“내가 사 준 만두는 왕구한테 주더니, 그놈한테는 잘만 받아 왔구나.”
“아까는 화가 나서…. 죄송합니다….”
율은 ‘저승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락을 쳐다봤다. 밉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이것 또한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람 마음이 어째서 이렇게 오락가락할 수 있단 말인가. 서운했다가 미웠다가, 그리고… 또…. 더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얼른 말을 돌렸다.
“어머니께 주신 삼은… 정말 감사합니다…. 비싼 것일 텐데… 나중에 보답하겠습니다.”
“지금 보답할래?”
무슨 뜻이지? 전 같으면 음흉한 꿍꿍이가 있으리라 생각할 텐데 이제는 손도 댈 수 없지 않은가. 아니면 온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혼자 양물을 잡고 문질러 보라는 둥 이상한 짓을 시키는 건 아니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데 이락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달구경이나 하러 가자.”
“달이요…?”
“응. 너하고 걷고 싶다.”
별말 아닌데도 왜 가슴은 두근거리는지….
“싫어?”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율은 책을 옆에 놓아두고 이락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등불 하나를 들고 숲으로 들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둘을 지켜보는 동물들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율은 이락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여전히 숲이 두려우냐?”
“밤에만 그렇습니다….”
“손을 잡아 주고 싶은데, 참으로 아쉽다.”
“…….”
그렇게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온다. 어두웠지만 율은 그곳이 무령과 처음 만났던 곳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왜 이 길로 가는 거지. 혹시 산신령이 산다는 연못에 들르려고 하는 건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려는데 이락이 걸음을 멈춘다.
“여긴가. 무령을 부르는 곳이.”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락이 왜 이곳까지 와서 무령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그러다 결론이 한곳에 도달하였고 얼굴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설마 무령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그러나 그는 오늘 칼도 활도 들지 않았다. 율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거짓말을 둘러댔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불러.”
여기가 아닌 거 같다고 핑계를 대려는데 표정을 보니 눈빛이 살벌하다. 율은 울며 겨자 먹기로 무령을 작게 불렀다. 무령 님…. 무령 님… 하고 부르다, 마지막에 무령 님! 하고 크게 불렀는데 나타나질 않는다. 다행이란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그럴 리가 있나.”
“돌아갔다가 나중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에 뿌연 안개가 생기더니 무령이 나타난다. 평소와 달리 흰색 옷을 입고 검은색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친 모습이었는데, 나른하게 풀어진 자태가 너무 색정적이라 잠깐이었지만 구미호에게 왜 홀리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이락이 눈앞에 딱 손가락을 튕긴다. 정신 차려. 홀리지 말고. 율은 흠칫하여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때 무령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앞으로 스으으 다가왔다.
“선비님.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저는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는데.”
율은 멋쩍게 웃으며 괜한 소리를 하였다.
“아… 무령 님은 일찍 주무시는군요. 하긴, 일찍 자는 것이 건강에도 좋지요….”
그러자 옆에서 이락이 비아냥거린다.
“원래 늙을수록 초저녁잠이 많아지는 법이지. 나를 봐. 아직은 정정하지?”
무령이 아니꼽고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이락을 보다가 율에게는 따스한 시선을 보내었다.
“선비님. 전에는 인간보다 못한 것들을 데려오시더니, 오늘은 그것보다 더한 놈을 끌고 오셨네요.”
대놓고 욕보이는데도 이락은 표정이 태연하다. 무령 또한 반응이 없으니 흥, 하고 외면하였다.
“어쩐 일로 찾아왔는지, 말씀을 해 보세요.”
율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이락이 끼어든다.
“너에게 볼일이 있는 건 쥐방울이 아니라, 나다.”
무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짜증이 드러났다.
“네가 왜?”
“쥐방울과 한 약속을 파기해. 그걸 부탁하러 왔다.”
“듣던 중 웃기는 소리다. 여우와의 약속이 그리 쉽게 깰 수 있는 건 줄 알았어? 왜? 네놈이 마음대로 선비님을 어쩌지 못하니 몸이 달아 죽겠느냐? 결국, 네 욕심을 채우려 이 밤중에 선비님을 끌고 나를 찾아온 것이구나. 이 짐승 같은 놈. 하긴 이젠 짐승이긴 하지. 게다가 부탁하는 놈 태도가 왜 그 모양이야?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돈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서서 부탁을? 하, 기가 차는구나. 아니 그렇습니까, 선비님?”
율은 당황하여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이락이 여길 온 목적이 약속을 파기시키려고 데려온 것인가. 가만… 약속이 파기되면 그다음은…? 전처럼 떡 주무르듯 나를 주물러 대고 희롱할 게 아닌가.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지자 눈치 빠른 무령이 스윽 하고 율에게 다가왔다.
“선비님 의견이 중요하지요. 어찌, 약속을 파기하고 싶으십니까?”
율은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아니요! 저는 이대로 너무 행복, 아니, 만족, 아아니. 크게 불편할 것이 없습니다….”
무령이 이락을 향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들었니, 이락아. 선비님은 괜찮다는데 너 혼자 발정이 나서 지랄하고 있구나. 너는 어떻게 늘 네 생각만 하니. 이기적인 놈. 하고 비난을 퍼붓는데도 이락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제안을 한다.
“쥐방울과 약속을 깨고 나하고 맺는 건 어떠냐.”
율이 놀라서 돌아봤고, 무령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하였다.
“그리되면 네가 대신 내 청을 들어줘야 하는데, 괜찮겠어?”
“좋다.”
이락 님! 율이 놀라서 그를 불렀다. 무령이 싫은 건 아니지만, 대체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그리 순순히 알겠다고 하는 건지. 한편으로는 의심스럽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는데 무령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럼 앞으로 나를 형님으로 모셔라.”
율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이락은 침묵했고 무령은 그럴 줄 알았다며 코웃음을 쳤다.
“못 하겠지? 하긴 네 자존심에 그게 가당키나,”
“형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는데 이락이 다시 형님. 하고 부른다. 놀란 건 저만이 아니었다. 형님 소리를 들은 무령은 얼굴이 하얘지도록 경악하였는데 옷까지 하얀 걸 입어서 그런가, 이락의 말대로 처녀 귀신처럼 느껴졌다.
“이… 미친놈! 네놈이 드디어 정신 줄을 놨구나. 욕정에 눈이 멀어 내게 형님이라고 한 것이냐? 천하의 이락이? 내게? 하하!”
“마음에 안 들어? 누님이라고 부를까?”
무령이 발끈하려다 말고 눈알을 슥 굴린다. 생각해 보니 형님 소리를 듣는 게 나쁘지 않은 표정이다. 율은 갑자기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어떻게든 되돌리려 노력했다.
“아, 아닙니다. 무령 님! 저는 계약을 파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어째서 당사자인 저한테는 묻지도 않으시고 계약을 파기합니까. 방금 여우의 약속은 쉽게 깰 수 없는 것이라 말씀하신 분이 누굽니까.”
흐음. 무령이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고 이번엔 이락이 공격에 나섰다.
“무령 형님. 지난 일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좋은 아우가 돼서 형님을 보필하는 데 애쓸 것입니다. 그러니 쥐방울과의 계약을 파기해 주십시오. 아우가 이리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마치 책을 읽듯 영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령은 솔깃하였는지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간다. 아아, 안 돼. 율은 다른 수를 생각하려 했으나 무령은 이미 결정을 내린 얼굴이다.
“어쩝니까, 선비님. 나는 골려 먹는 것도 좋지만, 이락이 놈한테 형님 대접받는 게 더 좋은데.”
싱긋 웃는 그의 손목에 금실이 반짝인다. 율은 자신의 손목을 봤다. 똑같이 반짝이던 금실이 후르르 풀리더니 그것이 곧 이락의 손목으로 옮겨 간다. 율은 절망하였고 이락의 얼굴엔 뻔뻔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아우님. 못다 한 밀회를 즐기시게. 나는 피곤하여 이만 가 보겠네. 다음에 볼 때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하는 거 잊지 말고.”
율이 그를 잡으려 하였으나 무령은 미안한 표정으로 웃으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단둘이 남게 되자 율은 저도 모르게, 허. 하고 기가 차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자기들 멋대로…. 이어서 어깨 위로 이락의 손이 올라왔다. 불도 붙지 않았고 뜨겁지도 않다.
절망하여 쳐다보는데 이락이 한 발 성큼 다가온다.
“왜, 왜 이러십니까?”
피하기도 전에 입술이 왔고, 율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닿자 귀는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율은 서둘러 이락을 밀어내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동시에 이락이 냉큼 손을 잡는다.
“저는… 하기 싫습니다….”
“누가 지금 하자고 했어. 그냥 손을 잡고 싶었다. 아까 기진이 네 손을 잡는데 얼마나 배알이 뒤틀리던지.”
“아…. 그게 언짢으셨습니까?”
“당연하지. 너도 내 눈치를 봤으니, 그놈 손을 놓은 게 아니냐. 참으로 잘했다. 계속 붙들고 있었으면 후환이 따랐을 거야.”
순간 웃음이 터질 뻔하였다. 이락이 어울리지 않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였다. 그의 태도에 마음을 놓고 있는 사이 이락이 은근슬쩍 묻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온천이나 갈까?”
온천이란 말에 율은 다시 이락을 경계했다.
“아니요….”
“쥐방울. 그거 알아?”
“무엇을요?”
“넌 가끔 짜증 날 정도로 단호한 구석이 있어.”
이락의 타박에도 율은 어금니를 꽉 물고 웃음을 참았다. 맞잡은 손을 통해 그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냉랭한 성정과는 달리 손이 참으로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율은 손을 빼는 것도 잊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동그란 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때마침 시원한 바람도 불어온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옆을 보니 이락이 달이 아닌 저를 쳐다보고 웃고 있다. 덕분에 가슴에도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