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세상에. 곱습니다. 어쩜 이리 갖다 대는 것마다 찰떡처럼 어울리실까.”
율은 지친 얼굴로 포목점 주인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얼마나 칭찬을 해 대는지 귀가 닳아 없어질 것 같은 심정이었다. 이락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나머지 것도 가져와 보라며 지시를 내렸다. 포목점 주인은 신이 나서 다른 비단을 가지러 갔고 율은 이락에게 급히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었다.
“시장 구경을 한다더니, 이게 벌써 몇 번쨉니까….”
“방금 그것은 어떠냐. 연분홍빛이 너하고 참 잘 어울린다.”
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장 구경한다고 데려와 놓고는 포목점에서 몇 시진 째 옷감만 고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한쪽에는 비단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는데 종류도 많고 색깔도 참으로 다양하였다.
“차라리 이락 님이 지어 입으십시오…. 매번 같은 옷만 입지 마시고요….”
“내가 흰색만 입는 이유는 따로 있다.”
“뭡니까, 그게…?”
“죄인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였지만, 더는 캐물을 수가 없었다. 대체 그는 어떤 죄를 지었길래 저러고 사는 걸까. 아니, 애초에 정체가 뭘까. 구미호는 아니고…. 신령도 아니고…. 순간 머릿속에서 이락이 직접 썼다는 소설이 떠올랐다. 저승을 다스리다 큰 죄를 짓고 지상으로 쫓겨난, 그의 이름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설마… 아니겠지….
“이락 님, 혹시….”
이락에게 직접 물어보려고 하던 찰나 주인이 새 비단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난다. 율은 그것을 보며 기겁을 했다. 아니, 뭐 이리도 많단 말인가. 주인은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펼쳐 율의 얼굴 아래로 가져다 댔다.
“이것은 물 건너온 것인데 사대부에서 제일 잘 나가는 겁니다. 병판 댁 도련님도 어제 주문을 넣고 가셨지요. 그리 까탈스러운 분이 보자마자 가져갔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물건이란 뜻이 아니겠습니까.”
병판 댁 도련님이란 말에 율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영월관에서 본 그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 서둘러 주인에게 그만해 달라 청하였다.
“이… 이만하면 됐습니다.”
“아니, 왜요? 아직 반도 못 보여 드렸는데.”
율은 이락을 향해 제발 여기서 나가자고, 옷이 아니라 만두가 먹고 싶다고 눈짓으로 애원했다. 이락이 알아들었는지 피식 웃으며 주인을 부른다. 주인이 달려왔고 이락은 옆에 쌓아 둔 것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싹 다 지어서 보내.”
포목점 주인의 얼굴은 봄날 만개한 꽃처럼 활짝 피었고 반대로 율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잠시만요, 이락 님! 그를 말리려 나서는데 이락이 품에서 두툼한 엽전 꾸러미를 꺼내 주인에게 건넨다. 툭, 하고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꽤 묵직하다. 주인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간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선비님한테 딱 맞게, 아주 곱게 지어서 보내겠습니다.”
“저, 저는 필요 없습니다! 저리 많은 옷을 지어다 다 뭘 합니까.”
그 말에 주인은 혹여 이락이 마음을 돌릴까 걱정되었는지 율을 달래기 시작하였다.
“거참, 선비님. 제가 여기서 포목점 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이락 님이 저리 옷값에 돈을 쓰는 건 처음 봅니다. 고로, 선비님은 횡재한 것이지요. 이 옷을 입고 밖에 나가 보십시오. 어여쁜 아가씨들이 줄을 지어서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이락 님?”
“그럴 일은 없어.”
너무나 단호하게 잘라 주인이 머쓱하게 웃었다. 이락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율은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물건을 많이 판 주인은 기분이 좋았는지 머리가 땅에 닿기 직전까지 살펴 가라며 인사를 한다.
율은 이락의 팔을 붙들려다 관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
“가서 무르십시오. 저리 많은 옷을 제가 뭣에 씁니까.”
“왜 쓸데가 없어. 오늘처럼 시장 나올 때도 입고, 산책할 때도 입고, 꽃놀이 갈 때도 입으면 되잖아. 아, 네가 좋아하는 그 왕자마마 만나러 갈 때도 입으면 되겠구나.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싫습니다…. 이미 이락 님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다시 포목점으로 가자고 조르는데 한 상점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율은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확인했다. [전생 체험]이라고 적힌 글자를 보자 고개가 갸웃해진다. 전생 체험이라니…. 전생을 보여 준단 말인가. 신기하여 넋을 놓고 있는데, 상점에서 막 나온 이가 엄지를 치켜들며 대단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걸 보고 있으니 더더욱 마음이 동하였다.
“뭘 그리 보고 있어?”
이락이 뒤로 와서 섰고, 율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를 응시하였다.
“이곳에서 전생을 봐 준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락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누가 봐도 사기구나.”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정말 볼 수도 있지요…. 이락 님은 전생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전혀.”
“저는 살짝 궁금합니다…. 지금 모습은 이래도 전생에 나라를 구한 장군이었을지도 모르지요. 학문도 무예도 출중한, 어느 귀한 댁 도련님이었을 수도 있고요.”
생각만 해도 좋아서 율은 말을 이어갔다.
“전생에 인연이 후세에도 이어진다고 하는데, 혹시 압니까. 이락 님과 제가 전생에 인연이 닿았을지도요. 친우였을 수도 있고, 전쟁터에서 서로를 죽이려 싸우던 적군이었을 수도 있고. 또,”
“매일 떡이나 치던 사이였을 수도 있지.”
“…….”
“원하면 말해. 전생에 못다 한 걸 원 없이 하게 해 줄 테니.”
질색하자 이락이 그대로 앞으로 나아간다. 율은 실망하여 입을 한번 삐죽 내밀고는 그 뒤를 쫓아갔다. 그런데 시장 한가운데가 떠들썩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고, 이락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 사이로 사당패가 놀이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쓴 한 광대의 가슴 앞에 ‘심’자가 적혀 있었다. 율은 그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하여, 심씨 성을 가진 이 처자는 계략을 꾸미게 되는데. 가 본 적도 없는 바다에 빠졌다고 거짓말을 하고, 사술로 만들어 낸 커다란 연꽃에 숨어 왕을 홀렸으니, 그 죄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이 심 씨는 아들을 낳은 병조 판서의 딸 혜빈을 시기 질투하여, 처소 아래에 온갖 삿된 것들을 파묻고 저주를 내리기 시작하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꽹과리가 울리고 가슴에 ‘심’자를 적은 광대가 어깨를 흔들며 춤을 추다가 품에서 바늘을 꽂은 볏짚 인형을 꺼내 높이 치켜들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광대는 손으로 흙을 파내며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었다.
모여 있던 이들이 비난하며 손가락질을 하자 율은 표정이 굳어 이락을 봤다. 이락은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마치, 이 일을 모두 예견한 것처럼…. 저건 누가 들어도 심 낭자의 이야기였다. 벽서가 붙었다고 하더니, 이젠 놀이 패들까지 나서서 중전을 모함하는 것인가.
율은 구경꾼들을 헤치고 들어가려고 했다. 아니라고, 내가 봤다고, 다들 거짓말에 속고 있다고, 그리 말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누가 율의 팔을 붙든다. 돌아보니 처음 보는 사내가 팔을 꽉 붙들고 있는 게 아닌가. 이윽고 사내가 뒤를 가리켰다.
“저이가 잡으라고 시켰소.”
남자가 가리킨 건 이락이었고 그와 시선이 마주친 율은 입술을 깨물며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의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이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의 말을 들어 줄 사람도, 믿어 줄 사람도.
율은 그곳을 빠져나왔고 이락도 뒤를 따라 걸었다. 귀를 찢는 악기 소리도 차츰 잠잠해졌고, 이락은 만두 가게 앞에 멈춰 율을 불렀다.
“만두를 사 줄까?”
“…….”
“아니면 찐빵? 지금 네 얼굴이 찐빵 비슷하긴 하다. 잔뜩 부어서는.”
이락은 만두와 찐빵을 함께 사서 가판 위에 올려 두고 율에게 가져가라며 눈짓을 했다. 그러나 율은 그것을 집지 않고 바라만 보다 반대편으로 향하였다. 이락도 말없이 그 뒤를 쫓았고 하염없이 걷던 둘은 인적이 드문 막다른 길에서 멈춰 섰다.
“길이 막혔군, 담이라도 넘어가야 하나.”
“…….”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셈이야? 내가 찐빵이라고 해서 화났어?”
“생각 중입니다….”
“무엇을.”
“아까 광대가 말하길, 심 낭자가 병조 판서의 여식을 음해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병조 판서는 이락 님과 영월관에서 함께 있었고, 어제는 선물도 보냈지요….”
“그래서.”
“혹시… 이 일과 관련이 있으십니까…?”
이락은 태연하였고 율은 입 안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제발 아니라고 해 주십시오. 저는 이락 님이 그 정도로 나쁜 분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옳고 그름은 따질 줄 안다 여겼는데….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이락은 첫 만남에 저를 관아에 팔아넘기지 않았던가. 게다가 몇 번이고 속이고 거짓말을 하였지. 율은 쓴웃음을 삼켰다. 이락이 말한 콩깍지가 씌었다는 뜻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내가 그리되었구나….
“아니면 아니라고 말씀을 해 주십시오…. 답답합니다….”
“답답할 것 없어. 네가 추측하는 게 맞다.”
순순히 그렇다고 하니 율은 할 말을 잃었다. 눈이 시큰거리고 명치가 조여 왔다.
“심 낭자는… 착하고 좋은 분입니다.”
“그걸 심성이 착하다 할 수 있을까. 어리석고 무모한 건 아니고? 그 아비가 눈을 뜨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아? 네가 구하지 않고, 연꽃도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처자는 바다에서 물고기 밥이 됐을 거다.”
신랄한 말에 율은 이락을 보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가 뭡니까? 그 낡은 책 때문입니까? 아니면 병조 판서가 다른 걸 준다고 하였습니까?”
“알 것 없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내 결정을 번복하지 않아. 특히 내게 이득이 되는 것에 있어서는 더더욱.”
“예, 바라지도 않습니다…. 진즉부터 그런 분인 줄 알았으니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평소와 다른 율의 태도에 이락의 표정이 굳어 가고 있었다.
“내가 이 일에 가담한 게 그리 화를 낼 일이냐?”
꾹꾹 누르며 참던 율은 결국 울분을 터트렸다.
“제가 직접 구한 여인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란 것도 쓸모가 있구나, 느끼게 해 준 분입니다. 아버지가 늘 말하던 것처럼 배냇병신에 모자란 놈은 아니구나! 그날 얼마나 기뻤는지 이락 님은 절대 모릅니다. 당신처럼 잘난 분이 제 마음을 어찌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어쩌게. 궁으로 가서 직접 고하기라도 하게?”
“못 할 것도 없습니다. 왕께 고하고, 심 낭자의 억울함을 풀어 줄 겁니다. 만약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저잣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그래도 믿지 않으면….”
율은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삼키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왕이 내 말을 믿어 줄까. 심 낭자가 잘못된다면 배 속의 아이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그 아비는…?
율은 간곡한 심정으로 이락에게 부탁하였다.
“짓지도 않은 죄를 덮어쓰고 모함으로 죽어야 하는 이들이… 가엽지도 않습니까. 이락 님의 아버지고 누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아버지도, 누이도 없다.”
냉담한 말투에 율은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할 작정이었는데 이락은 기어코 한마디를 더하여 기대를 무너트렸다.
“무엇을 생각하든 단념해. 억울한 게 어디 그들뿐일까.”
율은 눈가가 벌게져서 그를 노려보다 돌아섰다.
“알겠습니다. 더 말해야 제 입만 아프니… 그만하지요.”
그때 어린아이 하나가 앞으로 휙 지나쳐 뛰어간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하여 율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붉은 치마에 붉은 댕기를 한 어린 여자아이였는데, 그 뒤를 관례도 올리지 않은 남자아이가 쫓고 있었다.
“연희야! 그만 뛰어라. 숨이 차 죽겠구나!”
속상하기도 하고 바다에 있는 동생 생각도 나서 기어코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릴 적 선이도 저리 짓궂은 면모가 있었지. 잘 지내고 있을까…. 정말 돌아가고 싶구나…. 그러다 율은 무심코 이락을 응시하였다. 그 또한 멀어지는 남매를 보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눈동자의 색이 평소와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