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내가 말했지. 이곳에 처음 와서 책을 썼는데 그것이 크게 흥하여 부자가 됐다고.”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합니다. 제목이 저승전이지요. 당시 번 돈으로 옥장판을 샀다가,”
“슷. 옥장판의 옥자도 꺼내지 마. 내가 그 이후로 옥으로 된 건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아…. 율은 그의 마음이 이해됐다. 왕구 또한 박 비슷한 것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다고 하였으니까.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도중 이락은 뜻밖의 말을 해 주었다.
“너도 책을 봤으니 알 것이다. 그 책에는 저승의 지옥이 꽤 상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아?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
“그렇다면, 책에 서술하신 묘사가 전부 사실인 겁니까?”
“이봐, 쥐방울.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동요했다는 게 중요하지. 그 책이 인기리에 팔려 나가면서 신기하게도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나쁜 짓을 하려고 마음먹었다가도 지옥에 갈까 두려워 포기한 것이지.”
율은 감탄하였다. 책 하나가 그리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거군요.
“종국엔 그것이 왕의 귀까지 들어갔고 하루는 나를 궁으로 부르더구나. 내 공로를 치하하며 원하는 걸 말해 보라 하길래, 온천을 달라고 청하였지.”
율은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이런 온천을 내주는 게 왕으로서는 쉽지 않았을 텐데.
이락이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 대하여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나이나 그런 것이 아닌, 다른 것들…. 어디서 태어났을까. 부모는 어떤 이들이었을까. 어린 시절이 있었을까. 성격은 어땠을까. 연모하던 이도 있을까…. 있다면 아직 마음에 품고 있을까….
그 와중에 이락이 저를 맞은편에서 빤히 본다.
“쥐방울.”
“예?”
“너 그 위의 바위에 걸터앉아 볼래?”
율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바위에요…?
“내가 화병이 난 게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느냐?”
“…화병인 걸 알고 계셨습니까?”
“밖에서 그렇게 떠드는데 어떻게 못 들어.”
“…….”
“무령이 원인 제공을 8할은 했지. 나머지 2할은 네가 했고.”
율은 헤헤, 하고 웃었다.
“생각보다 제 지분이 적습니다.”
“신나? 좋아 죽겠어?”
“아니요…. 그럴 리가요….”
“일단 올라가서 앉아 봐. 청을 들어주면 내 병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율은 고민 끝에 바위에 걸터앉았다. 속적삼이 젖어 살이 고스란히 비치길래 물기를 짜서 옷이 최대한 붙지 않도록 탁탁 바깥쪽으로 당겨 줬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율은 볼이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켜보던 이락이 물속으로 손을 넣더니 이제는 다른 것을 요구하였다.
“저고리를 풀어 젖히거라.”
율은 인상을 쓰고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나는 너 아플 때 그리 정성을 쏟았는데, 너는 이 정도도 못 해 주는 거냐.”
율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화병은 이락 님 성격이 괴팍하여 난 것이라고 따지고 싶었으나, 저도 저번에 앓았던지라 딱히 할 말은 아니었다. 마지못해 고름을 풀자 옷이 벌어지며 가슴이 드러난다. 부리나케 그것을 잡자 이락이 손짓한다.
“그대로 있어라. 그대로.”
“대체 왜…?”
아…. 뒤늦게 율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깨달았다. 눈빛이 어두워졌고, 붉은빛이 발현하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들어간 팔이 살짝살짝 움직이며 아랫입술을 끈적하게 핥는다. 율은 기가 막혀 옷깃을 확 여몄다.
“뭐 하십니까!”
“보면 모르냐. 너를 벗겨 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는 상상을 하고 있다. 손은 양물을 쥐고 흔드는 중이고.”
율은 질색하였다.
“변태스럽습니다!”
“시끄럽고 다리나 더 벌려.”
“용왕님만 색사에 미친 줄 알았는데 이락 님도 똑같습니다!”
그 말에 이락이 코웃음을 쳤다.
“네 왕은 혼인하고 나서도 평생을 그랬지. 근데 그거 알아?”
“무엇을요….”
“나는 너를 만난 후로 여인을 한 번도 안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율은 당황하여 말을 버벅댔다.
“누, 누가 그러라고 했습니까.”
“물론 아니지. 근데 너하고 있으면 신기하게 생각이 나질 않아. 널 울리고 괴롭히는 게 훨씬 재미있거든.”
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걸 변태라고 하는 겁니다. 남을 괴롭히고 울리면서 기쁨을 느끼다니…. 변태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아무튼, 그래서 요즘 난 기방도 끊었다. 수백 년을 그리 드나들던 곳인데도.”
“거짓말 마십시오. 저번에 영월관에 가셨으면서….”
“그건 중요한 일 때문에 간 것이고.”
“병조 판서를 만나러요…?”
“네가 어찌 알아?”
“저를 때리던 그 양반의 아버지가… 병조 판서라는 것을 그날 얼핏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궤짝에 고서를 가지고 온 자들이 병조 판서의 수하들이지요…. 칼에 같은 술을 매달고 있는 것을 눈여겨봤습니다….”
“그래서?”
율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락 님과 그분이 일을 도모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지만요….”
사실 상관없다. 저는 어차피 용궁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해서 말린다고 해도 이락은 듣지 않을 거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건 가져야 직성이 풀리며 목적을 이루는 데는 양심이란 것도 팔아 치워 버린 거 같으니까.
그러다 율은 심 낭자를 떠올렸다. 심 낭자의 부군은 이락에게 온천을 내린 왕의 후손이겠지…. 그녀의 안부 또한 궁금해진다. 어찌 지내고 있을까. 소문이 심 낭자의 귀에도 들어갔을까. 왕은 심 낭자를 진심으로 사모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의심 또한 많다고 느껴졌다.
만약 불신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면 심 낭자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다. 대체 누가 그런 악의적인 소문을 만들어 낸 걸까. 용궁에서 살아 육지의 돌아가는 실정을 모르니 답답하였다.
혹시 이락이라면 알지 않을까. 궁금하여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의 양물이 하늘로 불끈 솟은 걸 발견하고 율은 당황하여 고개를 홱 돌렸다. 이락은 아무렇지 않게 밖으로 나와 옷을 입었고 율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섰다.
“가시게요…?”
“응.”
옷을 입던 그는 무심한 눈길로 율이 접어 놓은 의복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오늘 마을에 시장이 서는데, 구경하러 갈 테냐?”
시장 구경이라는 말에 율은 마음이 살짝 설레었다. 가면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거리도 많지 않은가. 누가 보면 속도 없다 하겠지만 일단은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락이 정자 쪽으로 돌아서서 뒷짐을 진다.
“안 볼 테니 얼른 갈아입어라.”
“예….”
급한 마음에 젖은 저고리를 벗고, 바지도 마저 벗으려고 하는데, 발이 밑단에 걸리며 중심을 잃고 앞으로 콰당 넘어진다. 졸지에 율은 엉덩이만 치켜들고 풀밭에 엎드린 꼴이 됐다. 아아. 일어나려고 애쓰던 율은 고개를 돌리다 흠칫 놀랐다. 이락이 눈빛을 활활 불태우며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는 게 아닌가.
율은 황급히 바지를 추슬러 입으며 뒤로 물러섰다.
“오, 오지 마십시오! 저는 타 죽기 싫습니다.”
이락이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정자 계단에 걸쳐 앉더니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 댄다. 연기가 또 바람에 흘러왔고 율은 조금 걱정이 되어 그에게 말했다.
“적당히 피우십시오…. 그거 환각을 일으키는 거 아닙니까.”
“그리 잔소리하니 네가 꼭 내 마누라 같다.”
“…….”
율은 입을 꾹 다물고 젖은 옷을 비틀어 탁탁 털어 정자에 널었다. 마을에 다녀올 때쯤이면 다 말라 있겠지. 그러고 나서 봇짐을 챙겨 드니 이락이 곁으로 다가와 봇짐을 낚아채 간다.
“제가 들어도 되는데….”
“몸뚱이나 잘 건사하고 다녀. 앞으로 고꾸라지지 말고.”
“…….”
율의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런데 이락이 어느 틈에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살피고 있었다.
“또 왜 그러십니까….”
이락이 신세 한탄을 하는 것처럼 말을 내뱉었다.
“너하고 입 맞추고 싶다.”
“예?”
어이없이 보자 이락이 입에서 혀를 한번 굴리더니 씩 웃는다. 쥐방울 여기 가만히 있어라. 그는 근처에 있는 나무로 가서 나뭇잎 하나를 떼어 왔다. 저걸 뭘 하려고…. 궁금하여 물을 새도 없이 잎사귀를 율에게 건네었다.
“입에 대고 있어.”
버티고 있자 눈짓으로 어서 하라고 재촉한다. 율은 하는 수 없이 나뭇잎으로 입술을 덮었다. 곧이어 이락이 그 위에 입술을 지그시 누른다. 놀라 눈이 커졌고, 저항할 틈도 없이 나뭇잎이 화르르 타올랐다. 율은 이락을 밀쳐 내며 으악! 비명을 질렀다. 입술을 더듬어 멀쩡한지를 확인하고 밑을 바라보니 잎사귀는 불에 타 잿가루가 되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노,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락은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진 나뭇잎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무령 이 개새끼….”
화를 내려던 율은 그만 웃음이 터져 풉, 하고 입을 막았다. 여우보고 개새끼라니. 무령이 들으면 또 날벼락을 칠 일이다. 고개를 든 이락의 눈빛에 아쉬움이 얼마나 가득한지 이젠 짠하게 보일 지경이다. 율은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잽싸게 그를 외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