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화병이네.”
의원의 말에 왕구와 왕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병?
“맥을 잘못 짚은 건 아니고? 영감도 아시잖소. 우리 큰형님이 누굴 병나게 했으면 했지, 본인이 병에 걸릴 양반이 아니란 걸.”
의원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러네. 하지만 맥이 그런 걸 어쩌겠어. 인편으로 약을 보낼 테니 당분간 심신을 안정시킬 수 있게 둘이 잘 도와주시게. 아, 당분간 삼도 끊으라 전해 드리고.”
의원이 말을 마치고는 대문 밖으로 사라졌고 왕구와 왕태는 여전히 의아하여 이락의 방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무슨 일인지 이락은 이틀 전부터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담배만 연신 피웠으며 어젯밤부터는 자리에서 아예 일어나질 않았다.
둘은 이락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뭣 때문에 화병이 나셨지. 형님은 짐작 가는 거 없수?”
“난들 아냐. 분명 범인이 있을 텐데…. 누군지 몰라도 내가 찾아내서 다리 몽둥이를 확 부러트리고 말 거다.”
왕구가 한술 더 떴다.
“다리만 갖고 되겠소. 팔도 잘라 버립시다!”
마루에 조용히 앉아 있던 율은 팔과 다리를 움츠리고 허공만 쳐다봤다. 때마침 왕구가 성큼성큼 다가왔고 율은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방울아, 너는 아냐? 큰형님이 왜 저리됐는지.”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무령 때문이라고 하면 분명 찾아갈 테고, 그러면 큰 희생으로 번지지 않을까. 왕구와 왕태가 힘깨나 쓴다고 하지만 구미호를 어찌 이기겠는가. 거기다 자신의 탓도 있는 거 같아 율은 결국 거짓말을 하였다.
“모… 모르겠습니다….”
왕구는 크게 한숨을 내쉬다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엔 방울이가 화병에 걸리더니 이번엔 형님까지…. 설마 이거… 전염병인가?”
듣고 있던 왕태가 웃기는 소리 말라며 타박을 하더니 잠시 침묵이 흐른다. 어느새 둘 다 율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고, 율은 억울한 마음이 있었으나 변명하지는 않았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이락이 왜 저리됐는가에 관하여 열심히 추측을 벌이는 가운데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락이 나온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흐트러진 옷차림새였고 얼굴엔 신경질이 잔뜩 묻어 있었다.
왕구와 왕태가 급히 그쪽으로 가려다 혹시 전염될까 싶었는지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큰형님. 괜찮습니까? 어쩌다 화,”
왕구가 말을 하려고 하니 왕태가 툭 친다.
“의원이 별거 아니랍니다. 피곤하여 살짝 지친 거라고, 약을 지어 보낸다 했습니다.”
이락은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신을 신기 전까지 율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 냉랭함에 안도하면서도 우습게도 서운한 마음이 함께 들었다. 율은 자신의 복잡한 심경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온천에 다녀오마.”
“그러세요. 뜨신 물에 몸을 지지면 아무래도 기운이 돌아오질 않겠습니까.”
“쥐방울.”
율은 흠칫 놀라서 돌아봤다.
“따라와.”
서운함이 사라지고 이젠 긴장과 불안이 몰려온다. 내키지 않아 마루에 딱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니 왕구가 어서 가라고 눈치를 준다. 율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고 끌려가는 소 마냥 터덜터덜 이락에게로 걸어갔다.
대문 밖으로 나와 온천으로 가는 내내 이락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온천에 도착한 뒤에는 서슴없이 옷을 벗더니 탕 안으로 들어갔고 바위에 기댄 채 눈을 감아 버린다. 율은 그 곁에서 서성이다 정자로 올라갔다. 전에 올려 뒀던 책을 나뭇가지로 툭 쳐 떨어트린 다음, 읽다 만 부분을 펼치는데 이락이 저를 부른다.
“장죽을 가져다 다오.”
율은 급히 계단을 내려가 봇짐에서 그의 장죽을 꺼내었다. 장죽 끝에 불을 붙이고는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었다. 연기가 날아왔는데 평소 피우던 것과 향이 다르다. 전에 개울가에서 이락의 권유로 한번 피워 본 경험이 있었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율은 그것이 환각성 식물을 말린 것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율은 이락이 이틀 동안 거의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요깃거리를 싸 오지 않은 것에 대하여 후회했다. 봄이니 찾아보면 근처에 먹을 것이 있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고 와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멀리 가진 말고.”
화가 단단히 난 줄 알았는데 음성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마음이 놓인다. 율은 그를 남겨 두고 온천 주변을 살피었다. 먹을 만한 것을 찾으려고 숲을 뒤지는데 열매를 맺은 나무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나마 나무 밑에 있는 노란색 버섯이 전부였다.
색이 곱고 맛있어 보여 율은 버섯을 채취하여 봇짐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돌아와 보니 이락은 여전히 온천욕 중이었다. 율은 근처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으며 봇짐을 열었다.
“이락 님, 배고프지 않으세요?”
“응.”
“오랫동안 굶으면 좋지 않습니다…. 아픈 게 빨리 나으려면 뭐라도 드셔야지요….”
그러고 나서 봇짐에서 버섯을 꺼내었다.
“열매는 보이질 않고, 이것이 눈에 띄어 챙겨 왔습니다. 색이 곱지요? 전에 보니 버섯 반찬을 좋아하시는 거 같길래…. 생으로 먹는 것이 부담스러우시면 제가 집에 가서 볶아 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락이 손을 내민다. 율은 기쁜 마음으로 그의 손에 버섯을 넘겨줬고 이락은 향을 맡은 뒤 그것을 입에 넣어 음미하였다. 향이 꽤 좋구나. 맛도 있고. 율은 뿌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나 더 드릴까요? 더 큰 것을 넘겨준 뒤 율은 저도 맛이 궁금하여 작은 걸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이락이 슥 본다.
“너도 먹게?”
“예, 맛이라도 보려고요….”
“먹지 마라.”
“아까우세요…?”
“독버섯이다.”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여 율은 귀를 의심하였다. 방금 독버섯이라고 하신 겁니까?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락의 표정을 보니 진지하다. 또다시 장난을 치는 건가.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봇짐을 뒤져 가져온 육지 도감을 꺼내었다.
‘버섯편’을 펼치어 한 장씩 넘기는데 흡사하게 생긴 버섯이 눈에 들어온다.
[강한 독을 지녔으며 성 기능을 저하하고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율은 입을 쩍 벌리고 이락의 팔을 붙들었다.
“뱉으십시오! 얼른 뱉으십시오.”
이락이 보란 듯 입을 벌린다. 버섯은 이미 배 속으로 들어간 후였고, 율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정신입니까? 그걸 드시면 어찌합니까. 얼른 게워 내십시오! 구역질해서라도 빼내야 합니다.”
등을 찰싹찰싹 두드리니 이락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만해라. 손에 감정 싣지 말고. 하지만 율은 그가 잘못될까 봐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락은 버섯을 먹기 전과 다를 바가 없다. 아무런 증세도 나타나지 않았고 율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와 버섯을 번갈아 봤다.
“정말… 괜찮으세요?”
“내가 걱정돼?”
“말이라고 하십니까….”
그제야 이락이 웃는다.
“이것보다 독한 걸 가져와도 나는 죽지 않아.”
“…….”
“그것이 내가 받은 벌이다. 여기서 볼품없는 토끼 귀를 달고 이 지긋지긋한 삶을 계속하여 영위해 나가는 것.”
“누구한테… 벌을 받으신 겁니까?”
“있어. 어떤 성질 고약한 영감탱이.”
“이락 님은 정말… 무령 님 같은 존잽니까? 아니면 신령? 연세는 어떻게 됩니까. 꽤 많을 거라고 짐작은 하였는데, 혹여 500살이 넘은 것은 아니지요?”
“넘었으면 왜. 문제라도 있어?”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없지만, 제가 더더욱 깍듯하게 대우를 해 드려야지요. 따지고 보면 저의 조상님뻘이지 않습니까. 아니다, 조상의 조상의 또 조상의…. 아유 세상에. 대체 저하고 몇 살 차이가 나는 겁니까. 이락 님이 보시기에 저는 갓난아기겠습니다.”
웃으라고 한 말인데 이락의 미간이 꿈틀한다.
“그만해. 짜증 나니까.”
“예….”
율은 남은 버섯은 멀찌감치 던져 버리고 정자로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락이 탕으로 들어오라며 부른다.
“저는… 책만 읽다 가겠습니다.”
“너도 온천을 좋아하잖아. 어차피 난 이제 네 몸에 손도 못 댄다. 이틀 전만 해도 너한테 가장 위험한 놈이 나였는데, 이제는 가장 안전한 놈이 됐지.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들어와서 몸을 담가. 그러면 피로도 풀리고 피부도 좋아질 거다. 하긴 넌 피부가 참 좋더라. 매끈하고 부드럽고, 씹으면 씹을수록 달콤한 과일 향이 나고… 또….”
율은 듣기 싫어 버럭 성질을 냈다. 그, 그만하십시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차마 용기가 없어 모두 벗지는 못하고 적삼을 남겨 둔 채 탕에 발을 담갔다. 역시 따뜻하니 피로가 풀린다. 엊그제 교미를 나누었던 곳에서 이리 마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민망하여 딴청을 피우던 율은 문득 궁금한 것이 더 생겨났다.
“근데 이락 님….”
“응.”
“이 온천을 왕께서 주셨다 하셨지요….”
“그랬지.”
“무슨 연유로 주신 겁니까?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이락은 예전 일을 더듬는 것처럼 턱을 어루만지며 눈동자를 위로 슥 굴렸다.
그때가 언제더라….